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의 일(이현)

 

이 책도 모임에서 이야기 나눈 책이다. 
나는 이 책이 청소년문학이란 타이틀을 가진 소설이지만 청소년보다는 자녀와 갈등하거나 좋은 관계를 맺고자 하는 부모를 위한 소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는 주인공 호정의 섬세하고 예민한 성격이 타고난 것인지 아니면 어린 시절 부모와 떨어져 친척들과 살면서 그들의 눈치를 보느라 남에게 표현하지 못하고 마음에 담아두는 성격으로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한 토론과도 관련이 깊다.
나는 호정이의 예민하고 소극적인 성향이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참함’이라는 단어를 알기도 전에 마음으로 먼저 느꼈다는 말의 울림이 컸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긍정적인 결말을 가져올 거라고 생각했다. 후천적이기에 소통을 통해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모임 샘들과 이야기 나누면서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먼저 제목과 표지가 참 잘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호수의 일”. 
지금 우리가 만나는 호수는 대부분 자연스럽게 고인 물이라기보다는 강이나 천의 물줄기를 막아 모아둔 인공적으로 고인 물이다. 비교적 넓고 깊어 호수의 위아래 온도 차가 크다. 하지만 그렇게 큰 호수도 겨울에는 구역별로 ‘차차’ 얼고 봄을 이기지는 못한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표지 그림도 호수 수면 위 (얼린 것 같지는 않지만) 등장인물들이 뚜렷한 원을 그려 자신만의 영역을 가지고 있는 여자(호정)와 남자(은기). 그리고 여자가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한다는 점에서 사람들에게 상처받으며 홀로 고립되어 가는 내용을 짐작하게 한다.

책을 읽으면서 부모로서 내 모습을 성찰하게 되었다.
사춘기 딸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부모와 계속 엇갈리는 아이의 모습은 의미상 평행선으로 읽힌다. 어떤 면에서 ‘사춘기’라는 용어는 문제 상황을 해석하기에 용이하지만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본질을 감추는 만병통치약처럼 등장하는 것 같다. 그래서 부모는 답답해하며 아이들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말하지 않는데 어떻게 알겠냐고 항변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모든 아이들이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상황에 빠지는 것은 아니라는 모임 샘들의 안타까움도 들린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모두 다다른 개별적인 아이들에 대해. 
기성세대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 때는~”은 일종의 일반적인 성공담이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의 세상은 전혀 다르다. 그러니 우리 아이들의 세상에서 생각해 보자는 울림을 주는 책이다. 그리고 청소년 소설로서도 우리 아이들에게 혼자만의 생각으로 판단하기보다 소통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준다.

교사로서 ‘곽근’에 대해서는 그냥 넘길 수 없다. 곽근은 영리하게 학교폭력을 일으킨다. 직접 나서지 않고 뒤에서 분위기를 조장하며 피해 학생들에게 견디기 힘든 상처를 남긴다. 그러면서 정작 본인은 따로 자신을 관리하며 자기 잇속을 차린다. 많은 가졌다는 것은 개인적인 당연함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대로 성장한 사람들은 자신이 가졌거나 타고난 것에 대해서도 사회의 혜택으로 생각하고 돌려주려고 한다. 곽근과 같은 아이를 만나 괴로워하는 아이들의 아픔에 대해서도 좀 더 귀 기울여야겠다.

사족이지만 작가와의 첫 만남은 “우리들의 스캔들”이었다. 블로그에 적은 소감에도 잘 드러나지만 교사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에 불만이 많았다. 그런데 이 책의 교사는 나름 자신의 역할을 하는 교사였다. 그 사이 작가에게 어떤 계기가 있었을까.

(81) 은기는 조금 웃었다. 하지만 어딘가 분명 어색한 웃음. 은기는 종종 그런 표정을 지을 때가 있었다. 아니면 내가 이제 와 그렇게 기억하게 된 것뿐인지도 모르겠다.
시간은 순서대로 흐르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 기억도 마찬가지다. 


✎스토리와 플롯의 차이처럼 읽힌다. 시간이 지나고 어떤 상황을 만났을 때 과거의 기억이 더 진하게 드러날 때가 많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아버지의 대한 기억은 불쑥 더 진하게 나타날 때가 많다. 그래서 더 그리워진다. 

(123)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말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다른 사람의 눈길만으로 아파지는 것들이 있다. 돌이킬 수 없으면서 사라지지도 않는 것들이 있다. 사라진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아니, 내가 과연 은기의 마음을 알까? 한 조각이라도? 상상이라도 할 수 있을까? 그런 마음을, 감히 내가? 나 아닌 다른 누구나라도?
그건 진정으로 외로운 일이다. 누구와도 같지 않은 마음을 가졌다는 건.
나는 외롭다는 말보다 그 마음을 먼저 배웠다. 이제 와 생각하니 그랬던 것이다.


✎이 책에서는 단어로 ‘정의’되기보다 그 ‘감정’을 먼저 느꼈다는 구절이 많다. 단어로 정의되었을 때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그래서 평범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 이전의 ‘감정’은 낯설고 개별적인 느낌이 강하다. 그만큼 ‘감정’에 충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충격도 진하게 나타나고.

(129) 그때 나는 알았다. 그냥 알았다. 그들은 나의 엄마 아빠 때문에 큰 피해를 봤다. 엄마 아빠를 미워하거나 적어도 원망했다. 그보다 더한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 아빠는 할머니 댁에 거의 오지 않았고, 나는 내내 거기 있어야 했다.
오갈 데 없는 채, 내 부모에 대한 원망이 가득한 곳에. (중략)
엄마 아빠랑 산촌 고모가 웃고 떠들며 즐거운 우리 집을 연출하고 있을 때, 할머니는 조용하다. 아무 말이 없다. 그때 할머니의 눈길이 내게 머물러 있음을 안다. 미안한, 안타까운, 애처로운, 딱한, 가여운, 짠한, 안쓰러운. 결국 그 모두는 사랑이라는 것도 안다.


✎자기에게 일어난 이를 오롯이 기억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떤 기억들은 새로 고침 해야 마음도 편할 것 같다. 하지만 호정에게 사과해야 한다. 아무리 할머니나 친척들이 채워주려고 해도 결국 부모의 몫, 가정이라는 것의 소중함을 다른 것으로 채울 수는 없다. 이런 배경에서 나오는 호정이의 행동을 '사춘기'로 돌리며 갈등 해결의 실마리는 더 꼬이고 있다. 

(150) 손이란 참 힘이 세구나. 그저 조금 힘을 주었을 뿐인데 온 마음이 전해지는구나. 따스해지는구나. 또 그만 눈물이 솟았다. 조금도 슬프지 않은데, 왜, 대체.
은기는 왜냐고 묻지 않았다. 울지 말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은기도 알고 있는 거였다. 스스로 설명할 수 없는 눈물이 있다는 걸. 은기도 그렇게 울어 본 거였다.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자세히 적을 수 없지만 은기에게도 큰 아픔이 있었다. 은기 역시 일상으로 돌아오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공감대 같은 것이 있었다. 모임 샘들과 이야기 나눌 때 은기의 아픔이 생뚱맞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호정이와 같이 청소년들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공통점이 보인다.

(264) 은기라는 애는 없었던 때로, 내 마음은 얼어붙은 호수와 같아 몹시 안전했던 때로.


✎소설의 첫 장면에 쓰여 있던 구절이다. 아무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던 그때가 가장 안전했다는 말, 남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나 혼자 조용히 침몰해 있어도 되는 때. 하지만 오랜만에 마음을 열었던, 그리고 따뜻한 손의 감촉으로 마음의 안정을 찾았던 은기의 갑작스러운 부재는 호정이를 크게 흔들리게 한다. 하지만 호정은 은기를 찾고 만나려 하며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호수의 밑바닥을 쳤다. 

(290) 내 방에 혼자 앉아 있으니 모든 게 꿈만 같다. 아주 긴 꿈. 어디까지가 현실이었을까? 2학기 첫날? 홍제천을 걸었던 날? 은정서점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날? 아니면 혼자 지하철을 타고 엄마 아빠를 찾아가던 오래전 그 밤? 만약 그 모든 게 꿈에 불과하다면 지금의 나도 진짜가 아닌 거겠지.


✎결국 아픔과 갈등의 상황이 나를 이루었다는 말로 들린다. 그런 것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다는 말.

(301) 이렇게 바위처럼 얼어붙었어도 일단 녹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어. 봄을 어쩔 거야? 계절이 그렇게 무섭다니까.


✎그렇다 얼어붙었던 마음도 어떤 계기가 돼 녹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 그 계기가 친구일 수도 있고, 부모일 수도 있고, 전문가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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