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시끄러운 고독(보후밀 흐라발)
- 행복한 책읽기 / 문학
- 2024. 9. 24.

체코 문학을 접할 때마다 이렇게 다양하고 깊이 있는 작가들이 많이 있었나 하고 놀란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가시적인 분량은 매우 짧지만, 우울하고 불길하고 침울한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우적댈 줄 알았는데, 읽는 내내 한탸의 수다에 쏙 빠져 버렸다.
매 장마다 반복되는 구절인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는 <안나 카레니나>, <두 도시 이야기> 이후로 가장 인상적인 서문이었다. 어쩌면 반복의 주술이랄까? 혹은 이십오 년째 시끄러운 아이들 속에서 일하고 있는 내 모습이 떠올라서였을까?
오로지 술과 책으로만 채워진 한탸의 삼십오 년의 삶은 비루하고 비참하지만, 스스로를 비하하면서도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18쪽)’라는 표현이 정말 어울릴 만큼 시궁창 속에서도 자신만의 아름다움과 철학을 추구하고 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짧지만 인상적인 장면들이 정말 많은 이야기다.
이 책에서 가장 웃픈 장면은 프로이센 왕실 도서가 전쟁 포로들처럼 빗물 속에 기차에 가차 없이 실려나갈 때 구속해 달라며 처절하게 눈물 흘리는 장면이다.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폐지의 재활용을 설명하는 선생님의 시범을 따라 아이들이 <소공자> 표지를 뜯어내는 대목이다. 한탸와 작가는 ‘누구의 눈이나 마음, 머리도 오염시키지 못하고 책들이 한낱 폐지로 사라져 가는’’ 것이 인류의 가장 큰 비극이라고 강변하는 것 같았다.
이 소설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프라하의 밑바닥, 지하공간을 산책하는 장면이다. 가장 낮은 곳에 가장 더럽고 하찮은 일을 하는 사람들과 쥐들의 공간이 가장 생생하고 활기차고, 아름답게 묘사되었다.
한탸의 시끄러운 고독 속에는 의외로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제발 술 좀 그만 마시고 일 좀 하라고 폭력적으로 머리를 디밀고 들어오는 소장, 그말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조카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기관사로 정년퇴직한 외삼촌, 그리고 작업장에 놀러 오는 터키옥색과 붉은색 치마의 집시 여자들, 10코루나를 쥐여주는 두꺼운 안경알의 늙은 철학 교수, 마지막으로 한탸 인생의 희망이자 비극이었던 만차와 내 집시 여자로 불린 일론카! 내 독서의 깊이가 얕아, 고행님들을 만나 각각의 인물들이 가지는 상징과 의미를 이야기해 보고 싶다.
고전 모임에서 읽은 책들은 퇴임해서 다시 일독하겠지만, 이 책은 정말 꼭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묘하게 끌리고 매력적인 책이다.
-인상 깊은 구절-
9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18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영원과 무한도 나 같은 사람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을 테지.
22 그런데 누군가 책들의 은신처를 누설하는 바람에 프로이센 왕실 도서가 전리품으로 규정되어 트럭에 도로 실리는 처지가 되었다. ~~ 마지막 차량이 안개비 속으로 사라졌을 때 내 얼굴에서는 눈물과 빗물이 뒤섞여 흘러내렸다. 역에서 나오는데 순경이 보이기에 그에게 다가가 두 손을 교차시켜 내밀며 애원했다. 손에 수갑이든 포승이든 채워달라고. 나는 죄를, 인륜을 거스른 죄를 범한 참이라고.
33 침대 위로 솟은 책들의 천개를 올려다본 순간 나는 알아차렸다. 2톤짜리 닫집이 불러일으키는 상상의 무게에 짓눌려 내 몸이 구부정해진 것이다.
39 대학을 나온 한 운전기사의 말이 떠올랐다. 동유럽은 프라하의 문전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고전적인 옛 역사가 더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작된다고. 그러니까 그리스 정신이 진동하는 고막 맨 끝자락, 갈리시아의 어딘가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41 큰 종교 축제가 이어지는 시기에는 상반신과 양다리를 씻기도 한다. 그런 일들은 사전에 예측할 수 있기에 항히스타민제를 미리 복용해 둔다.
41 도시를 가로질러 아침 일찍 산책을 하니 마음이 평화롭다. 나와 비슷한 수많은 사람들이 프라하의 밑바닥, 지하실과 지하 공간에서 활기 넘치는 생생한 생각들로 머릿속을 가득 채운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60 나는 절뚝거리거나 때로는 한 손으로 짚으며 계단을 올라갔다. 너무 시끄러운 내 고독 탓에 머리가 좀 어질어질 했다....
90 벨트가 흔들리며 카렐 광장의 분수대만큼이나 커다란 타원형 용기속으로 종이를 밀어넣었다.... 책더미들이 여기서 몽땅 파괴되었다. 나는 이제 마음을 추스르고 유리벽 너머로 트럭들이 손때 묻지 않은 새 책들을 쏟아놓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었다. 그 책들은 어느 누구의 눈이나 마음, 머리도 오염시키지 못한 채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95 여교사는 아이들에게 폐지의 재활용 과정을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정말 어이없게도 책 한 권을 집어들더니 학생들의 주의를 집중시키고는 책의 내용물을 뜯어내는 시범을 당당히 해 보였다. 그러고 나자 아이들이 순서대로 한 명씩 책을 들어 표지를 뜯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96-97 아이들의 작은 손가락에 앙갚음을 했던 책들은 세 권짜리 <소공자>8만 5천 부였다... 그러니까 25만 부의 <소공자>가 아이들의 손가락에 맞서 싸운 셈이었다...
99 나는 보수를 받고 일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예술과 창조, 미의 창출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런 속도로 일하면 혼자서도 사회주의 노동단원이 되어 연 50퍼센트의 생산성 향상을 약속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04 평생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멀리까지 간 사람이 만차였다. 책들에 둘러싸인 나는 책에서 쉴새없이 표정을 구했으나 하늘로부터 단 한 줄의 메시지도 받지 못한 채 오히려 책들이 단합해 내게 맞섰는데 말이다. 반면 책을 혐오한 만차는 영원토록 그녀에게 예정된 운명대로 글쓰기에 영감을 불어넣는 여인이 되어 있었고, 심지어 돌로 된 날개를 퍼덕이며 비상했다.
121 나는 청소년 팀 열한 명과 대기자로 내 이름이 오른 명단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또 읽었다. 그래도 눈을 내리뜨면 끔찍한 개통이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여자친구가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나는. 황급히 샌들과 보라색 양말을 벗어 그 자리에 두었다.
-옮긴이의 말-
139 한탸의 입에서 나오는 비통한 독백은 전체주의 사회의 공격에 맞선 저항의 외침으로 들린다. 한탸는 책을 구해내면서 인간의 정신과 문화를 구하려 하지만, 효율적이고 균일화된 세계를 상징하는 젊은 세대에 직면해 이 문화의 불가피한 종말을 목격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그렇기에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무분별한 발전으로 인해 오히려 퇴보하는, 노예화되고 우둔해진 사회에 대한 정치적이며 철학적인 우화로도 읽힐 수 있다.
141 이 작품을 규정하는 키워드가 있다면 자유나 저항 같은 거창한 단어보다 '연민'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도처에 허무가 널려 있어도 삶은 자체의 생명력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불가항력적이면서 매력적인 것임을 흐라발은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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