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정유정)

 

정말이지 이런 소설은 읽고 싶지 않았다. 

태교를 위해서나 육아를 위해서, 모유수유를 하며 혹시나 나의 불안함과 긴장, 두려움이 아이에게 전달되지 않기를 바라며 책을 읽어나갔다. 중간에서 멈출 수 없는 것은 도대체 이런 어마어마한 사태가 어떻게 마무리되는지 무척이나 궁금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정말 대단했다. 끝까지 매 순간을 긴장하며, 독자를 놓지 않기 때문이었다.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도 그랬다. 청소년 소설이면서도 묵직한 주제를 담아내는 작가의 솜씨는 계속해서 역량을 키운 듯 했다. 아직 읽지 않은 <7년의 밤>도 언젠가는 꼭 읽으리라.

이 책은 재난 상황보다는 그에 대처하는 인간에 대한 본질을 이야기하고자 작정한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세상 곳곳에서 억압받고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이나 동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 것 같았다. 빨간 눈 괴질은 인간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주는 기본 장치라고 생각했다. 서재형, 김윤주, 한기준, 박동해, 박남철, 박주환, 노수진 등 등장하는 인물도 마치 옆에서 숨쉬고 있는 것처럼 다가왔다. 그들이 화양시에서 보여주는 모든 행동들이 나에게도 선택의 고민에 서게 했다. 내가 서재형이라면? 김윤주라면? 한기준이라면?

어디에도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언젠가는 어디에서 꼭 일어날 것만 같아 두렵다. 인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동물학대나 동해와 같이 사랑받지 못하고 자라나는 인간들이나 이런 조합들이 우연히 접점을이뤘을 때, 어떤 자연재해 못지 않은 심각한 혼란을 야기하고 말 것이다. 

그런 혼란의 지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자신의 본분에 충실했던 간호사 노수진의 마지막과 눈먼 소녀 승아의 죽음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렇게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이렇게 처참하게 죽을 수 있구나 하면서. 그 순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할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 타인과 함께 하는 아니 만물과 함께 하는 행복을 고민해야 할 것 같다.

살고자 자신의 개들을 죽였던 서재형이 다시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장면도 깊이 뇌리에 박혔다. 결국은 업보는 어디에선가 누군가의 희생으로 씻겨져 나가는 것인가?

아.... 우울하다.

 

(342) "살아나갈 비결을 알려줄까. 단순하지만 틀림없는 비결인데. 중상을 입고도 눈보라치는 북극 설원에서 19시간 동안을 견뎌낸 비결이야. 서재형이란 이름으로 도배된 11년 전 해외 토픽에는 없는 얘기지. 당연히 윤주 씨 기사에도 없는 얘기고.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거든. 결론부터 알려주면 살고 싶어 하면 돼. 물론 그냥 막연히 살고 싶어 해선 안 되지. 친구이자 연인이고 가족이었던 개들을 늑대 먹이로 줘버리고라도 나는 살겠다고 몸부림쳐야 해. 사람은, 사람 목숨은 지상의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궁극의 가치니까. 개 따위는 세상에 쌔고 널렸으니까. 안 그래?"

 

(345) 그녀는 움켜쥔 손을 슬그머니 등 뒤로 숨겼다. 목이 답답해왔다. 하고 싶은 말이 목젖 밑에서 신물처럼 솟구쳤다. 그때 살려고 애쓰는 것 말고 무엇이 가능했겠느냐고. 삶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본성이었다. 생명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본성. 그가 쉬차를 버리지 않았다면 쉬차가 그를 버렸을 터였다. 그것이 삶이 가진 폭력성이자 슬픔이었다. 자신을, 타인을, 다른 생명체를 사랑하고 연민하는 건 그 서글픈 본성 때문일지도 몰랐다. 서로 보듬으면 덜 쓸쓸할 것 같아서. 보듬고 있는 동안만큼은 너를 버리지도 해치지도 않으리란 자기기만이 가능하니까.

 

(434) 이 무질서의 한복판에 존재하는 유일한 안전지대가 시청 광장이었다. 무장한 폭도도, 강도나 도둑도, 부녀자를 희롱하는 무리도 없었다. 군대와의 물리적 충돌도 일어나지 않았다. 조직적인 집회가 이뤄지고 목표가 생기면서 스스로 질서를 지켰다. 각자의 집에서 텐트나 침남 등을 가져와 함께 밤을 지내고, 주먹밥을 만들어 나눠 먹고, 하루 앞으로 다가온 '그날'을 준비했다. 저들은 가슴에 성배를 묶은 자들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배신을 잘하는 '희망'이라는 성배.

28
국내도서
저자 : 정유정
출판 : 은행나무 2013.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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