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독특한 작품이다. 태고에 살아가는 주요 인물들(귀신이나 개도 포함)의 개별 시간에 초점을 맞춰 미시적인 관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 같더니, 작품을 다 읽고 나니 100년에 걸친 태고 마을의 역사를 거시적으로 쭉 관통한 느낌이 든다. 유럽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마을이면서, 절대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독특한 장소 태고! ‘태고’라는 단어 선택도 신기하다. 공간의 이름이면서 시간을 나타내는, 단순한 이름이 아닌 뭔가 신화적이고 아득한 느낌을 갖게 한다. 특히 주요 인물들의 계보가 남성이 아닌 여성 ‘게노베파-미시아-아델카’ 혹은 ‘크워스카-루타’라는 것도 모계사회를 보는 듯한 강렬한 인상을 준다. 많은 등장인물들이 태어나고 죽지만, 특히 전쟁을 통해 많은 이들이 사라져 가지만, 그 안에서도 여성들..
코로나의 영향이 생각보다 길어지고 화상으로 만나는 모임도 조금씩 익숙해 지고 있다. 독서 모임도 1학기 내내 만나지 못했다가 9월부터 ‘줌’을 활용해 모이고 있다. 비대면 상황이라 상황 맥락을 공유하지 못해 자유롭게 마음껏 이야기 나누지는 못하지만, 상대방의 말에 오롯이 경청하는 태도도 생긴다. 그래도 아직은 만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이번에 읽은 책은 소설 “아몬드”의 손원평 작가의 최근 작품이다. 비교적 여유 있게 책을 구했지만 코로나가 진정(사회적 거리두기 1단계)되면서 모임과 출장이 몰리면서 이 책을 읽지 못하고 모임에 참가했다. 모임 샘들의 반응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사랑하고 헤어질 때, 서로 상처 받지 않으려고 방어적이거나 일정한 거리 유지에 신경 쓰는 모습들이 요즘 사람들의 정서와 비슷해 ..
상캐 모임에서 읽기로 한 책이었다. 지금까지 정유정 작가의 책을 5권 읽었다.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 “내 심장을 쏴라”, “7년의 밤”, “28”. 그리고 에세이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작가의 글은 재미있고 몰입감이 있는데 청소년 소설로는 추천하기 애매한 부분이 많다.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는 제목도 좋고, 다양한 문제 상황에 있는 청소년들이 주인공인데다, 전남이 이야기 배경이고, 5.18로 짐작할 수 있어 학생들에게 추천하지만 끝이 애매하다. 의도치 않는 여행 중에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등장하지만 촉급하게 마무리되었다는 느낌. “내 심장을 향해 쏴라”와 “7년의 밤”은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 했으니 재밌지만 중딩들의 경험을 뛰어넘는 부분이고, “28”은 코로나 시국에 읽고 토론할 만한 책이지..
"28"을 재미있게 읽은 아내가, 한 번 붙잡으면 놓기 힘들 거라 조언을 했다. 하긴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 “내 심장을 쏴라”도 그렇게 몰입하며 읽었다. 다만 당시 그렇게 몰입하며 읽었던 내용들이 지금은 대략의 줄거리와 약간의 '감'만 있다는 것이 아쉽다.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책 속표지에 제시된 마을지도가 그런 느낌이 들게 했고, 액자식 구성도 그런 느낌을 갖게 했다. 미리 제시된 결말을 통해 어떤 사건이 벌어질지 감이 왔다. 또 플롯도 다소 익숙하게 느껴졌다. 인물의 성격이나 갈등도 이야기를 들으며 대체로 파악되었다. 그럼에도 몰입하는 건, 플롯을 채우는 디테일한 스토리와, 개인을 뛰어넘는 안타까운 아픔들 때문이다 싶다. 누가 더 나쁜 놈이고, 누가 시작한 일일까. 표면적으로는 음주로..
(305) 어린아이가 삶을 배워가는 존재라면 어른은 죽음을 배워가는 존재다. 스티븐 킹이 자신의-제목이 기억나지 않는-소설에서 한 말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아이인 동시에 어른인 셈이다. 삶을 배우면서 죽음을 체득해 가는 존재. 나는 안나푸르나에서 비로소, 혹은 운 좋게 어른의 문턱을 넘었다. 관찰자 시점이 아닌 주인공 시점으로 죽음과 직접 대면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두려움을 견뎌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기쁘고 감사한 일이다. 글을 읽고,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떠올렸다. 또 최근 내 생일날 우리 가족이 인정해 주고, 나에게 준 선물한 150km 섬진강 자전거 종주도 떠올랐다. 살아가는 힘을 만들어 내지 못할 때, 작가는 안나푸르나로 떠난다. "내 심장을 쏴라"의 주인공 수명이 ..
정말이지 이런 소설은 읽고 싶지 않았다. 태교를 위해서나 육아를 위해서, 모유수유를 하며 혹시나 나의 불안함과 긴장, 두려움이 아이에게 전달되지 않기를 바라며 책을 읽어나갔다. 중간에서 멈출 수 없는 것은 도대체 이런 어마어마한 사태가 어떻게 마무리되는지 무척이나 궁금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정말 대단했다. 끝까지 매 순간을 긴장하며, 독자를 놓지 않기 때문이었다. 도 그랬다. 청소년 소설이면서도 묵직한 주제를 담아내는 작가의 솜씨는 계속해서 역량을 키운 듯 했다. 아직 읽지 않은 도 언젠가는 꼭 읽으리라. 이 책은 재난 상황보다는 그에 대처하는 인간에 대한 본질을 이야기하고자 작정한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세상 곳곳에서 억압받고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이나 동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 것 같았다. 빨간..
에서 언급한 책이다. 고은의 에 이어 두 번째로 저자가 소개한 책을 읽은 셈이다. 지난 주에 아들 산하가 역사가베를 배우러 간 김에 도서대출증을 만들어 책 세 권을 빌려 읽었는데, 모두 참 잘 고른 것 같다.앞서 기록에 남긴 , 도 좋았는데, 이 책도 정말 좋았다. 알랭 드 보통은 정말 보통이 아닌 듯 하다. 인간의 감정을 이토록 섬세하면서도 지적으로 읽어내는 안목과 통찰력, 그리고 센스있는 비유와 그림, 영화, 철학서까지 동원하여 그려낸 점이 참 멋지고 좋았다. 연애와 심리에 대한 방대한 백과사전같은 느낌도 들었고, 그러면서 지루하지 않은 글쓰기 능력까지 겸비했다. 책 소개에서는 사랑의 시작에서 결실까지 그리고 있다고 해서 에릭과 앨리스가 그 많은 성격 차이를 극복하고 결합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에릭..
다분히 자극적인 제목이다. 표지와 심사평 발췌를 보며 썩 당기지는 않았지만, 작가라는 점에서 호기심이 생겼다. 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비슷하다. 다만, 이야기 첫 부분이 잘 읽히지 않았다. 정신병원의 묘사가 정신 없기도 했고,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파악도 잘 안 되며, 1인칭 주인공의 시점이 너무나 말짱했다. 학기 초 업무에 짓눌린 나머지, 정신을 다잡고 수업에 들어가도 입과 분필이 따로 놀 때가 더러 있는데 정신병원 이야기까지 읽어야하나, 아이들과 함께 읽을 수 있을까 했던 기대를 접으려 할 즈음, 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먼저 인물들이 병원에 오기까지 사연이 있다. 그 사연이 담담하게 진술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통해 여러 진술 끝에 밝혀진다. 환자와 이들을 관리하는 사람들간에도 다양한 사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