정말 독특한 작품이다. 태고에 살아가는 주요 인물들(귀신이나 개도 포함)의 개별 시간에 초점을 맞춰 미시적인 관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 같더니, 작품을 다 읽고 나니 100년에 걸친 태고 마을의 역사를 거시적으로 쭉 관통한 느낌이 든다. 유럽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마을이면서, 절대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독특한 장소 태고! ‘태고’라는 단어 선택도 신기하다. 공간의 이름이면서 시간을 나타내는, 단순한 이름이 아닌 뭔가 신화적이고 아득한 느낌을 갖게 한다. 특히 주요 인물들의 계보가 남성이 아닌 여성 ‘게노베파-미시아-아델카’ 혹은 ‘크워스카-루타’라는 것도 모계사회를 보는 듯한 강렬한 인상을 준다. 많은 등장인물들이 태어나고 죽지만, 특히 전쟁을 통해 많은 이들이 사라져 가지만, 그 안에서도 여성들..
"눈부신 안부"의 백수린 작가의 작품을 찾다 이 책까지 오게 되었다. "함께 걷는 소설"은 창비의 청소년을 위한 시리즈 도서로 '벗과 함께하는 일의 소중함' 또는 '진정한 우정'을 다루는 소설집이라고 한다. 그런데 읽어보니 이 책이 청소년에게 맞을까 싶다. 흔히 정의하는 '청소년 문학"의 범주와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영어덜트 소설처럼 성장이 어느 특정한 시기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니 크게 보아 '성장 소설'로 보지만 중학생들에게 추천하기에는 약간 주저된다. 기억할 겸 단편의 내용을 짧게 메모한다. 1. 고요한 사건(백수린) 이야기를 들어보니 '고요한 사건'이란 제목은 역설적인 표현이다. 고요할 수 없기 때문에 '사건'이지 않을까. 따라서 자신의 삶이 이른바 고요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한 장면..
2024년 첫 번째 독서모임에서는 "황금종이"와 "함께 걷는 소설"을 읽고 이야기 나누기로 했다. "황금종이"는 작가 님의 필력을 기대하며 선택한 책이고, "함께 걷는 소설"은 "눈부신 안부"를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백수린 작가 님의 작품을 더 읽어보고 싶어 선택했다. "황금종이"는 제목에서도 느껴지듯 황금만능, 돈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렇게 표지 그림을 바라보면 겉으로 드러난 붉은색 형상 속에서 돈에 열내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렇지만 사람들 내면에 깊이 있는 인간 본연의 심성을 찾아내자는 생각으로 보이기도 했다. 두 권짜리 소설이라 돈과 관련된 깊이 있는 갈등이 그려질 줄 알았으나 일종의 피카레스크식 구성의 소설이었다. 이야기는 주인공 '이태하' 변호사를 중심으로 대기업의 간부인 친구들의 돈과 관련된 ..
세계 단편 읽기로 시작한 여정이 미국의 샬럿 퍼킨스 길먼, 영국의 도리스 레싱을 거쳐 이사벨 아옌데에 이르렀다. 이번에는 스페인과 칠레 두 나라를 동시에 만나게 되면서 더욱 흥미진진하고 행복한 독서가 되었다. 예전부터 익히 들어왔던 스페인 내전의 참혹함을 일부나마 간접 경험하게 되었고, 칠레로 망명해 힘겹게 살아간 스페인 사람들의 이야기도 절절하게 다가왔다. 솔직히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지는 스페인 내전과 칠레 망명, 칠레의 민주화 역사는 머나먼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런데 스페인 내전에 마음 아파하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다시 칠레로, 칠레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는 스페인 망명자들의 지난한 삶을 응원하게 만든 건 작가 이사벨 아옌데의 필력 덕분일 것이다. 주인공 빅토르와 가족들, 사..
2023년 5월 중순, 이제 봄을 지나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는 계절이다. 중학교의 최고 학년인 3학년을 맡아 진학과 학습을 책임지는 3학년 부장이자 국어교사로서 학생들과 함께 ‘도전과 성장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교사이지만 나 자신도 한 사람의 도전자로서 스스로의 현재 상황을 분석하고, 좀 더 멋진 ‘나’와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위한 목표를 세우고 구체적인 실천과제를 정해서 9주하고도 3일, 총 66일 동안의 길고도 짧았던 도전과 실천을 해 보았다. 다음은 3월 12일 일요일부터 시작해서 5월 16일 화요일까지 실행한 ‘교사 김지선의 도전 과정’을 살펴보고 분석 및 정리한 보고서이다. 1. 도전 목표와 실천 과제 먼저 ‘나’를 위한 목표로는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 되자’였다. 그리고 타인과..
"당연하게도 나는 너를"도 운전하면서 오디오북으로 읽기 시작했다. 성우의 목소리에 인물의 성격이나 감정이 잘 드러나 있어 금방 몰입하게 되었다. 듣다 보니 뒷이야기가 궁금해 바로 담양공공도서관으로 이동해 책을 빌려 중반부터는 줄글로 읽었다. "죽이고 싶은 아이"를 띠지에 드러낼 만큼 이 책의 반전도 상당했다. 이야기는 두 명의 서술자를 통해 전달된다. 해록이와의 일이 사랑임을 주장하는 해주의 목소리에, 이야기 후반부에는 그것이 폭력이었음을 설명하는 경찰관의 목소리, 마지막으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는 해주의 목소리를 통해, 사랑과 폭력은 어떤 포함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것임을 경험하게 된다. 반전이 큰 이야기라 소감 쓰기가 조심스럽다. 반전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에 영향을 미칠 ..
작년에 읽으려고 책을 사 두었는데 읽지 못했다. 그런데 마침 겨울방학 동안 교육연수원에서 ‘미래교육,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란 직무연수가 있고, 연수 내용 중 조병영 교수님 강의가 있어 신청했다. 연수원에서는 책을 보내주면서 책 소감이나 질문할 내용을 연수받기 전까지 제출하라고 했다. 덕분에 밑줄 그어 가며 책을 읽고, 2015, 2022 개정 국어과 교육과정 읽기 영역도 살펴보았다. 이 책이 읽기 교육과정의 배경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국어과 교육과정은 국어 교사들만 읽을 것이고, 이런 대중서를 통해 국어과뿐만 아니라 세상과 소통하는 모든 교과에서 학교의 '수평적 성장'을 위한 교육활동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누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책을 읽고 정리하면서 제목부터..
색다르게 읽은 책이다. 전남공공도서관을 통해 '밀리의서재'를 3개월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부산' 관련 전자책을 두 권 정도 읽다, 요 며칠 내린 눈으로 차에 묻은 제설제를 씻으려 가는 길에 오디오북을 실행했다. 1학년들이 많이 읽었던 책 중 이 책이 오디오북으로 지원되고 있었다. 세차장 가는 길에서, 세차하는 동안, 다시 돌아오는 길에서 오디오북을 듣는데, 성우의 감정이 실린 목소리로 듣다 보니 소설의 내용이 잘 그려졌다. 그러다 뒷이야기가 궁금해 끊고, 전자책을 펼쳐 책을 마저 읽었다. 그리고 인상적인 구절을 정리하기 위해 종이 책을 대출해 다시 훑었다. 이야기는 하지오와 유찬이 시점에서 진행된다. 하지만 하지오가 좀 더 중심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제목도 그렇고. 지오는 미혼모 엄마의 ..
2학기에 학생 여럿이 이 책으로 서평을 썼다. "페인트", "나나", "챌린지 블루"를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눈에 담아 두었는데, 방학을 맞아 찾은 담양공공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얼른 찜했다. 표지를 보아서는 남녀 고등학생들에 대한 이야기인 듯싶은데,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란 제목과 소제목을 살펴봐도 내용이 잘 짐작되지 않았다. 다만 소제목이 모두 3음절인데 이유가 있을까. 그러나 이야기가 시작되자 이야기에 금방 몰입하게 되었다. 선우-혁의 형은 왜 죽었을까, 메타버스 '가우디'에 형의 집을 오랫동안 관리하고 있는 '곰솔'은 누구일까, 챕터의 끝이나 이야기 중간에 등장하는 '편지'는 누가 누구에게 보낸 것일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예측한 게 맞기도 하고 빗나가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