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가의 열두 달(카렐 차페크)

 

<로봇> 이후로 카렐 차페크의 매력에 푹 빠져 버렸다. 인류를 통찰하고, 인류의 미래에 대해 '로봇' 혹은 '도롱뇽'과 같은 존재를 등장시켜 인류의 미래를 냉철하게 걱정하던 작가는 정원과 식물, 흙을 사랑한 소박한 정원가라는 또 다른 매력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살아 계다면 정말 정말 만나고 싶은 분이다.

화분을 가꾸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만한 이야기들을 마음껏 꺼내고, 본인이 모델이 된 정원가의 모습을 마치 제3자의 입장에서 희화화하면서도 흙과 식물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듬뿍 느끼게 하는 따뜻한 책이었다. 이 책에 나오는 꽃과 식물들을 거의 다 모르고 또 알고 싶지도 않지만, 어떤 존재에 대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꼭 봐야 할 책인 것 같다. 정말 사랑스러운 책이다. 인상 깊은 구절을 정리하다 보니, 꽃을 가꾸는 사람이 아닌 흙을 가꾸는 사람이 진정한 정원가이듯, 교사도 아이들의 성장 결과만 보는 사람이 아닌 성장의 과정과 토대를 가꾸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정원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스럽기도 하고 무겁기도 한 책이다. 역시 카렐 차페크!!

<인상 깊은 구절>

-1월이면 정원가는 날씨를 경작한다.
-2월은 1월에 하던 작업을 이어가는 달이다. 특히 날씨와의 씨름이 계속된다.
-정원가는 3월을 어떻게 보낼까? ~ 첫째, 정원가가 하고자 하는 일, 하고 싶어 하는 일은 무엇인가? 둘째, 더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정원가는 무엇을 하는가?
-정원가에게 4월은 가장 축복받은 달. 5월의 찬사일랑 연인들에게 맡겨두자. 5월에는 꽃이 피지만 4월에는 싹이 튼다.
-6월은 풀을 베는 달.
-7월은 장미를 접목하는 달. 정원가들에게 이는 불변의 법칙이다.
-8월은 정원가들이 그들의 멋진 정원을 뒤로한 채 훌쩍 휴가를 떠나는 달이다.
-원예적 관점에서 9월은 어느 때보다 충만하고 은혜로운 달이다. ~ 믿지 않는 자들이여, 그대들은 알아야 한다. 9월은 연중 두 번 꽃피우는 존재들을 위한 달, 제2의 개화의 달, 와인이익어가는 달이라는 것을.
-바로 10월은 4월만큼이나 좋은 달이라는 것을. 10월은 봄이 시작되는 첫 달, 땅속 깊은 곳에서 싹이 트고 생장하는 달, 남몰래 싹눈이 여무는 달이다.
-11월은 흙을 위한 달. 흙을 갈아엎고 일구는 달. 삽 한가득 흙을 퍼 올릴 때면 마치 맛난 음식을 한 숟갈 떠 올릴 때처럼 입에 군침이 돌며 행복한 기분이 든다.
-이제 정원이 눈밭으로 변하기 시작하면 정원가는 까맣게 잊고 있던 일 하나를 기억해 낸다. 바로 정원을 바라보는 일이다.

(28) 호스는 야수처럼 온몸을 뒤틀고 꿈틀거리고 날뛰며 여기저기 물웅덩이를 만들어놓고 급기야는 그 속으로 첨벙 뛰어든다. 사람이 자기를 조종하려 들면 다리를 칭칭 감아 버린다. 그럴 땐 발로 몸뚱이를 밟아 꼼짝 못 하게 해야 하는데 절대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는다. 오히려 용트림을 하며 당신의 허리와 목을 감으려고 들 것이다. 이건 완전히 코브라와 사투를 벌이는 느낌이다.

(33) 어떤 때는 이웃에게서 열병이 옮기도 한다. 이웃 정원에 핀 동자꽃을 보고 이렇게 중얼거린다. "이런! 우리 정원에서 기르지 못하란 법 있겠어? 나라고 못할 게 뭐야." 이처럼 사소한 계기로 정원가는 조금씩 새로운 열정에 눈뜨게 된다. 열정은 반복되는 성공을 통해 기운을 얻고 새로운 실패에 의해 자극을 받는다.

46 그럼 이제 씨 뿌리는 사람들을 위한 최고로 멋지고 짜릿한 순간인 '기다림'이 시작된다. 외투를 입지 않은 셔츠 바람인데도 땀에 흠뻑 절어선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조심스럽게 화분 안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본다. 마치 그 눈빛으로 새싹을 끌어올리기라도 할 듯이.

(56) 하지만 이 세계에 보다 깊이 발을 담그면서, 진정한 정원가란 '꽃을 가꾸는 사람'이 아니라 '흙을 가꾸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정원가는 집요하게 땅을 파내어 흙 속에 무엇이 깃들어 있는지를 게으른 사람들의 눈앞에 척 내보이는 존재다. 그네들을 땅에 파묻혀 살아가며 퇴비 더미 위에 자신의 공적비를 세워 올린다.

(65) 어떤 날은 나쁜 날씨가, 어떤 날은 자잘한 사건 사고가 발목을 잡는다. 왜 많고 많은 달 중 하필 3월에! 꼭 3월에만 그런 불운이 끊이지를 않는 건지! (이건 정말 학교의 3월과 너무도 닮았다!!)

(79) 4월의 정원가가 어떤 존재인지를 내게 묻는다면, 시들시들한 묘목을 손에 쥐고 손톱만큼의 빈 땅이라도 찾기 위해 작은 정원을 스무 바퀴쯤 빙빙 도는 사람이라고 답할 것이다.

(82) 모든 것을 피하면서도 어디든 닿으려면 중력의 법칙을 거부하며 완벽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그뿐이랴. 구경꾼들의 놀림을 사거나 체면 구기는 일이 없도록 보이는 모습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물론 멀찍이서 언뜻 보이는 건 볼기짝 한 쌍뿐이다. 머리를 포함한 사지는 모두 엉덩이 아래로 잔뜩 웅크리고 있을 테니까.

(87) 만약 무엇을 찬양하고자 하는 마음이 든다면 당신 자신의 노동이 아닌, 당신이 그 노동을 하게끔 만드는 캄파눌라와 범의귀를 찬양하라.

(116) 넘쳐나는 상추를 버리지 않으려고 한 주 내내 상추로 삼시 세끼를 해결한 적도 많다. 채소밭 정원가들의 즐거움을 깰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채소를 재배하면 자신이 기른 것들을 이안에 마구 욱여넣어야 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144) 부드럽게 어루만질 수 없어도, 입 맞출 수 엇어도, 품에 껴안을 수 없어도 한없이 사랑스러다. 선인장은 관심의 손길도, 헛된 사랑놀음도 갈구하지 않는다. 돌덩이처럼 단단히 몸을 굳힌 채, 결코 굴복하지 않겠노라 결의를 다지며 이빨로 중무장한다. 이 백면서생아, 덤벼라! 찔러줄 테다! 

(149) 진짜배기 정원가는 이파리 하나를 땅에 꽂아도 거기서 나무를 키워낸다.

(154) 발밑을 내려다보며 자신이 딛고 있는 땅이 지닌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사람은 없다 인간은 손바닥만 한 정원이라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딛고 있는지 알기 위해선 작은 화단 하나는 가꾸며 살아야 한다.

(181) 결국 가족들이 말릴 때까지 그 과정을 계속 되풀이한다. 그렇게 완성한 화분이 한가득, 창턱, 테이블, 옷장, 식품저장실, 지하 창고와 다락까지 화분을 빽빽이 놓은 뒤 당신은 조용히, 그러나 뿌듯한 마음으로 겨울을 기다린다.

(183) 자연의 겨울잠에 대해 더 알고 싶은가? 모든 것을 거꾸로 보면 된다. 자연의 뿌리를 위로 들어 올리고 한번 찬찬히 들여다보라. 맙소사, 이게 잠을 자는 거라고? ~~여기 좀 보라. 땅속에 파묻힌 이 희멀건 녀석, 갓 자라 나온 뿌리들이 아닌가. 얼마나 깊게 파고 들어가는지 한번 지켜보라.

(189) 정원가여, 올해 처음으로 당신의 정원을 바라보는 순간, 당신의 첫마디는 과연 무엇일까?

(201) 더 좋은 것, 더 멋진 것들은 늘 한 발짝 앞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시간은 무언가를 자라게 하고 해마다 아름다움을 조금씩 더한다. 신의 가호로 고맙게도 우리는 또다시 한 해 더 앞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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