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이기호)

 

가볍게 재미있게 읽었다. 가족 소설이라고 쓰여 있으나 육아 일기와 같은 느낌의 수필이었다. 이렇게 소설을 쓸 수도 있겠구나 싶다가도 안전장치로 소설이라고 말한 것은 아닐까 생각되었다.

아들 둘에 딸 하나, 아이들의 이야기도 재밌고 부부간의 이야기, 부모님의 이야기에도 공감이 가는 글투다. 사람들을 유쾌하게 만들려고 만든 책이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가정에서 서술자의 태도가 눈에 걸렸다. 이야기 곳곳에서 아내의 현명함을 말하고 있지만 아내를 배려하지 못하는 모습이 보인다. 서술자가 그런 상황을 이야기했다는 게 지금은 아내의 서운함을 어느 정도 느끼고 있다는 말이 될 것 같다. 아니면 아내는 서운함에 화가 나 있는데 서술자가 눈치를 못 챈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2017년에 쓰여진 책이고, 남녀의 나이 차이가 8, 조교일 때 학생으로 만났기에 서술자에게서 나타난 태도일까 싶기도 하다. 여하튼 현명한 아내 덕분에 부부싸움까지는 가지 않는, 평범하고 안정적인 가족의 이야기였다.

집에 3살 아이가 있는 사람에게 권하면 공감하면서 재미있게 읽을 거라고 입을 모았다.

 

인상적인 장면

(36) 그날 밤도 나는 또 한 번 경건한 마음으로 설거지를 하고 방 청소를 했다. 그러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러니, 남자들이란 여자들 앞에서 아이가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빤히 알면서도 뚜벅뚜벅 걸어가는 자들이 바로 여자들 아닌가. 그게 바로 사랑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나는 내처 욕실 바닥도 박박 락스로 닦았다. (‘여덟 살 차이’ 중에서)

이게 소설인가 싶은 의심으로 시작해 서술자에 공감하며 재미있게 읽기 시작했다. 마침 아내 생일이기도 한데, 나 역시 지난주까지 기억하고 아이들에게 압박까지 넣고선 정작 내 일에 빠져 깜빡한 죄가 있다. 이 구절을 읽으며 조금 고민해 보았는데 아내는 나보다 '상당히' 옳다.

 

(59) “당신 마음 알았으니까...... 이십 년 뒤에, 나 늙으면 그때 그렇게 해줘......”
나는 그런 아내의 등을 바라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르침은 많으나 역시나 실천은 각자의 몫인 것만 같았다. (‘일요일엔 취사 금지중에서)

이게 진리다. 귀가 얇아 많은 비법들을 얻게 되고 그것을 적용하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특히 수업은. 이분은 나름 저명한 작가고 교수인 것 같은데 자기 고백적인 이야기를 썼다.

 

(74) 나는 잠깐 아파트 대출 이자 때문에 오랫동안 가계부를 들여다보던 아내의 모습을 떠올렸다. 마트에서 팔고 있는 값비싼 유모차 앞을 서성이다가 돌아선 아내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리고 염소 때문에 학교에 갈 수 있게 된 저 먼 나라 친구를 생각했다. 염소 한 마리에 4만 원. 나는 어쩌면 내가 평생 꼰대가 되지 않는다면, 그건 다 아내 덕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염소와 학교’ 중에서)

성탄절에 베트남 출장을 가게 돼 가족들끼리 쓰라고 준 돈을 아내가 우간다의 아이에게 후원했고, 아이는 그 돈으로 암소 한 마리와 염소 두 마리를 샀다고. 그 덕분에 인생이 바뀌었다고 편지가 왔다고 한다. 나도 공감이 돼서.

 

(142) 결혼엔 세 단계가 있다. 첫 번째는 낭만주의 단계, 두 번째는 사랑보다 현실이 앞서는 사실주의 단계, 그리고 세 번째는 남녀 간의 이성보다 인간적 유대가 깊어지는 따뜻한 인간주의 단계가 온다고.
우린 어느 단계를 지나고 있는 것 같아?”
아내가 물었다.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그런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내가 다시 씩씩하게 말했다.
낭만적 사실에 입각한 인간주의일세, 이 사람아!” (‘낭만적 사실에 입각한 인간주의’)

 

 

(158) “작은아빠, 동생들이 내가 말이 많다고 싫어하죠?”
나는 조카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그렇지 않다고 동생들은 누나를 좋아한다고 동생들이 삐치는 게 더 문제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조카딸의 입에선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제가요, 우리 오빠 때문에 말이 많아졌거든요. 우리 오빠가 많이 아프잖아요. 제가 말을 많이 해야 우리 오빠가 다치지 않거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속 어딘가에서 뭉클한 것이 올라왔다. (‘잔소리 대마왕중에서)

다운증후군 오빠를 돌보느라 잔소리가 많은 조카딸. 사람들에겐 나름의 서사가 있다. 감동적이다.

 

(168) “옛날에 달님하고 별님이 살았는데, 달님은 혼자고 별님은 너무 많았대요. 첫째 별님과 둘째 별님과 셋째 별님과 뚱뚱한 별님과 날씬한 별님과 엄마 말 잘 안 듣는 별님과 착한 별님과......”
이렇게 등장인물 소개만 십 분 넘게 한다
그렇게 많은 별님들이 달님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대요. 첫째 별님이 안녕하세요인사를 했고, 둘째 별님이 안녕인사를 했고, 셋째 별님이 반가워요, 달님인사를 했고, 뚱뚱한 별님이 밥은 먹었어요, 달님하고 인사를 건네고......”
이렇게 또 인사만 한 십 분 넘게 하면...... 둘째와 셋째는 인사만 듣다가 꿈나라로 가게 된다. 아아, 이거구나, 이거였어.(‘네버엔딩 스토리중에서)

모임 샘들이 육아하면서 아이들에게 동화책 읽어준 이야기를 풀었는데 다들 여기까지 비슷하게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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