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의 시간들(올가 토카르추크)

 

 

정말 독특한 작품이다. 태고에 살아가는 주요 인물들(귀신이나 개도 포함)의 개별 시간에 초점을 맞춰 미시적인 관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 같더니, 작품을 다 읽고 나니 100년에 걸친 태고 마을의 역사를 거시적으로 쭉 관통한 느낌이 든다.

유럽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마을이면서, 절대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독특한 장소 태고! ‘태고라는 단어 선택도 신기하다. 공간의 이름이면서 시간을 나타내는, 단순한 이름이 아닌 뭔가 신화적이고 아득한 느낌을 갖게 한다.

특히 주요 인물들의 계보가 남성이 아닌 여성 게노베파-미시아-아델카혹은 크워스카-루타라는 것도 모계사회를 보는 듯한 강렬한 인상을 준다. 많은 등장인물들이 태어나고 죽지만, 특히 전쟁을 통해 많은 이들이 사라져 가지만, 그 안에서도 여성들의 강인함과 사랑, 연민, 그리고 연대(?)의 장면-달의 사과를 통해 플로렌티카와 크워스카가 가족의 인연을 맺는 장면-은 수많은 시간들 속에서도 가장 큰 줄기이자 가장 아름다웠던 장면이었던 것 같다. 특히 모든 여성들의 중심(내 개인적인 생각, 소설 끝까지 살아남는 존재) 크워스카라는 존재의 측은함이 자연과 동화된 주술성 혹은 신비함 그 자체로 변화해 가면서 태고라는 공간은 더욱 특별해지는 것 같다.

수수께끼같은 작품이지만, 그냥 물 흐르듯이 이 작품을 읽다 보면 묘한 감동과 여운이 오래도록 남는 것 같다.

<떠오르는 질문들>

-태고라는 이름이 지니는 의미는 뭘까?

-상속자 포피엘스키의 게임은 어떤 것을 상징할까?

-그나저나 태고를 떠난 루타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미시아로부터 딸에게 전해진 그라인더의 의미는?

 

*게노베파 12-13

혹시 그런 생각 해보신 적 없으세요? 왜 우리는 바보같이 이런 전쟁통에 애를 낳을까 하는…….”

분명 신께서…….”

, 신이라……. 그분은 잘난 회계사죠. ‘인출금융자금을 관리하시니까요. 둘은 균형을 맞춰야만 하거든요. 그래서 하나의 생명이 사라지면, 또 다른 생명이 태어나죠……. 부인께서는 분명 잘생긴 아들을 낳으실 것 같네요.”

게노베파는 바구니를 들어 올렸다.

제게 필요한 건 딸이에요. 남편이 전쟁에 나갔거든요. 아들은 아버지가 없으면 제대로 크기가 힘들죠.”

셴베르트 부인은 계산대에서 나와서 문까지 게노베파를 배웅했다.

아마도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딸이 필요한 것 같네요. 다들 딸만 낳기 시작한다면, 세상이 한결 평화로워질 텐데 말이죠.”

두 여인은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상속자 포비엘스키 43

과연 나는 지금 당당하게 어둠을 향해 내려가고 있는가, 아니면 어둠을 부정하고 그저 방의 불이 꺼진 것뿐이라 여기며 과거에 머물던 그곳으로 되돌아가는 중인가

 

*미시아 49

미시아는 여느 다른 인간들처럼 불완전한 상태로 조각조각 나뉘어 태어났다. 보는 것, 듣는 것, 이해하는 것, 느끼는 것, 감지하는 것, 경험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그녀 안에서 제각각 분리되어 있었다. 앞으로 미시아의 전 생애는 이것들을 온전하게 하나로 결합했다가 다시 부서뜨리는 데 할애될 것이다.

 

*이지도르 91

뇌수종인 것 같아요. 머지않아 곧 죽게 될 거 같습니다. 방법이 없네요.”

의사의 말은 지금껏 의심으로 인해 얼어붙었던 게노베파의 사랑을 일깨우는 마법의 주문이었다. 게노베파는 이지도르를 사랑했다. 마치 오갈 데 없는 강아지나 불구가 된 동물을 사랑하듯이. 그것은 인간에게 허락된 가장 순수한 연민이 감정이었다.

 

*익사자 물까마귀 101

일말의 희망도 없는 방랑을 되풀이한 끝에 영혼은 육신으로 돌아오거나 육신을 떠났던 장소로 되돌아오곤 했다. 차갑게 죽어버린 육신은 영혼에게 마치 타다 남은 집터의 잔해 같은 것이었다. 영혼은 죽은 심장과 맥 빠진 눈꺼풀을 움직이려 해봤지만, 힘도 투지도 충분치 않았다. 신의 법칙에 따라 죽은 육신은 안 돼라고 말했다. 그래서 인간의 몸은 증오스러운 집이 되었다. 죽음의 장소는 또한 영혼에게 증오스러운 감옥이었다.

 

*크워스카 137

꿈을 꾸었어요. 달이 내 방 창문을 두드리더니 말했죠. ‘크워스카, 너는 엄마가 없고, 네 딸은 할머니가 없잖니, 안 그래?’ 그래서 내가 대답했죠. ‘.’ 그러자 달이 말했어요. ‘마을에 착하고 외로운 노파가 있다. 언젠가 내가 그 노파에게 나도 모르게 상처를 주었지. 그 여인에겐 자식도, 손주도 없단다. 그녀에게 가서 날 용서해달라고 이야기해주렴, 나도 이제 늙어서 심신이 많이 허약해졌다고.’ (플로렌티카)

 

*150

신은 모든 과정 안에 있다. 신은 모든 변형 속에서 박동한다. 어떤 때는 있고, 어떤 때는 조금만 있고, 때로는 아예 없을 때도 있다. 신은 그가 거기에 없는 순간에도 현존하기 때문이다.

 

*익사자 물까마귀 204

익사자는 영혼들이 떠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죽음을 맞는 이런 장소가 따로 있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영혼을 쫓아가려 애썼지만, 그들은 익사자 물까마귀와는 다른 법칙을 따르는 존재였다. 익사자가 관심을 끌기 위해 아무리 몸부림쳐도 그들은 쳐다보지도, 귀기울이지도 않았다. 영혼들은 본능에 따라 오직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올챙이 같았다.

 

*랄카(붉은 털 암캐) 308

랄카는 미시아 혹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랄카와 미시아 사이에는 깊은 골이 존재한다. 사고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삼켜야 한다. 과거와 현재, 미래, 그 끊임없는 변화를 내면화해야 한다. 시간은 인간의 정신 안에서 작동한다. 그 너머 어디에도 시간은 없다. 랄카의 작은 뇌에는 주름도 없고, 시간의 흐름을 걸러내는 장치도 없다. 그러므로 랄카는 현재를 살고 있다.

 

*상속자 포피엘스키 320

하긴 어쩌면 정상적인 가정마다 그런 사람이 한 명씩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광기의 단면들을 홀로 짊어지고 있는 누군가요. 그가 일종의 안전 밸브처럼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해주는 걸 수도.(포피엘스키의 딸과 미시아의 대화)

 

*미시아 343

파베우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공동묘지 입구에 걸려 있는 현판이 미시아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신이 보고 계신다. 시간은 달아난다. 죽음이 쫓아온다. 영생이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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