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심장을 쏴라(정유정)


<내 심장을 쏴라> 다분히 자극적인 제목이다. 표지와 심사평 발췌를 보며 썩 당기지는 않았지만,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 작가라는 점에서 호기심이 생겼다.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비슷하다.


다만, 이야기 첫 부분이 잘 읽히지 않았다. 

정신병원의 묘사가 정신 없기도 했고,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파악도 잘 안 되며, 1인칭 주인공의 시점이 너무나 말짱했다. 학기 초 업무에 짓눌린 나머지, 정신을 다잡고 수업에 들어가도 입과 분필이 따로 놀 때가 더러 있는데 정신병원 이야기까지 읽어야하나, 아이들과 함께 읽을 수 있을까 했던 기대를 접으려 할 즈음, 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먼저 인물들이 병원에 오기까지 사연이 있다. 그 사연이 담담하게 진술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통해 여러 진술 끝에 밝혀진다. 환자와 이들을 관리하는 사람들간에도 다양한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병원이 사회 부조리와 잇닿아 있다.


1인칭 주인공 수명이는 가위에 대한 공항 장애가 있으며, 가위와 관련하여 분열된 자아인 '그놈'과 끊임없이 싸우지만, 이겨내지 못한다. 또다른 주인공인 '류승민'은 출생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다. 그것이 원인이 돼 불을 지르는 충동을 억제하지 못한다. 그러나 류승민이 정신병원을 탈출하려는 데는 가족과 부조리, 류승민의 신체적인 문제가 결부돼 있다. 이수명 역시 가위에 대한 공항 장애와 정신분열은 근본적인 원인이 따로 있다. 


(185) 한이는 백합방으로 갔다. 보호사가 꽂은 주사에 정신을 잃고 이동 침대에 실려 갔다. 이는 병원의 문제 해결방식이었다. 당사자가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방식. 한이의 해결방식이 한이가 병원에 들어온 이유를 설명하는 거라면, 간호사실의 해결방식은 한이가 병원을 나갈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생각할 능력을 상실한 자가 바깥세상에서 생존할 길은 없는 것이다.


한이는 정신지체로 문제를 '자해'로 풀어갔다. 손톱과 발톱이 없으며 이는 4개밖에 없는데, 그 한이가 자해로 문제를 풀어갈 수밖에 없는 이유 역시 병원 내부와 사회의 부조리와 관련돼 있으며 그걸 해결할 의지가 없기에 과도한 약물로 치료하며 결국 한이는 몸에 대한 통제력까지 잃는다.


정신병원을 탈출해야하는 승민이와 속사정을 알아 도와줄 수밖에 없는 수명이의 계속된 탈출은 급기야 그들에게 '전기 충격' 치료를 시술하게 한다. '전기 치료'는 정신병원의 치료 방식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두 번의 전기 치료 과정은 '치료'에 대한 회의와 함께 인간의 존재를 무화시키는 슬픈 과정이었다.


오히려 '전기 치료'에 대한 절박한 저항과 승민과의 대화 속에 수명은 잊었던, 잊어버리려 애썼던 무의식 속의 기억을 끄집어 내게 된다. 잊지 않으려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끊임없는 대화의 결과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치밀한 이야기 구성과 사회의 부조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정신 병원, 자신을 찾으려는 수명이와 승민의 모습 속에 우울하지만 몸 떨리는 전율이 느껴지는 소설이다. 


(239) "넌 누구냐?"

당황스러웠다.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가끔 궁금했어. 진짜 네가 누군지. 숨는 놈 말고, 견디는 놈 맑고, 네 인생을 상대하는 놈. 있기는 하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화가 났다. 잘 놀고 있다가 별안간 따귀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돌아서서 문짝에 등을 기댔다. 내가 제대로 들었다면, '존재의 징표'에 대해 물은 거라면, 내놓을 것이 없었다. 내 인생에서 나는 유령이었다.


(333) 이 병원 저 병원으로 내돌려지면서도 언젠가는 심판위원회에 서는 날이 올 거라 믿었다. 그날이 오면, 내게 세상으로 귀환할 자격이 있음을 스스로 증명해 보일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준비를 해야 했다. 횡설수설하다 기회를 놓쳐버리지 않도록. 밤마다 노토를 채워나갔다. 조금씩, 남 몰래 한 장씩, 어떤 밤엔 십수 장씩.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나는 나를 위한 별론을 쓰고 있는 게 아니었다. 승민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해 여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볼펜 한 다스가 사라졌다. 노트는 열 권으로 불어났다. 그 사이 나는 무한히 자유로웠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온전히 나 자신이었다. 인생의 표념을 떠돌던 유령에게 '나'라는 형성이 부여된 것이었다. 그것이 내 안에서 나갈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럼 우리는 이수명 씨의 첫 비행을 지켜본 사람들인가요?"

내 심장을 쏴라
국내도서
저자 : 정유정
출판 : 은행나무 2009.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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