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아니 에르노)
- 행복한 책읽기 / 문학
- 2025. 2. 11.

한강 작가님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노벨문학상이 삶에 좀 더 깊이 다가왔다. 작년 말 학교 동료들과 "채식주의자" 토론, 내년 폴란드, 체코 문학기행을 앞두고 쉼보르스카의 "끝과 시작"을 읽고 강의를 들었다. 이번 독서 모임에서는 "세월"을 읽고 이야기 나누기로 했다. 모임 덕분에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진입 장벽이 높은 소설. 그러나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이 있다
시작부터 19쪽까지 과거를 회상하는 여러 장면들이 짧게 짧게 제시되는데 내용 파악도 안 되고 뭘 이야기하려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20쪽부터는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되겠지만 20쪽부터 읽어도 될 것 같다.
이야기는 서술자의 돌 무렵인 1940년부터 2006년까지 프랑스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상황의 변화가 개인과 세대, 프랑스인 전반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말해 준다. 작가의 눈과 입을 통해 그려진 2차 세계대전 이후의 프랑스는 '급변기'라는 말이 적절한 정도로 복잡 다단했다(우리 현대사보다도 더 복잡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작가가 문학 전공의 지식인이라 세월의 변화를 섬세하게 구체적으로 말한다. 그래서 처음부터 19쪽만큼은 아니지만 책장이 시원스럽게 넘어가지는 않는다. 여러 번 읽어보며 생각해야 감이 오는 문장, 검색해 보고 나서야 이해가 되는 상황, 물론 검색해도 결과가 나오지 않는 세부적인 상황들도 적잖게 있었다. 그럼에도 책을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이 있었는데 표현 방식과 내용에서 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성장 시기별 사진과 사진을 바라보는 중층적인 시선
이 소설은 작가와 서술자, 주인공이 일치한다. 자전적 소설(또는 오토 픽션) 답게 사실감이 느껴지며 이야기에 금방 다가간다. 특히 작가는 여러 인터뷰에서 '경험한 것만 쓴다'고 했으므로 더욱. 그런데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여 자신의 삶에만 몰입하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에서 서술자는 성장 시기별 특징이 잘 드러난 사진을 꺼내든다. 이 사진은 흑백사진에서 컬러사진, 가정용 비디오(8mm), 컴퓨터 폴더 속 사진파일로 형식과 내용이 바뀌며 세월의 흐름을 나타낸다. 그리고 사진 속 주인공과 주변인물, 그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작가이자 서술자이자 주인공인 '그녀'의 심리 변화를 말한다. 그녀 주변의 사람들인 '우리들'의 심리까지. 그리고 당시 프랑스의 주류의 시선도.
이런 다양하고 총체적인 시선 속에서 여자로서 그녀가 느꼈던 압박감, 프랑스 68 혁명의 의의,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바탕으로 한 욕망들, 기성세대가 된 이후에는 그녀, 우리들과는 다른 젊은이들 '그들'과 어떤 세대 차이가 있고 그들을 존중하려고 하는지, 흥미 있게 그려진다.
똘레랑스와 이민자에 대한 경계
고등학생 때 제2외국어로 프랑스어를 공부했다. 당시 내가 다녔던 지방의 사립학교는 제2외국어에 대한 학생의 선택 없이 학교 상황에 따라 프랑스어를 제2외국어로 정했다. 불만스럽지는 않았다. 당시 '소피 마르소'의 "라붐"만으로도 프랑스는 관심이 생기는 나라였다. 대입을 위해 3년을 공부하고 나니, 프랑스 사회에 대한 흥미가 생겼다. 마침 대학에 들어가서 홍세화 님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통해 만난 프랑스는 '똘레랑스'를 중심으로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의 모습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런 생각이 줄긴 했지만 큰애와 단둘이 여행할 장소로 프랑스를 떠올릴 만큼 프랑스는 장점이 많은 가보고 싶은 나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 "세월"을 읽으며 살아가는 모습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가난한 시골 출신 서술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나와 서술자 사이에 34년이란 시간의 차이를 떠올리면 무안해졌다. 소설의 통해 느껴지는 프랑스 사회의 상당한 격변도 우리나라에 비하면 그리 크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 차로만 보면 그렇고 지리적, 문화적, 정치적 상황으로 보면 프랑스 사회의 격변이 우리나라보다 더 크다는 생각도 들고.
여하튼 소설 "세월"이 현재로 가까워질수록 프랑스와 우리 사회의 시간 간격이 좁혀졌다. 68혁명을 거친 작가 세대가 2차 세계대전 패망국의 베이비붐 세대였던 우리나라의 5060 세대와 비슷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살아왔고 시대도 잘 만나 상당수가 '쁘띠 부르주아"가 된.... 우리 사회를.(부정적인 의미는 절대 아니다)
베트남, 알제리를 식민지로 두었던 프랑스 역시 나름의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프랑스 사회는 식민지 이민자 및 불법 체류자에 대한 이견이 다양할 수밖에 없겠다. 당연히 똘레랑스는 사회를 지탱하는 기본이 될 수밖에 없고. 그런데 한편으로 미셸 우엘벡의 "복종"처럼 이슬람 제국을 꿈꾸는 사람들에 대한 경계도 당연하다. 민주주의는 참 어렵다.
작년에 어떤 교수님이 강의에서 '68혁명'이 우리나라에 오지 않은 게 우리 사회 발전의 한계였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우리 사회의 한계로 왕을 단두대에서 끌어내린 적이 없다는 지적도 생각난다. 그 어느 때보다 세대, 계층, 정치적인 차이가 심각한 지금의 상황이 떠오른다. 역량 있는 작가가 이런 방식의 "세월"로 시대를 정리해 주었으면 한다.
책 내용에 대한 메모
*14살 시기: 1940년생 그녀의 성장과정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1974년 생인 나도 비슷하게 느꼈음. 시골, 교회, 집안 형편이라는 비슷한 성장 배경 때문인 듯. 프랑스와 우리나라 사이에 거의 한 세대(30년 정도)의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생 시절까지는 여학생, 소녀에 대한 가정과 사회의 통제가 있는데, 광고, 영화, 티브이, 라이오 등은 성에 개방적인 상황. 그런 속에서 성에 대한 관심,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이지 않을까. 그것이 억압으로 작용된 듯. 바칼로네아 합격 후 아르바이트를 떠나며 성에 대한 어느 정도의 자유로움을 느낌. 그러나 사회는 화장, 옷차림, 성에 대해 간섭함. 성 결정권이 타인의 판단과 시선에 있었음. 그래서 금기에 대한 성적 욕망이 커지지만 그만큼 수치심도 따라오는 문제가 있음.
*가정 육아 등으로 생각하는 시간을 갖지 못함. 쁘띠 브루주아가 됨. 조용하고 편안한 삶에 정착하는 것이 두려우면서도, 이러한 것들을 포기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음. 그래서 미래보다는 자신의 과거에서 자아를 발견하려고 함. 욕망의 대상은 미래가 아닌 과거다(129). 이 시기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과 그녀에게 일어나는 일 사이에는 어떤 교차점도 없다(130)고.
*프랑스 68운동(5월 혁명)의 의의: 보수적 가치에서 진보적 가치로
저항자들에게 1968년 5월 혁명은 실패였으나, 사회적으로 엄청나게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에서는 종교, 애국주의, 권위에 대한 복종 등의 보수적인 가치들을 대체하는 평등, 성해방, 인권, 공동체주의, 생태주의 등의 진보적인 가치들이 사회의 주된 가치로 자리매김하였으며, 이러한 경향이 현재의 프랑스를 주도하고 있다.(위키백과) 특히 작가는 여성해방운동에서 의의를 찾음.
*1970년대 중반: 컬러TV 보급. 각종 정보와 세계에 대한 뉴스 제공으로 공동의 지식의 폭이 넓어짐.
*1980년 미테랑 대통령 당선: 자유로운 라디오, 낙태 수술비 보상, 60세 퇴직, 39시간 노동, 사형제도 폐지, 불법 이민자들의 정식 체류 허가, 동성애 허용. 더 자유로운 프랑스를 꿈꾸었으나 국가 재정의 어려움. 경제 위기, 이민자들에 대한 불만. 우파 정부로 회귀
*1985년: 이혼, 애인과 살고 있음. 자신의 욕망에 더 집중해야한다고 생각. 자녀들보다. (267) 남자 친구는 그녀를 과거에서 다시 살게 해 주고, 과거를 영원하게 만들어 준다고. 남자 친구와의 관계를 통해 과거의 행위를 재현하며 공허함을 채워준다고 함.
*1989~91년: 베를린 장벽 붕괴, 걸프전, 소련 붕괴, 천안문 사태 등으로 세상은 더 복잡해짐.
그러나 여성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감시를 받음. 남성들의 판타지를 드러내는 것으로 평등함을 증명함. 여성의 육체를 아름다움의 대상으로 표현하면서. 여성들은 페미니즘이 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여성 해방을 위해 노력했으나 효능이 있었는지 피로감을 느낌.
*2002년 선거 시라크 재선: 시라크를 원하지 않았으나 르펜이 유력해지자 차악을 선택.
*디지털 정보화 시대. 엄청난 정보들과 전문성의 과잉 속에서 살게 됨. 디지털은 과거의 정보도 손쉽게 만날 수 있게 되었으나 오히려 현실을 고갈시킴. 일상은 사진이나 영상으로 남았지만 기억과 망각이 미디어에 맡겨졌다. 디지털에 의해 세대와 사람들이 나눠졌다. 그 결과 우리들의 세월은 거기에 없었다(300) 그래서 작가는 내가 경험한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듯.
*미국 중심주의 사회가 되면서 부익부 빈익빈 심화, 실업, 불법 이민자, 불법 체류자, 도둑, 성범죄 등에 대한 엄격함 요구. 사회가 우경화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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