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여름, 완주(김금희)
- 행복한 책읽기/문학
- 2025. 6. 16.

윌라 오디오북의 추천으로 이 소설을 ‘들었다’. 오디오북이라도 참 대사가 많다 싶었는데 어느 순간 고민시, 염정아, 최양락 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싶어 책 소개를 훑어보니 맞았다. 다른 등장인물도 배우들의 이름을 듣고 나서 연결 지어 보니 꽤 잘 맞았다. 심지어 출판사 대표가 연기자 ‘박정민’ 님이었다. 연기자의 선행을 자주 들어 왔지만 시각장애인의 위한 ‘오디오북’ 제작은 처음 들어보았다. 인상적인 시도였다. 그러나 최근에 종이책도 출간해 책 소감도 정리할 겸 다시 읽었다. 소설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자막 방송에서 보는 것처럼 배경 음악의 분위기나 장면 효과음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었다. 희곡처럼 대사도 많고. 소설과 희곡이 결합된 하이브리드 문학이었다.
이야기는 프리랜서 성우로 불안정한 상황에서 룸메이트의 갑작스러운 잠적으로 경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벼랑에 내몰린 손열매의 이야기이다. 고립감과 심한 우울증으로 목소리까지 잃게 되고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자신의 상황을 알게 된 열매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룸메이트 고수미의 고향 ‘완주’로 찾아간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수미의 흔적은 알 수 없었다.
대신 딱히 갈곳이 없는 열매에게 하숙을 제공하며 수미의 빚을 탕감하는 고수미의 엄마와 밥을 먹고, 매점을 봐주면서 완주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하며 열매는 고립감에서 벗어난다. 특히 처음 고수미 집으로 가던 차 안에서 만난 어저귀와는 특별한 감정까지 가지게 되지만 예상치 못한 사고로 헤어진다. 그러나 완주에서 보낸 여름 덕분에 슬픔을 추스르고 성우로서 새로운 작품에 도전할 힘을 얻는다. 제목처럼 열매는 완주에서 여름을 보내면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이어간다. “첫 여름, 완주”라는 제목도 새로운 에너지를 얻어 자기 삶을 계속 이어가게 되었다는 의미처럼 들린다.
이 작품을 오디오북으로 들을 때에도 분위기도 줄거리는 잘 파악된다. 그런데 들을 때 무슨 말인가 싶었던 것들을 책을 읽으면서 확실히 파악하게 되었다.
열매가 할아버지의 대화하면서 자존감이 떨어진 자신을 ‘시절이’라고 표현하는데 그게 충청도 사투리로 ‘얼간이’라는 뜻이란다. 특히 ‘어저귀’가 왜 ‘어저귀’인지 궁금했는데 풀의 이름이었다. 아욱과의 한해살이풀로 줄기가 1.5미터를 넘는 식물인데 그만큼 키가 크다는 의미에서. 역시 ‘그리미’가 지네처럼 발이 많은 곤충을, 어저귀가 살고 있는 ‘공소(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작은 성당)’도 들을 때는 그냥 넘겼는데 책을 보면서 확인하게 되었다. 이 외에도 들었을 때 의미 파악이 안 되는 단어가 있었는데 종이책을 보면서 맥락을 알 수 있었다. 귀보다 눈이 익숙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않을까.
한편 오디오북을 들었기에 종이책을 읽으면서도 자연스럽게 목소리 배우들이 떠올랐다. 열매 고민시도, 수미 엄마 염정아도, 열매 할아버지 최양락도, 이장 역할의 배성우도, 그리고 악역에 빠지지 않는 김의성 배우도 잘 맞는다는 생각을 했다. 아참 어저귀는 박정민 배우인 줄 알았는데 드라마 “무빙”의 ‘김도훈’ 배우였다. 내 입장에서는 새로운 발견이고 재미였다.
글의 내용상 ‘완주’는 ‘양평’을 의미한다. 배경 묘사도 그렇고, 수도권 전철이 연결돼 있으며, 이 작품에서 중요한 완주나무는 양평 용문사의 은행나무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어저귀’의 존재는 고민이 된다. 이장을 비롯해 동네 사람들도 다 아는 인물인 걸 보면 외계인은 아닌 것 같은데, 주민등록도 하지 않았다는 게 비현실적이다. 그러면 열매는 누구를 사랑하고 마음에 두었을까. 완주라는 시골에서 치유되었다고 퉁치면 될 일인가. 그나마 종이책이 아니라 오디오북으로만 들으면 존재가 모호해 적당한 신비로움도 있을 것 같기는 하다.
살던 곳을 떠나 힐링하는 이야기를 적잖게 본다. 실제로 그게 에너지를 충전한다는 의미에서 여행의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삶의 현실이 바뀌지 않는 상황에서 충전된 삶이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을까, 그게 여행기의 한계이기도 하다.
홀로 고군분투하는 고수미나 손열매의 삶이 안타깝도. 고수미를 통해 일확천금까지는 아니더라도 큰 수익을 기대했다 돈을 잃은(투자하다 실패했기 때문에 본인들의 책임이기도 하다) 친구들도 이해가 되지만, 우리 사회가 무리한 투자를 통해서 희망을 찾으려 한다는 것은 우려스러운 일이다. 일정 부분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의 문제와 회복으로 다룬 감도 있어서. 그냥 아주 작은 사족이다.
인상 깊은 구절을 메모했다.
(11) 평면의 존재를 입체적으로 오려 내는 영혼의 가위질처럼, 진흙 덩어리를 인간으로 만들었다는 신의 숨결처럼, 보글보글 끓어올라 장독대 안을 푹 익히는 유산균처럼 손열매는 자기 안의 무언가를 ‘발생’시키기 시작했다. 그간 한 번도 경험 못 한 고도의 집중력이라 코끝까지 시큰해졌고 하늘 끝까지 날아오를 듯했다.
✍ 여든 살, 한글을 몰라 비디오 가게 앞에서 꾸벅꾸벅 졸며 시간을 보내던 할아버지의 눈을 잡아 끈 영화 “마스크”의 자막을 할아버지께 읽어 주다 자신의 재능을 발견한 순간을 참 잘 표현했다. 보글보글 끓어올라야 익으니까.
(32) 그러고 보니 열매는 수미에게서 부모 얘기는 거의 듣지 못했다. 사람들에게 부모란 때론 온화한 태양 같기도 어느 날은 상당한 심술을 품은 태풍 같기도 한, 자식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자기 주도성을 갖기 어려운, 날씨나 계절 같은 존재인데 수미는 늘 건조하고 덤덤했다.
✍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하다니 자식으로서는 공감이 되는데 내 아이들도 나를 이렇게 바라볼까.
(37)
간디 쟤 이번 주도 안 나오면 유급이잖아.
푸틴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우리가 유급하냐? 오지게 인종 차별 하는 애를 우리가 왜 감싸?
간디 학교 오지 않는 친구가 있는데 아무렇지 않게 우리끼리 수업하는 건 수치라고 쌤이 그랬잖어. 그 말 할 때 율리야 넌 뭐 했냐? 졸았냐?
✍ 인도 출신 다문화 학생과 러시아 출신 다문화 학생을 댄서가 꿈이지만 가정 형편도 좋지 않고 아버지가 자신을 이해해 주지도 않는 양미가 우리 입장에서 그 나라의 대표적인 인물 이름으로 부른다. 학교에 가려하지 않는 친구를 데리고 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사실 친구 덕분에 학교에 가고, 친구랑 같이 학교를 가는 걸음에 힘이 붙기도 하고. 그런데 친구 때문에 힘들어하기도 하고. 고립된 열매나 수미도, 양미처럼 친구 덕분에 또는 세상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 가며 긍정적인 에너지를 충천하는 이야기이다.
(68) 슬픔이 몰려왔고 몸이 아주 무거워졌다. 이래서 옆집 아이가 슬픔을 싫어하는구나. 무거운 몸으로는 춤은커녕 몸풀기도 할 수가 없으니까. 그런 낙담 속으로 한없이 빨려들어 가다가 열매는 겨우 이마를 떼고 일어났다. 부엌에서 된장찌개 냄새가 풍겨 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옛날식으로 해요, 하고 수미 엄마가 또 다른 부고 소식을 듣는 소리도.
✍ 열매의 서울 생활은 한 없이 침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아무리 발버둥거려도 뭔가를 잡을 수 없는. 고수미가 연락도 없이 사라지고 나서 그 절망감은 속도를 더했다. 그런데 완주 고수미 집에 와서 수미 엄마와 함께 밥 먹고 수미네 가게를 지키면서 완주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바닥을 쳤다.
(78) 할아버지 젊은 게 을매나 좋은 건데 그러냐. 길가의 나뭇잎도 새로 난 잎사구가 최고 이쁜 잎사구고 시멘트 공구리도 갓 양생한 시멘트가 가장 단단허고 잘난 시멘튼 겨. 근데 우째 그런 소리를 하고 있어. 열매 니는 할애비가 니 이름을 왜 열매로 지은지 정녕 모르는 겨? 나무가 내놓은 가장 예쁘고 잘난 거라 그렇게 한 겨.
✍ 열매는 힘들 때 꿈에서 할아버지를 만나며 고민을 털어놓는다. 어린 시절 다른 가족들보다 할아버지와 보낸 시간이 많았고 긍정적인 피드백도 많이 얻었던 것 같다. 그래서 힘들 때마다 할아버지와 대화하는 것 같다. 물론 열매 내면의 대화이겠지만. 열매가 나쁜 선택을 했을 때 그것에 대해 할아버지가 조언하다 열매는 듣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다시 나타나지 않고. 코미디언 최양략 님가 연기하는데 잘 맞는다. 아참 우울증의 부작용으로 꿈을 자주 꾼다고도 하니 이 부분은 약 기운 때문일 수도 있겠다.
(85)
손열매 (목소리를 떨며) 야, 자꾸 어른 어른 하지 마. 어른이면 뭐, 어른들도 실수하고 멍청한 짓도 하고 막막하고 그러는 거야.
양미 어른이 어른이 싫으면 어떡해? 어른인데?
손열매 그럼 너는 학생이 학생이 싫으면 어떡해? 학생인데?
(중략)
손열매 그리고 내가 니가 그렇게 강조하는 어른으로서 충고하는데 상처 받았다고 남한테 막 상처 줄 수 있는 그런 특권 있는 거 아니야. 나 아프다고 면죄부 받는 거 아니라고.
✍ 어른과 아이가 서로 무게 잡거나 적대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 그 시기에 짊어질 수밖에 없는 삶의 무게가 있으니까.
(157) 어저귀는 숲의 모든 것들은 친교 속에 존재한다고 했다. 나무만 해도 뿌리와 뿌리가 맞닿고 흙 속의 곰팡이가 연결선을 만들면서 안부를 전하고 서로 위급한 신호를 보내고 영양분을 빌려주기도 한다고. 자기 몸에서 태어난 어린 묘목을 돌보며 오래된 지혜를 나누어 주는데 숲의 동물들도 그런 나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다고.
✍ 그렇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갈라치기가 아니라.
(169)
신해철 사고는 사고죠. 죽음은 슬픈 거죠. 레너드 스키너드의 ‘심플 맨’으로 문을 닫겠습니다. 오늘 완평군에서 사연 보내 주신 청취자분, 이런 말 무력하게 느껴져서 그렇지만 힘내시기 바라겠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몫을 또 완주해야 하니까요.
✍ 해철 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 그런데 오디오북에서는 박정민 배우님이 목소리 연기를 한다. 나는 해철 님의 목소리인 줄 알았다. 난 진정한 팬은 못 된다^^. 그래도 CD플레이어가 장착된 내 차에는 지금도 넥스트의 “The Return Of N.EX.T Part 2 - The World”가 들어 있다. 그리고 답답할 때면 지금도 볼륨을 최대한 올려 차 안에서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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