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 표류기(헨드릭 하멜, 김태진 옮김)

 

안으로만 꽁꽁 닫혀 있었던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 이토록 낯설면서, 새로운 만남이 있었다. 500년 역사 속 13년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하멜을 비롯한 네덜란드인들에게는 엄청난 인고의 세월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만남이 새로운 조선의 역사를 쓸 수 있는 신선한 충격파가 될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조용히 묻혀 버렸다. 강진 병영성 근처 동성리 은행나무만 기억하고 있을 뿐. 

 

<하멜 표류기>는 생각보다 얇았다. 조선에 13년이나 지내면서 많은 것을 체험하고, 생각하고, 기록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얇은 만큼, 그 기간의 조선이 아주 희미하게 드러날 뿐이었다. 물론 13년의 기록을 단 1년 만에 완성해야했고, 조선에 대해 알리는 것이 아니라 밀린 급여를 받기 위해서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낯선 이의 눈으로 본 17세기의 조선은 참 낙후하고, 답답했다. 일본으로 보내달라는 요구를 묵살하고 돌봐주겠다고 약속했으나, 결국은 풀뽑기나 화살줍기, 고관대작의 집에서 춤추기 정도로만 이용했던 당시 조선의 시대적인 안목에는 정말 한숨부터 나왔다. 그래서 13년이나 지낸 조선 땅을 미련 없이 탈출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되었다.
그래도 그 동안 보아왔던 고전 읽기와는 다른 경지의 읽기였던 것 같다. 

<인상 깊은 구절>

1653년 = (34) 매일 ‘국왕으로부터 답신만 오면 우릴 일본으로 보낼 것이다.’라며 위로해 주었다. 그는 또 부상자도 치료받도록 조처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기독교인이 무색할 정도로 이교도들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 당시 제주목사는 이원진!

 

(36) 여러 차례 왕과 관리들에게 일본으로 보내 달라고 청원했지만, 왕은 항상 ‘당신이 새라면 그곳으로 날아갈 수 있겠지만 우리는 외국인을 나라 밖으로 보내지 않는다. 당신을 보호해 주겠으며 적당한 식량과 의복을 제공해 줄 테니 이 나라에서 여생을 마치라.’고 대답하면서 거절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를 위로하면서 만약 우리가 왕을 만나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래서 통역을 만나서 기뻤던 마음이 곧 슬픔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는 약 57,8세로 보였는데 놀랍게도 모국어를 거의 잊고 있어서 아까도 말했듯이 처음에는 그의 말을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약 한 달 정도 같이 지내다 보니 그가 다시 모국어를 알게 되었다.

✎ 얀 얀스 벨테브레 : 본명은 얀 얀스 벨테브레(Jan. Janse. Weltevree)이다. 홀란디아호 선원으로 아시아에 왔다가 1627년 우베르케르크호(Ouwerkerck)로 바꿔 타고 일본 나가사키를 향하여 항해하던 중 태풍에 밀려 제주도에 해안에 표착되었다. 동료 D.히아베르츠, J.피에테르츠와 함께 식수를 구하려고 해안에 상륙하였다가 관헌에게 붙잡혀 서울로 호송되었다. 이들 세명은 조선에 귀화하여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무기를 제조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조선에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출전하였고 박연을 제외한 두 사람은 전사하고 말았다. 이후 박연은 포로가 된 왜인들을 감시·통솔하는 한편 명나라에서 들여온 홍이포(紅夷砲)의 제조법·조작법을 조선군에게 지도하였다. 1653년 H.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착하였을 때 제주도로 내려가 통역을 맡았고 그들을 서울로 호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하멜이 도감군오(都監軍伍)에 소속되자 그를 감독하는 한편 조선의 풍속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박연은 조선여자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조선에서 여생을 마쳤다. 박연의 고향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북쪽 De Rijp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박연 [朴淵/朴燕] (두산백과)

 

1654년 = (46~47) 왕은 벨테브레를 통해 ‘외국인을 국외로 내보내는 것은 이 나라 관습이 아니므로 여기서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하며, 대신 너희들을 부양해 주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왕은 우리더러 네덜란드 식으로 춤을 추게 하고 노래도 부르게 하고 우리들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보이도록 했다. 왕은 나름대로 우리를 잘 대해 주었으며 일인당 포목 2필씩을 주어 이 나라 복식으로 옷을 지어 입게 했다. 그리고 우리는 숙소로 돌아왔다. 그 다음 날 훈련대장 호출을 받아 갔는데 그는 벨테브레의 통역을 통해 왕이 우리를 친위병으로 삼았다는 말을 전했다.~ 1년에 6개월 동안 훈련대장과 조정에 근무하는 모든 사람들은 조정에 출근하고 왕을 수행한다.

✎ 당시 훈련대장은 이완이며, 효종은 이들을 쓰임새 있게 쓸 생각을 하였으나, 사대부들이 진심으로 북벌을 원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실효성이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1654년 = (50) 12월 초에 장군은 우리가 추위와 가난으로 고생하는 걸 보고 왕에게 보고했다. 왕은 제주도에 난파된 배에서 가져온 가죽을 우리에게 주도록 명령했다. 이 가죽은 말려서 배로 이곳까지 운반된 것인데 대부분은 석고 좀이 먹은 것들이었다. 우리들은 그것을 팔아 생긴 수익으로 추위를 막을 물건을 사야 했다. 하지만 우린 그 돈으로 2,3명 씩 살 집을 몇 채 사자는 데에 동의했다. 매일 우리더러 땔감을 해 오라고 괴롭히는 주인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차가운 추위 속에 20km 이상의 산길을 다녀오는 일은 그 일에 익숙지않은 우리로서는 견디기 힘들었다. 하나님이 우리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 한 기대해 볼 해결책이 없다는 걸 깨닫고 이 이교도들로부터 계속 괴로움을 당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추위를 견디는 편이 나을 것 같아, 각각 은전 3, 4테일씩을 추렴하여 한 채에 8, 9테일씩 하는 조그마한 집들을 샀다. 나머지 돈은 옷을 사서 겨울을 지냈다.

✎ 부양해 주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는 조선왕의 약속에 얼마나 화가 나고 실망했을까? 그나마 집을 사서 지낼 생각을 하다니, 포로보다는 자유인에 가까웠다는 생각에 신기하고 놀라웠다.

 

1656년 = (53~54) 연초에 청나라에서 이 나라에 두 번 다녀갔으나 우리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었기 때문에, 왕의 고문관들이나 그밖의 고관들은 우리들에게 질려서 이제 그만 없애 버리자고 왕에게 간언했다. 3일 동안이나 이 문제에 대해 토의가 있었다. 왕과 왕의 동생, 포도대장과 그 밖의 고관들은 우리들을 동정하여 이에 반대했다. 장군은 우리를 죽이기보다는, 우리들 한 사람에 대해 조선인 2명 씩 붙여 똑같은 무기로 싸우게 하여 우리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 대결시키자는 제안을 했다. 그렇게 하면 왕도 국민으로부터 공공연히 외국인을 죽였다고 인식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말은 우리 쪽에 호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이런 토의가 있는 동안 우리는 집을 나가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우리는 신상에 어떤 위험이 닥칠까 궁금하여 벨테브레에게 물었더니 그는 간단하게 ‘우리 목숨이 3일간 더 붙어 있으면 앞으로 더 오래 살게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국왕의 동생이 그 회의를 주재했는데 그가 다니는 길은 우리 동네를 지나야 했다. 우리는 그를 보자 그 앞에 엎드려서 탄원했다. 그가 왕에게 이를 전했고 왕과 그의 동생 덕택에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그러나 우리가 청나라 칙사에게 다가가서 말썽을 피울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반대파의 요구가 있어 왕은 우리를 전라도에 유배하기로 했는데, 오히려 이것은 목숨이 안전하게 된 조처이므로 우리들은 기뻐했다. 

✎ 제주도에서 한양으로, 그리고 다시 병영으로 유배된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는 것, 그리고 포로로 있으면서 하멜 일행이 여러 가지로 조선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도 알 수 있었다. 머나먼 타국 땅에서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이 무척이나 긴박하게 다가왔다. 효종의 동생 인평대군에 대해 알게 되어 좋았다.

 

1657년 = (5)7 이 조선 사람들은 외국의 풍물에 대해 몹시 호기심이 많고 듣고 싶어 했다. 이 나라에서는 구걸한다는 것이 수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구걸이라도 해소 어려움을 타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린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 일을 참아 내기로 했다. 구걸과 남아 있는 식량과 필수품으로 추위에 나름대로 대비할 수 있었다.

 병영에서 어떻게 겨울 추위를 견딜 수 있었는지 짐작할만 했다. 돌봐주기로 하고 붙잡아두었던 조선의 처사가 얼마나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1659년 = (59) 4월에 왕이 죽고 청나라의 동의를 얻어 그의 아들(현종)이 즉위했다. 우리는 전처럼 그럭저럭 지냈다. 우린 스님들과 사이가 가장 좋았는데 그들은 매우 관대하고 우리를 좋아했으며, 특히 우리가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의 풍습을 말해 주면 좋아했다. 그들은 외국 사람들의 삶에 대해 듣기를 좋아했다. 만약 그들이 원하기만 했다면, 그들은 밤을 새도록 우리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을 것이다.

 당시 가장 깨어있던 지식인층에 승려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하멜’ 소설에 보면 수인사가 나오는데, 그 근방의 절에 있던 승려들과 가깝게 교류했을 것 같다.

 

1663년 = (61) 2월 말에 절도사는 우리를 세 고장으로 분산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즉 여수에 12명, 순천에 5명, 남원에 5명씩으로 분산되었는데 우린 그때 모두 22명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 흉년으로 인한 분산이긴 하지만, 하멜에게는 탈출의 기회가 된다.

 

(62) 전임 좌수사가 떠나고 3일 후에 그 후임이 부임했는데 이게 우리에게는 시련이었다. 매일 우리는 여름철에는 뙤약볕 아래서, 겨울에는 눈비를 맞으며 아침부터 저녁가지 대기 자세로 서 있어야 했다. 날씨가 좋으면 하루 종일 화살을 주웠는데, 그 이유는 그의 부하들이 일등사수가 되려고 활쏘는 연습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일도 많이 시켰는데, 기독교인을 괴롭혔다는 이유로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죄값을 받게 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다.

✎ 서양인이 가진 기술이나 지식을 더 얻어내지는 못하고, 활줍기, 풀뽑기 등만 시켰으니……. 조선이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 대목에서도 알 수 있겠다.

 

1664년 = (64) 연말쯤에 꼬리가 달린 별(혜성) 하나와 꼬리가 달린 별 두 개가 연이어 나타났다. 첫 번째 별은 남동쪽에 나타났는데 두 다 가량 볼 수 있었고, 다른 하나는 남서쪽에 나타났는데 꼬리가 서로 마주한 모습이었다. 이 사건은 조정에 큰 동요를 일으켰는데, 왕은 모든 항구와 병선을 정비하도록 하고 모든 요새에 군량과 탄약을 공급했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 같다는 생각에 기병과 보병을 매일 훈련시켰다. 저녁에 해안가에서는 집의 안팎에 어떠한 불도 켤 수가 없었다. 백성들은 다음 추수 때까지 먹고 살 식량을 충분히 확보해 두었다. 왜냐하면 청나라에서 이 나라를 점령했을 때나 일본이 침략해 왔을 때에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에 백성들은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 혜성이 나타나서 조선이 얼마나 긴장했는지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보아 왔던 장면이다. 오랜 흉년과 혜성의 출몰로 여론이 무척 안 좋았을 것이다.

 

1666년 = (69) 우린 드디어 매일 우리에게 와서 식사도 함께 하고 술도 같이 한 착한 조선인 친구에게 물어 보기로 했다. 우린 그를 속여서 섬에서 솜을 사 온다는 구실을 붙여 배를 사 오도록 하면서, 솜을 얻어 오게 되면 그에게도 많은 이익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한 이유는 그에게 더 많은 보상을 해주겠다고 함으로써 꼭 배를 사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곧바로 수소문해 보더니만 한 어부로부터 배를 사 왔다. 우린 그에게 배값을 치르고 배를 인도받았는데, 나중에 그 배를 판 사람은 우리가 자기 배를 샀다는 것을 알자 거래를 물리자고 했다. 왜냐하면 그 거래는 제3자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고, 우리들이 틀림없이 그의 배를 타고 도망갈 것이고, 만약 그렇게 되면 자기는 사형될 거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배값의 두 배를 치르고 그를 달랬다. 그는 앞으로 그에게 닥쳐올 괴로움보다는 돈에 눈이 멀었고, 우리는 기회를 놓칠까 봐 서로 합의에 이르게 되었다.

✎ 상당히 극적인 거래라 기억에 남는다. 필시 그 배를 판 어부는 사형을 당했을 것이다. 10년이 넘는 조선생활에 나름 정을 붙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자신들의 운명이 수령이 바뀔 때마다 달라지고, 국가는 자신들을 돌봐준다는 말만 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때 당연히 ‘탈출’을 최고 목적으로 두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흥정을 성사시킨 착한 조선인이나 배주인 모두 불쌍하지만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 생각한다.


[탈출 후의 상황]

(89) 그들이 나가사키에 도착해서 면담한 날로부터 바타비아를 향해 최종적인 출발을 하기까지는 무려 1년 이상이 걸렸다. 하멜과 그의 동료들의 삶은 더 이상 위험하지 않았다. 그들은 음식과 옷 대접을 잘 받았다. 그러나 하멜 일행은 전라도에서 산을 타는 데 익숙해져 있었고, 스스로 배를 만들어 조선의 남해에 있는 섬을 항해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억류되어 있는 것이 마치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음에 틀림없다. 길이 170km 너비 100km의 경호가 잘 되는 부채꼴 모양의 섬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체류가 더욱 지루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하멜은 이러한 시간을 활용해서 그의 여행일지를 작성했다. 조선에서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그는 분명히 사건이나 이름, 지명 등에 대한 기록을 해 두었을 것이다. 

✎ 13년의 유배생활을 작성하는 것이 분명 힘이 들었을 것이다. 솔직히 <하멜표류기>를 펼쳐들었을 때, 생각보다 양이 적은 데 무척 놀랐는데, 이렇게라도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읽다보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매일 기록한 것도 아니고, 한 번에 몰아 썼다니. 그래서 표류기에 쓰이지 못한 행간의 이야기들이 무척 궁금했다. 그런 마음을 조금 충족시켜 준 것이 <소설 하멜>이고.

 

(99~100) 일본 천황의 중재와 VOC의 명령으로 조선에 남고 싶어하는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 남아 있던 네덜란드인 모두가 인도되었다. 그 한 사람은 낯선 이국에 남고 싶어했다. 그는 조선에서 결혼해서 자신이 이제는 기독교나 네덜란드 사람이 아닌 양 행세했다. [비츤53]

✎ 그 한 사람이 과연 누구일까? 조선의 어떤 매력에 반했을까? 소설처럼 아내와 자식들 때문일까? 가장 궁금했던 내용이다.

(103) 하멜이 귀환한 후 통상을 트려는 새로운 시도가 있었지만 바타비아는 그러한 계획의 반대에 부딪쳤다. 아마도 일본이나 중국 정부가 반대했을 것이다.

우리가 일본에 무역 거점을 갖고 있는 한 조선과 무역거래를 할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것은 중국인들이 우리가 조선에 가는 것을 참지 않을 것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일본의 시기심이나 불신을 야기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는 결정이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각으로 그렇게 해야 했으나 시간이 흐른 후 그것이 성공하여 미래에 어떤 일이 생기게 될지는 모를 일이다.

선견지명이었다.

✎ 만약 성공했다면? 당연히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이나 중국 정부가 용인한다 하더라도 분명 조선이 굳게 문을 닫았을 것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하멜표류기
국내도서
저자 :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 / 김태진역
출판 : 서해문집 2003.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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