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최은영, 단편집)
- 행복한 책읽기 / 문학
- 2024. 10. 2.

제목이 입에 잘 오르지 않았다. 제목에 익숙할 때쯤 다시 보니 그냥 희미한 빛도 아니고,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였다. 표지 사진은 힘이 빠져 책상에 턱을 걸고 엎드려 있는 모습인 것 같다. 왼손을 책상에 올리고. 그런데 일곱 개의 달걀이 있다. 좀 생뚱맞다. 다분히 연출된 느낌이 난다. 7편의 단편을 힘들게 썼다는 표현일까.
청소년 소설을 읽다, 성인 소설을 읽으면 처음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래도 심리 묘사가 더 복잡해지니까. 단편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몇 번 읽은 것 같다. 그런데 그 뒤의 ‘몫’부터는 금방 빠져들며 읽었다. 재미있게 읽고 나서 생각해 보니, 내가 이렇게 재미있게 읽었다면 청소년들이나 젊은이들도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을 것 같다.
1.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세상의 부조리에 해를 당할까 봐 목소리를 내지 못하더라도 또 약자로서(여자이든, 가난이든)의 한계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지 못하더라도, 그리고 결과적으로 부조리함을 해결하지 못했더라도 조금 더 나은 세상을 가보고 싶었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제목을 참 잘 지었다. 약 15년 전 있었던 용산 참사가 배경으로 나온다.
(44) 나도, 더 가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어쩌면 그때의 나는 막연하게나마 그녀를 따라가고 싶었던 것 같다. 나와 닮은 누군가가 등불을 들고 내 앞에서 걸어주고, 내가 발을 디딜 곳이 허공이 아니라는 사실만이라도 알려주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빛, 그런 빛을 좇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 빛을 다른 사람이 아닌 그녀에게서 보고 싶었다.
2. 몫
해진, 정윤, 희영 모두 대학의 같은 동아리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던 관계다.
해진이 희영이의 관심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게발하고 역량을 키웠다면, 희영은 정윤과의 토론 속에서 자기의 빛을 잃었다. 정윤 역시 거대 담론을 이야기했으나 자신의 삶은 오히려 개인적인 삶을 따라갔다. 글을 읽으며 나 역시 대학 생황을 하며 누군가로부터의 영향(그 일을 또는 그 만남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큰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것은 나에게는 일종의 '개안' 같은 것이었다. 그 사람의 영향을 통해 사랑하고 인정받고 한 사람으로서, 한 몫으로서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을 했기에 이야기 내용에 공감이 되었다.
(75) 글쓰는 일이 쉬웠다면, 타고난 재주가 있어 공들이지 않고도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당신은 쉽게 흥미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어렵고, 괴롭고, 지치고, 부끄러워 때때로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밖에 느낄 수 없는 일,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것 또한 글쓰기라는 사실에 당신은 마음을 빼앗겼다. 글쓰기로 자기 한계를 인지하면서도 다시 글을 써 그 한계를 조금이나마 넘을 수 있다는 행복, 당신은 그것을 알기 전의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3. 일년
다희의 인턴 기간 ‘일년’‘일 년’이 다희를 어떻게 만들어 가는가.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지만 비정규직이라는 입장은 사람의 마음을 더 협소하게 만든다. 밝고, 먼저 말을 걸어주던 다희가 상처 입고 가시 섞인 말을 하며 만남도 그 일 년으로 끝나는 것을 보면, 사람이 이렇게 변하는 것은 개인보다는 사회적 구조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사립학교 기간제 교사 시절이 떠올라 다희의 마음에 공감이 되었다.
(113) 다희는 좋게 말해서 신중해졌지만 어떻게 보면 계속되는 체념 속에서 자기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4. 답신
지금까지 읽은 부분 중 이 글에 가장 몰입하며 읽었다. '너'가 누구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왜 감방에 있는지 추측하고, 언니와의 관계가 어떻게 될까 궁금하기도 하면서.
사랑이란 완벽한 게 아니다. 특히 동생의 눈에서 언니나 누나의 선택이 아쉬울 때가 있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한동한 했으니. 그러나 그건 언니의 선택이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그런데 그렇다고 내가 그에 맞춰줄 수도 없는 것은 아닌가. 결국 한 몸에서 난 피붙이들은 작가의 상황 속에서 서로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결국 남보다 못한 관계가 되는 것 같다.
부정적인 두 남자가 문제의 시작이다. 아빠와 형부. 어른의 자격이 없는, 형부는 교사로서의 자격도 없는 부정적 인물들이다.
(144) 나에게도 자식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종종 생각해보곤 해. 분명 너를 향한 마음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을 느꼈을 거야. 쉽게 짜증을 내고 까다로운 엄마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어. 다른 사람의 삶을 오랜 시간, 어쩌면 죽을 때까지 책임져야 하는 일, 내가 좋아할 수 없는 내 모습을 자식에게서 문득문득 발견하게 되는 일을 내가 잘 감당해낼 수 있었을지 자신할 수 없어. 내가 내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와 무관하게 무겁고 복잡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을 거야.
✍ 아이를 키우며 느끼게 되는 감정들. 특히 자신을 닮지 않았으면 하는 모습을 발견할 때의 느낌?
5. 파종
말 잘 듣던 딸이 갑자기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한다. 엄마가 참견하려 해도 신경 쓰지 말라고 한다. 생각해 보니 이혼하는 상황에서 딸은 자신의 욕구를 포기하고 부모나 주변 사람들에게 맞춰져 왔다. 또한 엄마는 소리의 숨통을 틔여 주었던 삼촌을 떠올리게 하는 텃밭도 하지 못하게 돼 힘들다. 좀 쉬고 싶은데(그만두고 싶은데) 엄마가 갑자기 참견하려고 하니 거리를 두게 되었다. 소리는 성장 과정에서 어른스러웠다. 그런 모습을 대견해했는데, 삼촌은 소리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게 해야 한다며 엄마와 갈등하게 된다. 제목 '파종'은 엄마와 딸의 화해, 새 출발을 의미한다.
(196) 소리는 어른이 아이를 달래듯 그녀에게 답했다. 언제 이렇게 커버린 걸까. 그녀는 자신이 놓쳐버린 시간을 돌아봤다. 둘의 관계에서 참아주고 기다려주는 쪽은 언제나 소리였던 것 같았다.
✍ 청소년 소설을 읽으며 자주 느끼는 감정이다. 아이가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성장해야 한다는.
6. 이모에게
우리 시대 힘든 엄마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생계를 위해 진학도 못하고, 화장실로 못 가게 하는 악독한 사장 님에서 기반을 닦았으나, 결혼해서는 남자아이를 낳는 기계로 대우받아야 했던… 그런 한의 응어리들이 자기만의 완고한 세상을 만든. 칭찬을 받지 못해 부끄러워하고, 상대에게 직접 칭찬하지 못하고 남에게 자랑하는, 자신의 삶을 따라갈까 모질게 대하는 그런 모습이 그렇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이모의 비극적인 삶을 서술자 역시 이해하려고 했으나 스스로 얕잡아 보는 마음도 있었다. 마지막 이모의 장례식장에서, 이모와 관계 맺는 사람들이 기억하는 이모의 모습으로 이모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구절은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장례식의 긍정적인 역할과 대비되기도 한다.
오랜 시간 함께 살았던 이모를 닮았다는 서술자의 모습에서… 성장과정에서 양육자를 닮아가는 모습도 이해가 된다. 그래도 서로 부대낀 시간이 있기에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고민도 가능한 것 같은데.. 지금 우리 시대엔 그럼 부대낌이라도 있을까.
(255) 이모는 내게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그날 나는 이모의 얼굴에서 나의 모습을 봤다. 까다롭고 기준이 높은, 그래서 쉽게 만족하지 못하고 웃음에 인색한 얼굴을.
이모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성인이 된 이후로 느꼈던 내 마음을 선선히 인정했다. 내가 거듭해서 이모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결국 비슷한 주름을 얼굴에 새기면서 싫어하는 것들의 목록만 늘려가는 인간이 될까봐, 자기 상처에 매몰되어 다른 사람의 상처는 무시하고 별것도 아니라고 얕잡아 보는 편협하고 어두운 인간이 될까봐 겁이 났다는 사실을. 하지만 나는 이미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 비슷한 맥락에서 자신이 이모와 똑같다는 것을 확인한다. 냉소적이고 이기적이며 까다로운 모습을 닮지 않으려 했으나 이미 그렇게 되어 있는 자신을 확인하며 슬퍼한다.
7.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기남은 버림받은 인생의 연속이었다. 가족에게 버림받고,, 식모살이했던 집에서 계속 속임을 당했고, 남편에게 속았고, 자신에게 온전한 사랑을 주었던 진경은 알코올 중독자가 됐고, 그 과정에서 딸 우경은 자신을 버렸고… 상황은 더 나아지지도 않는다. 결국 그런 상황이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며 부끄러워한다. 하지만 그것이 모두 기남의 문제일까. 자식에게 더 좋은 상황을 만들어 주지 못했다며 미안해하는 우리 어머니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했다. 자식으로서 나 혼자 이 상황에 벗어나 스스로 대견해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318) 기남은 부끄러웠다. 우경의 눈에 비칠 자신의 모습이. 그애가 오래전 자신을 멀리 떠난 일이, 진경의 알코올중독이, 두 아이가 결국 화해하지 못하고 지금에 이른 사실이...... 기남은 부끄러웠다. 남편에게 단 한 번도 맞서지 못하고 살았던 시간이. 그런 모습을 아이들이 보고 자란 것이...... 기남은 부끄러웠다. 부모에게 단 한순간도 사랑받지 못했던 자신의 존재가, 하지만 그 사랑을 끝내 희망했던 마음이..... 기남은 이 모든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다. 부끄러워서. 기남은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7개의 단편 모두 여성의 섬세하고 여린 마음이 잘 표현되었다. 문제 상황을 극복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자리에서 조금 더 나아질 거라는 이야기가 느껴진다. 그런데 '파종'의 오빠 외에는 제대로 된 남자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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