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훌(문경민)
- 상황별 청소년 소설 추천/가족과 갈등할 때
- 2024. 5. 27.
‘훌훌’
사전에는 미련 따위를 모두 털어 버리는 모양이라고 말한다. 그런 느낌이 짐작되는 ‘폰트’, 표지 그림에서 ‘훌훌’ 털어내고 싶은 상황이 상상된다. 그러나 결국은 ‘훌훌’ 털어낼 수 없는 삶에 대한 이야기가 어떻게 그려지지 않을까.
유리는 어렸을 때 집을 떠난 엄마의 소식도 모른 채 할아버지와 단둘이 산다. 그러나 유리와 할아버지 사이에는 최소한의 교류만 있을 뿐이다. 한집에 살지만 삶의 공간이 철절하게 분리돼 각자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유리는 대학 입학과 동시에 이런 생황에서 훌훌 벗어나고 싶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엄마의 죽음과 함께 나이 어린 동생 ‘연우’가 맡겨진다.
유리와 연우는 피가 섞이지 않은 남매다. 유리가 입양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생에게 아동학대의 상처가 보이고, 엄마의 죽음과 관련돼 있으며, 나이에 맞는 학력은 물론 기본 습관이 제대로 형성돼 있지 않다. 친구의 물건을 빼앗고 때린 일로 동생을 나무라다 동생의 날 선 대꾸에 동생을 때리는 모습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유리. 엄마의 모습과 겹쳐진다.
다행히 유리는 중 11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미희와 봉주, 고등학생이 돼 새로 동아리 친구가 된 세윤과의 만남을 통해 버틴다. 또 주위에 좋은 어른들도 많다. 먼저 담임 고향숙 선생님, 연우의 문제에 어른스럽게 대응해 준 세윤이 엄마, 그리고 자신과 연우를 받아준 할아버지 등. 좋은 친구들과 어른들이 유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보듬어 준다. 모처럼 청소년 소설에 좋은 교사가 나타나 다행이다. 작가님이 초등학교 교사여서^^
이 소설에서도 중요한 반전이 있다. 반전을 통해 유리의 엄마인 서정희 씨를 좀 더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더 큰 토론거리가 될 수도 있고. 관련지어 입양, 가정폭력, 가정 환경, 육아 등 이슈가 되고 있는 출산과 양육에 대해 이야기할 거리도 많다.
다음은 인상 깊은 구절.
(117) 진로 고민이 조금 복잡해졌다. 원래대로라면 대학 합격을 빌미로 이 집을 훌훌 털고 떠날 생각이었다. 지금도 그 결심은 여전했지만 연우가 은근히 걸렸다. 연우 아빠를 찾으면 해결될 일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하는 마음이 올라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대학 진학과 동시에 완전한 독립을 이루겠다던 냉엄한 포부가 조금 사그라들었다. 갈 수 있는 대학을 골라 보다가 전에는 쳐다보지도 않았던 집 근처의 학교를 찾아보기도 했다.
✍ 연우를 돌보기 위해 진로를 조정하는 유리의 마음이 따뜻하다.
(131) 할아버지는 막아서는 나를 밀쳤다. 나까지 거실 바닥에 쓰러졌다. 할아버지의 얼굴은 벌겠다. 치뜬 눈의 흰자가 무시무시했다. 이제껏 늘 보아 왔던 무덤덤한 얼굴이 아니었다. 연우도 저 얼굴을 보았을 터였다. 할아버지에게서만이 아니라 내게서도 보았을 터였다. 엄마 서정희 씨에게서도 보았을 터였다.
“그만요!”
✍ 유리가 연우에게 마음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연우 몸에 있는 체벌의 흔적 때문이다. 아이들 제대로 돌보지 않은 엄마. 그런데 기본적인 생활 태도를 갖추지 못한 연우를 나무라다 연우를 체벌하게 된다. 연우의 입장에서는 똑같은 어른이 된 것이다. 스스로도 충격이다.
(144) 연우와 함께 살기 시작한 뒤로 공부 시간이 확실히 줄었다. 아이 하나 돌보는 데 이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 몰랐다. 도무지 내 일에 오롯이 집중할 수가 없었다. 별별 생각이 다 올라왔다. 나는 별 탈 없이 혼자 잘 자란 것 같은데. 나 하나 살기도 바쁜데. 어서 2년을 채워 이곳을 떠야 하는데.
✍ 육아의 어려움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부부가 아이들 돌보기도 쉽지 않은데 고등학생 연우는 얼마나 버거웠을까. 정부의 출산 대책에 좀 더 보호자와 아이의 목소리가 담겨야 한다. 한편 성장의 양태는 사람마다 다 다르다. 그런 차이가 육아를 더 힘들게 한다.
(154) 세윤의 말이 맞았다. 학교를 통해서 성공하는 애들은 따로 있었다. 차분히 앉아 있는 걸 잘할 수 있고 오랜 시간 집중할 수 있고 두뇌 회전이 빠른 애들이 학교 안의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다. 불공평한 건 경제적인 요소만이 아니었다. 특정한 기질을 타고난 아이들을 우대하는 곳이 학교였고 학교에서 우리들이 치르는 경쟁은 따지고 보면 공정한 것도 뭣도 아니었다.
✍ 맞다. 학교의 이런 모습 때문에 청소년 소설에서 그려지는 학교 모습이 대체로 부정적이다. 교육과정이 쉽게 바뀔 것 같지는 않고, 학교밖 마을교육공동체나 청소년 시설이 더 확충되었으면 좋겠다.
(198) 선생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선생님은 말을 잇지 못했다. 고향숙 선생님 눈에 고인 눈물을 보는 순간 가슴이 찌르르 아팠다. 아팠는데 후련했다. 이대로 내가 입양됐다는 것까지 말해 버릴까. 그 얘기까지 하면 선생님은 나를 보면서 어떤 표정을 지을까.
선생님은 후, 하고 긴 한숨을 내쉬고는 재판 시간을 물었다. 재판 시간은 오후 네 시였다. 선생님은 핸드폰을 켜고 무언가를 확인했다. 그리고 말했다.
“조퇴 같이 하자.”
✍ 연우가 고향숙 선생님에게 연우가 재판받으러 가는 이야기, 할아버지가 복막암으로 치료받는 이야기를 하는 부분에서 눈물이 나왔다. 짠하다. 선생님의 조퇴가 든든하다.
(207) “살아온 길이 저마다 다르니까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아. 나는 그 사정을 알 수가 없잖니.”
나는 내 허벅지에 얹힌 연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연우의 지난 삶을 생각했고 연우가 살아가며 겪게 될지 모를 무수한 어려운 일들을 생각했다. 목이 메어 왔고 눈물이 돌았다. 엄마 서정희 씨의 삶을 생각했다. 내가 살아가야 할 삶도 생각했다. 나는 목청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 연우가 유리를 의지하듯 유리도 연우에게 의지하며 잘 살아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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