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녀장의 시대(이슬아)

 

독서 모임에서 이슬아 작가의 "가녀장의 시대"와 아니 에르노의 "세월"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두 책을 함께 읽은 것은 아니었다. 읽고 싶었던 책을 추천하다 두 권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읽고 나서 보니 두 작품 모두 페미니즘을 다루고 있었다. 

 

"가녀장의 시대"는 상상력이 돋보인다. 가계를 딸이 책임진다는 의미에서 '가녀장'의 시대를 상상하고 있다. 가정에서는 딸이지만 1인 출판사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 가정에서는 모부이지만 1인 출판사의 직원이기도 한 모부가, 서로 존중하며 가사 노동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모습이 낯설지만 평화롭게 그려진다.

어머니, 아내, 며느리의 가사 노동을 가족을 위한 희생이 아닌 정당한 노동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상상에 동의하면서도 멀리 갈 것 없이 가정을 함께 꾸려나간다는 의미에서 가족 구성원 모두 적절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거나 아니면 역할을 나눠 부담하는 것이 서로를 존중하는 평화로운 가족, 평등한 가족이라는 생각도 든다.

 

내용뿐만 아니라 '장편소설'이라는 형식도 색다르다. 이야기가 여러 사건들이 중첩되면서 갈등으로 가는 형식이 아닌 가녀장의 시대와 관련된 여러 에피소드가 나열돼 있다. 에피소드 간 중첩되는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본다면 형식이 색다른 소설이기도 하다.

 

다만 이 책을 읽었던 샘들 중에, "일간 이슬아 수필집"에 나온 내용들이 이 소설에 나오거나, 작가의 인터뷰집 "새 마음으로"에서 나온 내용들이 실려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또한 꼰대스러울 수 있지만 교사로서, 성공한 작가가 아버지와 맞담배를 피우는 등의 모습이 우려된다는 의견도 있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인상적인 구절이 많았다. 작가님께 누가 되지 않는 선에서 메모해 보았다.

 

(40) 집안은 슬아 중심의 가녀장 체제로 재배치되었다. 오늘날 복희와 웅이는 슬아 밑에서 일한다. 출판사 업무뿐 아니라 집안일도 부부의 몫이다. 웅이가 주로 청소와 빨래를 하고 복희가 부엌일을 책임진다. 복희의 월급은 웅이 월급의 두 배다.
"엄마의 노동이 아빠의 노동보다 대체 불가하기 때문이야."
가녀장이 말했다. 이에 관한 웅이는 어떠한 불만도 없다.
삼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복희의 노동은 크게 다르지 않다. 날마다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한다. 장을 보고 냉장고를 경영하고 식재료를 다듬는다. 시아버지랑 살 때도 그렇게 했고 지금도 그렇게 한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가부장제 속에서 며느리의 살림노동은 결코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슬아는 복희의 살림노동에 월급을 산정한 최초의 가장이다.

✍ "가녀장의 시대"라는 상황을 설명하는 부분이라 조금 길게 발췌했다. 슬아, 복희, 웅이는 이슬아 작가의 가족들 이름이다. 그래서 이야기에 사실감을 더해 준다. 그러나 소설을 소설이다.

 

(52) 잘하는 일과 못하는 일을 가리지 않고 하다보니 어느새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많아진 사람이 되었다.

슬아 아빠 웅이에 대한 소개다. 문학 청년을 꿈꿨지만 가리지 않고 여러 일을 했다. 주방을 제외한 살림의 영역에서 역량이 뛰어나다.

 

(109) 자신에 관한 긴 글을 듣자 오랜 서러움이 조금은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슬아의 해설과 함께 어떤 시간이 보기 좋게 떠나갔다. 이야기가 된다는 건 멀어지는 것이구나. 존자는 앉은 채로 어렴풋이 깨달았다. 실바람 같은 자유가 존자의 가슴에 깃들었다. 멀어져야만 얻게 되는 자유였다. 고정된 기억들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래서 글이 중요하다. 이야기+성찰=이야기이다.

 

(123) "무슨 일을 해도 괴로운 건 마찬가진데...." (중략)
"잘하고 싶은 일로 괴로우면 그나마 낫잖아."

데드라인에 쫓겨 힘들어하는 슬아에게 주말노동자 철이가 괴롭겠다고 반응한다.  힘을 내자.

 

(181) 글을 쓰고 싶게 만든 자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좋은 너. 미운 너. 웃긴 너. 우는 너. 아픈 너. 질투 나는 너. 미안한 너. 축하받아 마땅한 너. 대단한 너. 이상한 너. 아름다운 너. 다만 운이 좋지 않았을 뿐인 너. 동물인 너. 죽은 너. 잊을 수 없는 너. 그런 너를 보고 듣고 맡고 만지고 먹고 기억하는 나. 문학의 이유는 그 모든 타자들의 총합이다.

이슬아 작가의 문학이 기존 문학과 다르다는 인터뷰이의 말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세상의 모든 것과 연관되어 있는 우리 모두 문학을 하고 있다.

 

(235) 대부분의 사람은 책을 읽지 않아도 살 수 있고 살아가야 하지만, 밥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때때로 한끼의 식사는 한 편의 글만한 대접도 못 받는다.

나도 매번 복희 씨와 같은 허전함을 어머니께 드리는 것 같아 메모했다. 각자 자신이 하는 일이 상대방에게 인정받고 싶듯, 매 끼니의 식사도 그런 속에서 차려지는데 그만한 값이나 반응을 매번 받지 못한다. 그나마도 한끼 손수 차려 먹을 때 느껴볼 만도 하지만 그때에도 라면이나 외식 등으로 해결해 버리니 그 공감이 오래가지 못할 때가 많다. 그것의 소중함도 느끼게 그런 장면을 연결짓는 작가의 독서력도 인상 깊다.

 

(294) 좋은 이야기에 대한 추앙과 문학에 관한 믿음으로 슬아는 움직여왔다. 신의 입을 빌려 기도하고 몸을 낮추듯, 슬아 역시 자기보다 먼저 살아간 작가들의 힘을 빌려 글을 쓴다. 작가들이 평생에 걸쳐 얻고자 하는 건 전지적인 시점일 것이다. 불가능한 목표지만 연습을 포기할 수가 없다. 그건 어쩌면 신의 시선을 상상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다른 이가 무엇을 느끼는지 헤아리는 일을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을 추앙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신의 시선을 상상하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표현이 인상적이다.

 

(302) 웅이에게 소설은 거짓말 모음집 같은 것이다. 거짓말들을 모아 진실을 가리키는 장르가 소설이니 말이다.

상상하는 힘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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