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과 시작(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끝과 시작(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최성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500쪽에 가까운 시선집. 외국 작가 작품 번역이라는 두려움과 낯섦에 시작이 힘들었지만, 뒤로 갈수록 작가의 마음이 단어들과 함께 전달되는 것 같은 신기한 경험을 했다. 비록 모든 시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마음으로 와닿는 시들이 많았고 그 감동을 놓치고 싶지 않아 몇 편의 시들을 옮겨보았다. 작가도 작가지만 옮겨주신 최성은 교수님 덕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새해 좋은 시집을 읽은 것이 무척 뿌듯했다.

내 생각을 정갈하게 정리하기 힘들어 해시태그로 표현해 보았다.

 

#역사의식 #따뜻하고 섬세함 #모든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관심 #시인의 감성으로 단어에 천착(시작부터 끝까지) #천상 시인 #유머러스한 #겸손한 #단호하고 엄격한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질문 #평범하고 일상적인 단어지만 결코 평범하거나 일상적이지 않은 작품들 #우주, , 지구, 인간, 이웃, 가족, 풀벌레, 하늘, 구름, 바위, 나무, 풀과 꽃

 

*옮겨 적은 시에서 ...(말줄임표)는 생략한 부분을 표시함.

 

-출판되지 않은 시들 가운데서(1945)-

11 ‘단어를 찾아서

솟구치는 말들을 한마디로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사전에서 훔쳐 일상적인 단어를 골랐다.

열심히 고민하고, 따져보고, 헤아려보지만

그 어느 것도 적절치 못하다.

...

우리가 내뱉는 말에는 힘이 없다.

그 소리는 적나라하고, 미약할 뿐.

온 힘을 다해 찾는다.

적절한 단어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찾을 수가 없다.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1952)-

23 ‘나에게 던진 질문

미소 짓고, 손을 건네는 행위,

그 본질은 무엇일까?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순간에도

홀로 고립되었다고 느낀 적은 없는지?

...

과연 내가 타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

책을 펼쳤을 때 활자나 판형이 아닌

그 내용이 진정 공감하듯이.

과연 내가 사람들의 모든 걸 헤아릴 수 있을까?

 

-예티를 향한 부름(1957)-

33 ‘두 번은 없다

...

야속한 시간,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두려움을 자아내는가?

너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아름답다

 

미소 짓고, 어깨동무하며

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소금(1962)-

81 ‘금혼식

...

성별의 구분 따위는 점차 희미해지고, 비밀은 전부 불에 타버렸다.

흰 바탕 위에서 모든 빛깔이 자유롭게 섞이듯

공통된 성향 안에서 상반되는 기질들이 어우러졌다.

...

금혼식 날에, 이 기쁜 날에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이

창가에 앉은 비둘기를 바라보고 있다.

 

-애물단지(1967)-

142 ‘결백

인간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매트리스 위에서 그 여자는 아이를 잉태했다.

게르다. 에리카. 어쩌면 마르가레타일 수도 있다.

그녀는 모른다,

인간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매트리스에 관해서는 정말 아무것도.

이런 종류의 소문은

타인들에게 퍼뜨리기도, 스스로 납득하기도 어려운 법.

그리스 신화 속의 에리니에스 여신들은 지극히 공정하다.

그들의 쥐꼬리만 한 과장이 오늘날 우리의 신경을 얼마든지 자극할 수 있다.

...

담당 미용사의 충고 한 마디.

자르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일단 한번 잘라내고 나면, 결코 이렇게 탐스럽게 자랄 수가 없거든요

제발 내 말을 믿어주세요.

이건 이미 검증된 사실이라니까요.

tausend-und tausedmal(천 번--, 그리고 또 천 번이나).”

 

158 ‘일요일에 심장에게

내 심장아, 정말 고맙다,

보채지도, 소란을 피우지도 않아서.

타고난 성실성과 부지런함에 대해

그 어떤 보상도, 아첨도 요구하지 않아서.

...

내 심장아, 정말 고맙다,

내가 또다시 잠에서 깨어날 수 있게 해주어서.

비록 오늘은 일요일,

안식을 위해 마련된 특별한 날이지만,

내 갈비뼈 바로 아래쪽에선

휴일을 코앞에 둔 분주하고, 일상적인 움직임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만일의 경우(1972)-

195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 : 빠르게 그러나 적당히 Allegro ma non troppo’

...

잎사귀의 끝자락을 향해 손을 뻗어

생을 잡아당겨본다.

그래서 멈췄는가? 무슨 소리가 들렸는가?

잠시라도 좋으니 단 한 순간만이라도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잊은 적이 있었던가?

 

210 ‘한 개의 작은 별 아래서

...

막다른 골목까지 추격당한 희망이여, 용서해다오, 때때로 웃음을 터뜨리는 나를.

...

언어여, 제발 내 의도를 나쁘게 말하지 말하다오,

한껏 심각하고 난해한 단어들을 빌려와서는

가볍게 보이려고 안간힘을 써가며 짜 맞추고 있는 나를.

 

-거대한 숫자(1976)-

215 ‘언니에 대한 칭찬의 말

...

우리 친척들 중에 시 쓰기에 종사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

우리 언니는 입으로 제법 괜찮은 산문을 쓴다.

그러나 그녀의 유일한 글쓰기는 여름 휴양지에서 보내온 엽서가 전부다.

엽서에는 매년 똑같은 약속이 적혀 있다:

돌아가면

이야기해줄게.

모든 것을.

이 모든 것을.

 

-다리 위의 사람들(1986)-

277 ‘히틀러의 첫 번째 사진

...

개의 불길한 울음소리도, 운명의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

이곳에서 역사 선생님은 옷깃을 느슨히 풀고

공책을 쌓아놓은 채 늘어지게 하품을 한다.

 

297 ‘선택의 가능성

영화를 더 좋아한다.

고양이를 더 좋아한다.

바르타강 가의 떡갈나무를 좋아한다.

도스토옙스키보다 디킨스를 더 좋아한다.

인류를 사랑하는 나 자신보다

사람들을 사랑하는 나 자신을 더 좋아한다.

...

신문의 1면보다 그림 형제의 동화를 더 좋아한다.

잎이 없는 꽃보다 꽃이 없는 잎을 더 좋아한다.

품종이 우수한 개보다 길들지 않은 똥개를 더 좋아한다.

...

숫자의 대열에 합류하지 않은

자유로운 제로(0)를 더 좋아한다.

기나긴 별들의 시간보다 하루살이 풀벌레의 시간을 더 좋아한다.

....

 

-끝과 시작(1993)-

313 ‘어떤 사람들은 시를 좋아한다

...

시를 좋아한다는 것--

여기서 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여러 가지 불확실한 대답들은

이미 나왔다.

몰라, 정말 모르겠다.

마치 구조를 기다리며 난간에 매달리듯

무작정 그것을 꽉 붙들고 있을 뿐.

 

-순간(2002)-

368 ‘가장 이상한 세 단어

내가 미래라는 낱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그 단어의 첫째 음절은 이미 과거를 향해 출발한다.

 

내가 고요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순간,

나는 이미 정적을 깨고 있다.

 

내가 아무것도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이미 무언가를 창조하게 된다.

결코 에 귀속될 수 없는

실재하는 그 무엇인가를.

 

-콜론(2005)-

407 ‘맹인들의 호의

...

여기서는 문장 하나하나가

어둠 속의 전시회에 출품된 그림처럼 느껴진다.

빛이나 색조의 도움 없이

홀로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

심지어 그들 중 누군가가 다가와서는

거꾸로 든 책을 불쑥 내밀며

자신에겐 보이지도 않는 저자의 서명을 요청한다.

 

413 ‘시인의 끔찍한 악몽

...

문장을 지배하는 건 비건조문.

명칭들은 사물들과 매우 정교하게 밀착되어 있어

함부로 덧붙이거나, 생략하거나, 변형시키거나, 위치를 바꿀 순 없어요.

...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 연설문-

시인과 세계 / 1996127,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437 지금껏 쭉 이야기를 듣고 계신 청중 여러분 가운데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살인자들, 독재자들, 광신자들, 몇 가지 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치며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정치가들 역시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또 열광적인 아이디어로 그 일을 수행하고 있지 않냐고요. , 그렇습니다. 하지만 문제든 그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모른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유일한 것, 오로지 그 하나만으로 영원히 만족합니다. 그 밖의 다른 것들은 철저히 관심밖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쪽을 향해 눈을 돌리고 주의를 빼앗기는 순간, 자신들이 주장하는 논쟁의 힘이 약해질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이죠.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질문을 던지지 않는 모든 지식은 결국엔 생존에 필요한 열정을 잃게 되고, 머지않아 소멸되고 맙니다. 과거와 현재의 역사가 너무도 잘 말해주고 있듯이, 극단적인 경우에는 사회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져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모르겠어라는 두 마디의 말을 나는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이 말에는 작지만 견고한 날개가 달려 있습니다. 그 날개은 우리의 삶 자체를, 이 불안정한 지구가 매달려 있는 광활한 공간으로부터 우리 자신들이 간직하고 있는 깊은 내면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만들어줍니다. 만약 아이작 뉴턴이 나는 모르겠어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사과가 그의 눈앞에서 우박같이 쏟아져도 그저 몸을 굽혀 열심히 주워서 맛있게 먹어치우는 것이 고작이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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