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경전>은 방한림전>과 상당히 비슷하면서도 다르다.남장을 하여 과거 급제하고, 황제는 물론 모든 백성과 귀족들에게 실력과 재능을 인정받고 칭송받는 영화로운 삶을 살아가는 큰 줄기는 같다. 하지만 방한림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숨기고 동성혼을 하며 우연히 얻은 자녀까지, 겉보기에는 당시 남성으로서 얻을 수 있는 부귀영화는 모두 누리다 생을 마감한다. 이형경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숨기고 성공하나, 유모의 지극한 방해(?)로 여성임이 탄로 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그동안의 공적을 인정받고 거의 똑같은 지위를 누린다. 다만, 형경을 사모하고 아끼는 장연과 황제의 속임수에 의해 이성 결혼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잠시 모함을 겪고 다시 명예를 회복하며 장수를 누리다 죽는다. 방한림과 이형경이 걸어간 ..
이 책을 읽을 때가 세월호 추모 기간이었다. 이야기 속 참사는 갑자기 불어난 물에 버스가 침수되고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작가가 충북 출신인 점을 고려하며 2023년 오송 지하차도 참사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학교를 배경으로 한 추모제 준비단 활동, 하수구 너머 왝왝이가 살고 있는 모습은 세월호 참사를 담은 이미지를 떠올리게도 한다. 이렇게 이야기는 참사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생각해 보게 한다. 먼저 생존자에 대한 태도. 이 소설의 1인칭 서술자 ‘연서’는 참사에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참사 생존자인 연서에 대해, 자기들의 기준에서 배려(이해) 여부를 판단하며 불편하게 한다. 희생자의 가족 중에는 그래도 살아남지 않았냐며 잘 살아야 한다고 부담을 주기도 한다.참사 희생자를 기억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복어는 귀여운 이미지가 있지만 위기에 처했을 때 몸을 크게 부풀린다거나, 단단한 이빨,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어 다부진 느낌도 준다. 서술자이자 주인공 두현은 학교가 동물의 왕국이라면 자신은 ‘복어’라고 이야기한다. 위의 이미지처럼. 그냥 학교를 동물의 왕국이라고 할 때 자신의 닮은 동물을 생각해 보는 질문인데 학교가 정글이라는 느낌이 들어 안타까웠다.두현이는 별명이 ‘청산가리’다. 단란한 가족이었지만 어머니는 건강 악화, 아버지의 사업 실패 등의 가정불화로 생을 마감한다. 오랫동안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큰 충격에 빠졌던 두현이에게 ‘청산가리’라고 부르는 아이들이 있는 곳이 학교다. 조금 세게 받아친 것을 자신의 잘못은 감추고 언어폭력으로 처벌하는 곳이 학교이기도 하고.한편 학교는 신자유주의의 현실..
독서 모임에서 이슬아 작가의 "가녀장의 시대"와 아니 에르노의 "세월"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두 책을 함께 읽은 것은 아니었다. 읽고 싶었던 책을 추천하다 두 권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읽고 나서 보니 두 작품 모두 페미니즘을 다루고 있었다. "가녀장의 시대"는 상상력이 돋보인다. 가계를 딸이 책임진다는 의미에서 '가녀장'의 시대를 상상하고 있다. 가정에서는 딸이지만 1인 출판사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 가정에서는 모부이지만 1인 출판사의 직원이기도 한 모부가, 서로 존중하며 가사 노동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모습이 낯설지만 평화롭게 그려진다.어머니, 아내, 며느리의 가사 노동을 가족을 위한 희생이 아닌 정당한 노동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상상에 동의하면서도 멀리 ..
제목이 입에 잘 오르지 않았다. 제목에 익숙할 때쯤 다시 보니 그냥 희미한 빛도 아니고,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였다. 표지 사진은 힘이 빠져 책상에 턱을 걸고 엎드려 있는 모습인 것 같다. 왼손을 책상에 올리고. 그런데 일곱 개의 달걀이 있다. 좀 생뚱맞다. 다분히 연출된 느낌이 난다. 7편의 단편을 힘들게 썼다는 표현일까.청소년 소설을 읽다, 성인 소설을 읽으면 처음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래도 심리 묘사가 더 복잡해지니까. 단편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몇 번 읽은 것 같다. 그런데 그 뒤의 ‘몫’부터는 금방 빠져들며 읽었다. 재미있게 읽고 나서 생각해 보니, 내가 이렇게 재미있게 읽었다면 청소년들이나 젊은이들도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을 것 같다. 1.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세상의 부조리에..
수학여행, 추석 연휴를 마치고 중간고사 문제츨 출제하려고 보니 모임이 3일 남았다. 금요일 급하게 학교에서 책을 빌려 퇴근했다. 시험문제도 내야 하는데 과연 읽을 수 있을까^^;토요일 오전 잠깐 책을 들었다가 이야기에 푹 빠져, 주말 이틀을 독서와 출제로 알차게 보냈다. 모임 샘들도 다들 재미있게 읽었다고 한다. 눈물을 흘리며 읽었다고 하니 샘들이 놀라며 어디에서 그랬냐고 물어본다. 인상 깊은 구절은 눈물을 흘렸던 부분이다. 나이 숫자만큼 눈물도 는다. 작가님의 필력이 대단하다. 여자 주인공의 이야기를 여성 작가가 쓰니 감정과 그 흐름이 섬세하게 잘 느껴진다. 증조모부터 나(서술자)에 이르기까지 4대 여자들의 힘겨운 삶이 그려진다.증조모는 백정이라는 신분으로 차별을 받으며 크면서도 호기심이 강했다. 그런..
체코 문학을 접할 때마다 이렇게 다양하고 깊이 있는 작가들이 많이 있었나 하고 놀란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가시적인 분량은 매우 짧지만, 우울하고 불길하고 침울한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우적댈 줄 알았는데, 읽는 내내 한탸의 수다에 쏙 빠져 버렸다.매 장마다 반복되는 구절인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는 안나 카레니나>, 두 도시 이야기> 이후로 가장 인상적인 서문이었다. 어쩌면 반복의 주술이랄까? 혹은 이십오 년째 시끄러운 아이들 속에서 일하고 있는 내 모습이 떠올라서였을까?오로지 술과 책으로만 채워진 한탸의 삼십오 년의 삶은 비루하고 비참하지만, 스스로를 비하하면서도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18쪽)’라는 표현이 정말 어울릴 만큼 시궁창 속에서도 자신만의 아름다움과..
‘훌훌’ 사전에는 미련 따위를 모두 털어 버리는 모양이라고 말한다. 그런 느낌이 짐작되는 ‘폰트’, 표지 그림에서 ‘훌훌’ 털어내고 싶은 상황이 상상된다. 그러나 결국은 ‘훌훌’ 털어낼 수 없는 삶에 대한 이야기가 어떻게 그려지지 않을까. 유리는 어렸을 때 집을 떠난 엄마의 소식도 모른 채 할아버지와 단둘이 산다. 그러나 유리와 할아버지 사이에는 최소한의 교류만 있을 뿐이다. 한집에 살지만 삶의 공간이 철절하게 분리돼 각자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유리는 대학 입학과 동시에 이런 생황에서 훌훌 벗어나고 싶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엄마의 죽음과 함께 나이 어린 동생 ‘연우’가 맡겨진다. 유리와 연우는 피가 섞이지 않은 남매다. 유리가 입양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생에게 아동학대의 상처가 보이고, 엄마의 죽음..
제목과 표지로 내용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고요한 우연’이라. 우연한 일은 대체로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고요하기 쉽지 않을 텐데 어떤 만남을 이야기할까. 표지를 가득 채운 초록빛 숲과 고양이 두 마리, 소녀의 모습에서 인간과 동물과의 교감을 담은 내용일까, 그러다 차례를 보니 우주와 관련된 이야기인가도 싶었다. 읽어보니 틀린 예상은 아니었고 이야기도 무척 재미있었다. 주요 등장인물 4명은 모두 같은 반이다. 같은 공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서로 친하지는 않다. 주인공 수현이는 정후를 좋아하고, 특별한 교류가 없었던 우연이 꿈속에 나타나며, 자신과 다르게 똑 부러진 성격에 모든 면에서 뛰어나지만 친구들에게 배척받는 고요가 마음에 쓰인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우연이 접속한 비공개 SNS를 알게 되고 거..
색다르게 읽은 책이다. 전남공공도서관을 통해 '밀리의서재'를 3개월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부산' 관련 전자책을 두 권 정도 읽다, 요 며칠 내린 눈으로 차에 묻은 제설제를 씻으려 가는 길에 오디오북을 실행했다. 1학년들이 많이 읽었던 책 중 이 책이 오디오북으로 지원되고 있었다. 세차장 가는 길에서, 세차하는 동안, 다시 돌아오는 길에서 오디오북을 듣는데, 성우의 감정이 실린 목소리로 듣다 보니 소설의 내용이 잘 그려졌다. 그러다 뒷이야기가 궁금해 끊고, 전자책을 펼쳐 책을 마저 읽었다. 그리고 인상적인 구절을 정리하기 위해 종이 책을 대출해 다시 훑었다. 이야기는 하지오와 유찬이 시점에서 진행된다. 하지만 하지오가 좀 더 중심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제목도 그렇고. 지오는 미혼모 엄마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