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지만 이 책을 고를 때, 짧은 한시에 얇은 책이라 가볍게 여겼다. 가볍고 짧게 훌훌 읽기 좋은 책이라 생각했다. 솔직히 읽는 시간은 매우 짧았지만, ‘감히’ 그렇게 호흡을 짧게 하고 읽으면 안 되는 여행기(여행시집)였다. 이 책은 (164) 이번 사행은 일곱 달 동 안 여덟 나라를 거치며 모두 육만 팔천삼백육십오 리를 다녔다고 저자가 단 한 줄로 요약하지만, 저자와 사행단이 겪었을 일곱 달 동안의 경험은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는 힘들고, 길고, 귀한 체험이자 기록이라고 단언한다. 한시를 잘 모르고, 또한 이 시집의 목적이 여행의 기록이기에 각 시들의 우수성은 가릴 수 없지만 방문 국가나 도시마다 남긴 짧지만 강렬한 감성들은 내 개인적인 기억, 이미지와 결합해 묘한 매력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이 시..
한강 작가님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노벨문학상이 삶에 좀 더 깊이 다가왔다. 작년 말 학교 동료들과 "채식주의자" 토론, 내년 폴란드, 체코 문학기행을 앞두고 쉼보르스카의 "끝과 시작"을 읽고 강의를 들었다. 이번 독서 모임에서는 "세월"을 읽고 이야기 나누기로 했다. 모임 덕분에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진입 장벽이 높은 소설. 그러나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이 있다시작부터 19쪽까지 과거를 회상하는 여러 장면들이 짧게 짧게 제시되는데 내용 파악도 안 되고 뭘 이야기하려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20쪽부터는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되겠지만 20쪽부터 읽어도 될 것 같다.이야기는 서술자의 돌 무렵인 1940년부터 2006년까지 프랑스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독서 모임에서 이슬아 작가의 "가녀장의 시대"와 아니 에르노의 "세월"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두 책을 함께 읽은 것은 아니었다. 읽고 싶었던 책을 추천하다 두 권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읽고 나서 보니 두 작품 모두 페미니즘을 다루고 있었다. "가녀장의 시대"는 상상력이 돋보인다. 가계를 딸이 책임진다는 의미에서 '가녀장'의 시대를 상상하고 있다. 가정에서는 딸이지만 1인 출판사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 가정에서는 모부이지만 1인 출판사의 직원이기도 한 모부가, 서로 존중하며 가사 노동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모습이 낯설지만 평화롭게 그려진다.어머니, 아내, 며느리의 가사 노동을 가족을 위한 희생이 아닌 정당한 노동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상상에 동의하면서도 멀리 ..
끝과 시작(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최성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500쪽에 가까운 시선집. 외국 작가 작품 번역이라는 두려움과 낯섦에 시작이 힘들었지만, 뒤로 갈수록 작가의 마음이 단어들과 함께 전달되는 것 같은 신기한 경험을 했다. 비록 모든 시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마음으로 와닿는 시들이 많았고 그 감동을 놓치고 싶지 않아 몇 편의 시들을 옮겨보았다. 작가도 작가지만 옮겨주신 최성은 교수님 덕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새해 좋은 시집을 읽은 것이 무척 뿌듯했다.내 생각을 정갈하게 정리하기 힘들어 해시태그로 표현해 보았다. #역사의식 #따뜻하고 섬세함 #모든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관심 #시인의 감성으로 단어에 천착(시작부터 끝까지) #천상 시인 #유머러스한 #겸손..
400쪽이 넘는 SF 대작.1961년 천재 폴란드 작가가 쓰고, 작가 생전에 영화도 3번이나 만들어졌다는 전설적인 작품이다. 그런데 이토록 엄청난 작품임에도, 물음표만 가득 남기고, 줄거리를 요약하면 100쪽이 살짝 넘는 너무 시끄러운 고독>보다 더 적은 양이 되는 솔라리스>! 이번 10월 고행 읽을 책인데, 함께 이야기 나무면서 궁금한 점들을 풀어가고 싶다. 1. 왜 행성 이름이 솔라리스? 태양이 두 개인 것과 연관? (*‘솔라리’는 태양, *‘스’는 복수의 의미) 2. 하나의 생명체, 유기체인 두뇌로 이루어졌다는 설정이 상징하는 것? (성장하는 불완전한 모습의 미지의 존재, 신적인 상징일 수도 있고, 단순히 우리 주변의 타인 혹은 이웃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3. 지구에서 온 우주인들(스나우..
제목이 입에 잘 오르지 않았다. 제목에 익숙할 때쯤 다시 보니 그냥 희미한 빛도 아니고,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였다. 표지 사진은 힘이 빠져 책상에 턱을 걸고 엎드려 있는 모습인 것 같다. 왼손을 책상에 올리고. 그런데 일곱 개의 달걀이 있다. 좀 생뚱맞다. 다분히 연출된 느낌이 난다. 7편의 단편을 힘들게 썼다는 표현일까.청소년 소설을 읽다, 성인 소설을 읽으면 처음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래도 심리 묘사가 더 복잡해지니까. 단편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몇 번 읽은 것 같다. 그런데 그 뒤의 ‘몫’부터는 금방 빠져들며 읽었다. 재미있게 읽고 나서 생각해 보니, 내가 이렇게 재미있게 읽었다면 청소년들이나 젊은이들도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을 것 같다. 1.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세상의 부조리에..
수학여행, 추석 연휴를 마치고 중간고사 문제츨 출제하려고 보니 모임이 3일 남았다. 금요일 급하게 학교에서 책을 빌려 퇴근했다. 시험문제도 내야 하는데 과연 읽을 수 있을까^^;토요일 오전 잠깐 책을 들었다가 이야기에 푹 빠져, 주말 이틀을 독서와 출제로 알차게 보냈다. 모임 샘들도 다들 재미있게 읽었다고 한다. 눈물을 흘리며 읽었다고 하니 샘들이 놀라며 어디에서 그랬냐고 물어본다. 인상 깊은 구절은 눈물을 흘렸던 부분이다. 나이 숫자만큼 눈물도 는다. 작가님의 필력이 대단하다. 여자 주인공의 이야기를 여성 작가가 쓰니 감정과 그 흐름이 섬세하게 잘 느껴진다. 증조모부터 나(서술자)에 이르기까지 4대 여자들의 힘겨운 삶이 그려진다.증조모는 백정이라는 신분으로 차별을 받으며 크면서도 호기심이 강했다. 그런..
체코 문학을 접할 때마다 이렇게 다양하고 깊이 있는 작가들이 많이 있었나 하고 놀란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가시적인 분량은 매우 짧지만, 우울하고 불길하고 침울한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우적댈 줄 알았는데, 읽는 내내 한탸의 수다에 쏙 빠져 버렸다.매 장마다 반복되는 구절인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는 안나 카레니나>, 두 도시 이야기> 이후로 가장 인상적인 서문이었다. 어쩌면 반복의 주술이랄까? 혹은 이십오 년째 시끄러운 아이들 속에서 일하고 있는 내 모습이 떠올라서였을까?오로지 술과 책으로만 채워진 한탸의 삼십오 년의 삶은 비루하고 비참하지만, 스스로를 비하하면서도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18쪽)’라는 표현이 정말 어울릴 만큼 시궁창 속에서도 자신만의 아름다움과..
올해 첫 독서는 김탁환의 사랑과 혁명> 1권이었다. 역사 소설가로서 필력이 입증된 작가이시기도 하고 담양 바로 옆 곡성에서 일어난 천주교 박해사건(1827년 정해박해)을 다루고 있다니 꼭 읽어야 할 것 같아, 600쪽이 넘는 분량을 1월 내내 읽어 나갔다. 주인공 들녘이 옹기 굽는 마을 처녀 아가다를 만나 옹기를 굽고 천주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만나는 과정이 천천히 굽이치는 섬진강처럼 펼쳐졌다. 1권을 다 읽고 2권을 읽을까 말까 고민하던 중, 아름답고 순한 들녘과 아가다가 맞이할 운명이 너무 가혹할 것 같아 올해 안에는 꼭 읽어야지 하며 2~3권은 그냥 책꽂이에 꽂아두었다. 그런데 운명처럼 쿠오바디스>를 만나게 되었다. 폴란드 작가 작품을 찾으며 언젠가는 꼭 읽을 운명이었던 시엔키에비치의 쿠오바디스>! ..
독서 모임에서 방학을 앞두고 함께 읽을 책을 살펴보다, 책도 유명하고, 이야기가 영화(말없는 소녀)로도 만들어진 이 책을 읽어보자는 제안이 있었다. 담양공공도서관에서는 두 권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모두 대출 중이라 예약한 끝에 만날 수 있었다. 첫인상이 강했다. 제목 “맡겨진 소녀”는 영어 제목(foster)처럼 ‘위탁 양육’에 관한 이야기이다. 엄마의 출산을 앞두고 ‘소녀’는 엄마의 먼 친척에게 맡겨진다. 낯선 환경에, 잠자리에서 실수를 하지만 친척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소녀가 부끄러워지 않도록 배려해 준다. 어려운 가정 형편과 여러 형제들 사이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소녀는 단정한 몸, 단정한 옷차림, 집안일을 하나씩 처리해 가며 자신감도 찾는다. 그러나 이웃의 말을 통해 친척 아저씨와 아주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