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구음초(김득련)

 

미안하지만 이 책을 고를 때, 짧은 한시에 얇은 책이라 가볍게 여겼다. 가볍고 짧게 훌훌 읽기 좋은 책이라 생각했다. 솔직히 읽는 시간은 매우 짧았지만, ‘감히그렇게 호흡을 짧게 하고 읽으면 안 되는 여행기(여행시집)였다. 이 책은

(164) 이번 사행은 일곱 달 동 안 여덟 나라를 거치며 모두 육만 팔천삼백육십오 리를 다녔다

고 저자가 단 한 줄로 요약하지만, 저자와 사행단이 겪었을 일곱 달 동안의 경험은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는 힘들고, 길고, 귀한 체험이자 기록이라고 단언한다. 한시를 잘 모르고, 또한 이 시집의 목적이 여행의 기록이기에 각 시들의 우수성은 가릴 수 없지만 방문 국가나 도시마다 남긴 짧지만 강렬한 감성들은 내 개인적인 기억, 이미지와 결합해 묘한 매력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특이하게 독자로서 관심과 걱정이 정말 많이 투영되었다. 다른 아시아 지역보다 뒤늦게 개항해서 정치, 경제는 물론 외교도 최약체인 나라에서 어떻게 이렇게 긴 사행을 다녀올 수 있었으며(자금과 사행단의 대우에 대한 궁금증 혹은 걱정?),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모스크바로 직행하지 않고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러시아에 들어갔는지(여행 일정에 담긴 의도) 등 많은 점이 궁금하고 걱정됐다. ‘걱정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과거 역사이긴 하지만 구한말 우리 선조들에 대한 이야기라서 저절로 감정적으로 몰입이 되고, 힘든 여정에 남일 같지 않은 마음으로 동참하면서 자연스럽게 걱정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문물과 휘황찬란한 근대 서양의 모습에 비판 없이 쉽게 경도되는 모습이 마음 아프기는 하지만, 내가 저 시대를 살아 이 사행단의 일원으로 여행했다면 당연한 나올 수 있는 반응이 아니었을까? 비록 145쪽에 밝힌 것처럼

“황제의 은덕으로 사신 일은 마쳤지만 어려운 백성 구제할 계책 없으니 부끄러워라.”

와 같이 나라를 부강하게 할 비책은 얻지 못했지만 듣고, 보고, 체험한 일을 세세히 기록에 남기는 일로 사행단의 임무는 충분하게 완수하지 않았을까라고 판단해 본다.

무엇보다 이 책의 의미는 171쪽에 해설자가 충분히 밝혔다고 본다.

“조선에 있어서 19세기 말은 이전에는 전혀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던 광범위한 영역 속의 여러 타자들과 처음으로 접촉하고 적극적으로 소통해야만 했던 시기이다. 이 시기 다양한 타자들과 자기와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는가는 상당히 중요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본서는 이렇게 복잡했던 조선인의 시대적 인식과 함께 그들의 자기 형성과 타자 인식 사이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텍스트이다.”

 

-인상 깊은 구절-

 

<도쿄>

-우리 공사관에 머물러 하룻밤을 자며 서기 유찬에게 지어 보이다-

(31) 해외의 인연이란 본래 기약 못해

등불 돋으며 이야기하다 보니 하룻밤이 짧구나

아침밥까지 우리 식으로 지어 주니 너무 고마워

집에 있을 때보다 도리어 낫구나

 

<폴란드>

-폴란드의 옛 서울-

(45) 지난날 폴란드의 수도

지금은 러시아의 일개 성이 되었네.

여전히 궁궐은 남아있어

아직도 저녁 종소리 들려오네

 

노래와 춤이 울려 퍼지던 번화한 땅에

떨어지고 남은 꽃만 적막하게 붉구나

남은 백성들 나라 잃은 슬픔에

때때로 봄바람에 눈물 흘리네

 

<러시아>

-자전거-

(83) 손으로 핸들 잡고 발로는 바퀴를 돌려

쏜살같이 내달려도 먼지가 일지 않네.

구태여 수레를 끄느라고 말 여섯 마리를 괴롭히랴

빠른 것도 느린 것도 내 마음대로일세.

 

-음력 유월 오일에 우편으로 사월 십일일 집에서 보낸 편지를 받아 보다-

(111) 집 떠난 지 다섯 달 만에 처음 편지를 받았네.

부모님과 집안이 편안하다니 얼마나 기쁜지.

바삐 보다 미처 못 본 게 있을까 싶어

몇 번이나 손에서 접었다 펴네

 

-염오 수행원이 불어를 배우기 위해 지금 파리로 가니, 이제 타국에서 객을 전송하며 남북으로 길이 나뉘게 되어 슬픔을 달래기 어렵다-

(131) (상략)

부러워라! 그대는 어학에 부지런해

거리낌 없이 온갖 심력을 다 쏟으니,

불어까지 또 배우려고

예리한 뜻으로 다잡아 분발하네.

이처럼 총명하고 슬기로운 재주로

재빨리 이루어 공부를 마치리라.

뒤에서 떨어져 돌아가지 않으니

떠나는 이 남는 이 모두 서글프구나.

네바강 강가에서 전별연을 베풀고

이별 시를 지어주며 이렇게 말 전하네. (하략)

 

-가벼운 기구에 타다-

(141) 가벼운 기구 안에 앉아

하늘에 올라 차츰 나아가니,

바람 타고 위아래로 오르내리고

전기를 저장해 종횡으로 움직이네.

삼천세계를 유희하면서

구만리 장천을 쉽게 오가니,

신선이 만나기로 약속한 적 있어

나를 맞이해 봉래 영주에 이르게 하네.

 

-느낀 바를 써서 우정 협판에게 올리다-

(145) 사월에 떠난 나그네 돌아가지 못하고

반년 동안 소식마저 끊어졌구려,

대장부 뜻 펴지 못해 마음 괴로운 데다

가족들 멀리 있다 보니 가장 걱정되네.

황제의 은덕으로 사신 일은 마쳤지만

어려운 백성 구제할 계책 없으니 부끄러워라.

중양절엔 작원에 다다를 수 있으리리

국화주 마시며 함께 웃으리라

 

-흑룡강에 와서 화륜선으로 갈아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노라니 오늘 몹시 고단하다-

(151) 마차를 타고 이십일 가노라니

고되고 지쳐 마음까지 흔들리네.

길 험한 것은 말하기도 겁나고

날씨가 추워 병도 쉬이 드네.

지친 몸 새벽 꿈에서 깨면

숙취에 절었는지 몽롱하구나

서둘러 재촉하며 흑룡강에 이르니 가로질러 떠있는 화륜선이 반갑구나

 

흑룡강 물줄기라 어찌 이리도 긴지

동쪽으로 큰 바다까지만 리를 흘러가네

강언덕 따라 러시아와 만주가 나뉘어지니

수시로 배를 띄워 통상을 하네

 

-우리나라 유민들의 도소에 지어주다-

(159) 슬프다, 수만 명이 조선 유민들

날마다 품을 팔면서도 편안히 여기네.

탐관오리의 가혹한 정사야 피한대 해도

이국 땅 거친 벌판에서 차마 어찌 살려나.

고향 그리워 망건과 상투를 그대로 한 채

성명을 연달아 써서 새 문서에 올리네

응당 쇄환하라는 어명이 있을 것이니

조국 향한 진실한 마음 변치 말진저.

 

<귀환>

-친척들과 벗들이 내가 집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일제히 모여 환영하였다. 촛불 심지를 자르며 즐겁게 이야기하니, 시금동과 육교의 풍월이 다시 예전의 인연을 이었다. 이번 사행은 일곱 달 동안 여덟 나라를 거치며 모두 육만 팔천삼백육십오 리를 다녔다-

(164) 사행에서 돌아온 걸 친지들이 알고

서방세계 어디를 다녔느냐고 앞 다투어 묻네

육만여 리 여덟 나라를 다니며

보고들은 것 모두 기행시편에 있다오.

 

<해설> : 1896년 어느 조선인의 세계 일주

 

(165) 이 시집의 저자인 김득련은 역관 가문으로 유명한 우봉 김 씨 출신으로, 김지남의 후손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이 사절단에 한어역관으로 참여하였는데, 한문에 능하고 또 외교적 실무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그가 서기의 역할도 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는 이 시집 <환구음초> 이외에도 산문집 <환구일록>을 남겼으며, 현재 민영환의 이름으로 남아있는 <해천추범>도 그의 저작이라 추정된다.

 

(166) 김득련은 왜 굳이 한시집을 또 남겼던 것일까. 이 해답 역시 사행록의 전통 안에서 찾을 수 있다. 이전 시대의 사행에 산문집과 시집이 함께 존재하거나 한 책에 두세 가지의 문학 장르가 동시에 등장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으며, 일견 정보 전달이라는 효율성 측면에서는 불리할 수도 있지만 사행시 쓰기는 사대부의 오랜 관습이었다. 그것은 <논어>시 삼백 편을 외워도 정치를 맡아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사방에 사신으로 나가 제대로 응대하지 못하면, 아무리 많이 외웠던들 무엇하겠느냐?”와 같은 구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68) 재미있게도 이러한 첨단 시설에 대한 반응들은 요지’, ‘장춘원’, ‘극락등과 같이 관념적으로만 배워왔던 한문화권의 공통 기호들로 재현된다.

이렇듯 김득련의 반응에서는, 강화도 조약 직후 일본에 파견되어 근대를 최초로 경험한 수신사 김기수가 보여주었던 1876년의 부적응과 거부감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아마도 개항 후 약 10년이나 지난 시점이었기에 조선에서도 어느 정도 근대 문물과 세계 정황에 대한 정보가 흘러들었고 김득련 역시 파견 전부터 이를 접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 이러한 그의 순진한반응들은 결국 어떠한 비판 의식 없이 제국주의적 상황들을 받아들이도록 한다.

 

(169-170) 당대의 진보한 근대인 윤치호에게도 비웃음을 샀던 그가, 제국 중심의 근대에 완전히 경도되었다는 사실은, 근대의 질서가 얼마나 빠르고 일방적으로 그리고 의문의 여지없이 조선에 전파되고 수용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세계를 처음 견문한 이들에게 제국주의자(혹은 식민주의자)라는 이데올로기적인 성급한 단정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본서의 경우도 서구식 근대를 동경하고 그것을 절대 우위에 놓는 상황들을 자주 발견할 수 있지만, 폴란드의 망국을 노래한 시처럼 그 반대적 상황이 구체적으로 경험될 때에는 안타까움과 슬픔을 드러내기도 한다. 때는 아관파천 시기, 사실상 일본을 견제하고 러시아의 도움을 얻기 위해 파견된 이들 사절단이 러시아에 점령된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를 지날 때의 그 복잡한 심정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지 않은가.

 

(170) 사적인 일상의 노래에서 그의 감성은 빛을 더욱 발한다. 또한 그가 어떤 부분을 기이하게 여기고 또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관찰했는지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서구 문물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통해, 우리는 19세기말의 조선인의 정서와 생각을 거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171) 조선에 있어서 19세기말은 이전에는 전혀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던 광범위한 영역 속의 여러 타자들과 처음으로 접촉하고 적극적으로 소통해야만 했던 시기이다. 이 시기 다양한 타자들과 자기와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는가는 상당히 중요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본서는 이렇게 복잡했던 조선인의 시대적 인식과 함께 그들의 자기 형성과 타자 인식 사이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텍스트이다.

 

[여행 요약]***1896년 러시아 니콜라이 2세 황제 대관식에 파견된 조선 사절단 춘파 김득련 사행시집

김득련, 민영환, 윤치호, 김도일, 손희영, 슈테인 등 구성

중국, 일본, 태평양 횡단, 캐나다 밴쿠버, 북미대륙 기차 횡단, 뉴욕, 대서양 횡단, 영국, 네덜란드, 독일, 폴란드, 러시아, 시베리아 등 거쳐 블라디보스토크, 부산에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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