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최은영)

 

수학여행, 추석 연휴를 마치고 중간고사 문제츨 출제하려고 보니 모임이 3일 남았다. 금요일 급하게 학교에서 책을 빌려 퇴근했다. 시험문제도 내야 하는데 과연 읽을 수 있을까^^;

토요일 오전 잠깐 책을 들었다가 이야기에 푹 빠져, 주말 이틀을 독서와 출제로 알차게 보냈다. 모임 샘들도 다들 재미있게 읽었다고 한다. 눈물을 흘리며 읽었다고 하니 샘들이 놀라며 어디에서 그랬냐고 물어본다. 인상 깊은 구절은 눈물을 흘렸던 부분이다. 나이 숫자만큼 눈물도 는다.

 

작가님의 필력이 대단하다. 여자 주인공의 이야기를 여성 작가가 쓰니 감정과 그 흐름이 섬세하게 잘 느껴진다. 증조모부터 나(서술자)에 이르기까지 4대 여자들의 힘겨운 삶이 그려진다.

증조모는 백정이라는 신분으로 차별을 받으며 크면서도 호기심이 강했다. 그런데 어머니를 버리고 결혼을 하며 자신을 탓한다. 할머니는 남편의 중혼으로 법적으로 딸의 엄마가 되지 못하면서도 딸에 몰두했다. 엄마는 그런 가정에서 자신을 포기하며 살았고, (서술자, ) 역시 과도한 기대로 힘들게 살아왔다. 여성들의 흐름을 보면 구한말이나 일제 강점기일수록 운명의 힘이 강하다 서서히 세상이 바뀌고 있다. 암흑 같은 시절이었으나 여자들끼리(증조모와 새비/ 할머니와 희자, 명자 고모/ 엄마와 명희/ 딸과 지우)의 우정이 있었기에 살아갈 수 있었고 더 나아가리라는 점에서 밝은 밤이라고 제목을 붙인 듯싶다..

 

그러나 반면 증조부부터 사위(나의 남편)까지 4대 남자들은 하나같이 한계가 많다.

증조부는 천주교 신자로 평등 세상을 이야기하면서도 백정인 아내를 자신이 구해 주었으니 더 희생하길 바라며 딸과 결혼하겠다는 남자의 중혼을 알면서도 결혼시킨다. 중혼 사실이 밝혀지고 돌아가는 사위에게 남자 마음도 잡지 못했다고 딸을 비난한다. 조부는 노동운동을 이야기하면서도 부인의 돈을 쓰기만 하며 중혼에 대해 사과 한마디 없어 본처에게 돌아가 버린다. 아빠 역시 가부장적이며 다정함과 거리가 멀고, 남편 역시 빨리 이혼해 주지 않아 바람을 피웠다며 나를 탓한다. 4대가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후안무치한데 그들이 당당한 이유는 그런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새비 아저씨는? 똑같은 천주교 신자에 똑같은 시대를 살았는데 따뜻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그럴 수 있어서 그랬던 것뿐이었다.(228)”고 한다. 결국 성품은 종교나 사상으로도 어쩔 수 없는 천성인가? 문제다.

 

모임 샘들과 이야기 나누면서 현재 문단이 여성 작가들의 여성 이야기가 주류라며, 건강한 남자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남성 작가들의 책을 찾아보자고 했다. 목소리가 섞여야 간극이 더 좁혀질 것 같아서.

 

<인상적인 구절>

 

(14)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토끼전에서 간을 빼앗길 뻔한 토끼가 꾀를 내는 부분이 생각나기도 하지만 그 마음에 공감이 된다. 마음의 상처를 이렇게 간편하게 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81) “그래도 네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니까, 새비 아저씨는 그만큼 더 사는 거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도 모르는 새비 아저씨를 나도 그려볼 수 있었으니까. 키가 크고, 목이 길고, 생전 본 적도 없던 백정의 집에 가서 간병을 하고, 그 누구의 위에도 서려고 하지 않고 아내를 귀하게 여기고, 그러다 혼자 일본으로 떠난. 지금의 나보다 한참은 어린 이십 대 초반의 남자를 그려볼 수 있었으니까. 그 모습이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는 자신이 죽고 나서 태어난 어느 사람에게 이렇게 기억되고 있었다.

이야기의 기능이 그렇다. 더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115) “차라리 만나지 않았던 편이 나았을까요.”
그게 무슨 뜻이니.”
헤어졌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상상하니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차라리 증조할머니랑 새비 아주머니가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 서로를 모르는 채로 살았다면.” (중략)
새비 아주머니는 엄마의 상처였어. 그렇지만 자랑이기도 했지. 엄마를 크게 넘어뜨렸지만, 매번 털고 일어날 힘이 되어주기도 했으니까.”

새비 아저씨가 히로시마에서 피폭돼 돌아왔으나 결국 요양을 위해 고향으로 떠나게 되면서 헤어지는 상황에 대한 이야기이다. 슬픔이 너무 커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싶지만, 함께 했던 시간이 또 남은 사람에게 살아가는 시간이 된다. 이 부분은 더 큰 이별 앞에서 함께 했던 시간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 준다.

(258) 아깝다고 생각하면 마음 아프게 되지 않갔어. 기냥 충분하다구, 충분하다구 생각하구 살면 안 되갔어? 기냥 너랑 내가 서로 동무가 된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주면 안 되갔어?

 

(135) “지금 내가 사는 모습이 그렇게 엄마 마음에 안 차?”
내가 울컥해서 말하자 엄마는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 엄만 네가 더 잘 살았으면 하는 거지.”
엄마, 이게 나한텐 최선이야. 나보다 더 똑똑한 사람들 이 세상에 널리고 널렸어. 나 그렇게 특별하지 않아.” (중략)엄마는 일평생 내게 기대하고, 실망했다. 너 정도로 똑똑하고 너 정도로 배운 사람이라면 응당 자신은 꿈도 꿔보지 못한 삶을 사는 게 마땅하는 것이 엄마의 주장이었다.

✍ 다른 사람보다 자식을 바라보는 눈이 높을 때가 많다.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지지'하고 그런 관계를 만들어 가고 풀고 싶다. 남보다 더 못한 관계가 되지 않기 위해서.

 

(235) 지연아.
그때 내게 앞니 두 개가 빠진 여덟 살의 언니가 다가와서 등을 두드린다.
지연아, 지연아.
언니가 나를 부를수록 세상이 환해진다.
태양이 커지고 있나봐.
나는 좀전까지 울던 일을 잊고 언니에게 말한다.
너무 밝아서 눈이 부셔. 어떻게 이렇게 밝을 수 있어? (중략)
바보야.
언니가 말한다.
바보야, 난 널 떠난 적 없어.

다섯 살 때 언니를 잃은 지연은 한동안 죽은 언니와 함께 했다. 아직 죽음을 모를 나이이기도 했지만 그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가 언니와의 사별을 강하게 인식시켰고 충분히 슬퍼하고 그리워하지 못했던 지연이의 모습이 교통사고의 순간에서 몽환적으로 재생된다.

 

(281) 어린 나는 차마 엄마와 살을 맞대지 못한 채 강아치처럼 곁에서 서성거리며 엄마를 바라봤다. 어마가 소파에 앉아서 깜빡 잠이 들면 조심스레 곁으로 다가가 엄마의 온기가 섞인 냄새를 맡았다. 엄마가 손가락 하나의 거리에 있는데도 그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엄마가 나를 유일하게 만져주는 시간은 내 머리를 땋아줄 때였다. 나는 일찍 일어나서 빗을 들고 엄마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내가 그 시간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지 엄마는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언니가 사고로 죽고 집에 홀로 남겨져 114 안내 일을 하는 엄마를 그리워하다 목소리라도 들으려고 전화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고, 결국 집에서 만났는데 엄마가 손가락 하나 사이의 거리에 있는데도 그리워서 눈물이 날 것 같다는 구절에서 '나'의 그리움, 서러움이 잘 느껴진다. 부족함은 쌓이고 여러 가지로 뒤얽혀 실마리를 찾기가 어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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