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프 라인(김경해)


책 표지만 보고 가볍게 펼쳤는데 짧은 분량 속에 마음 가는 구절이 참 많았다.

일했던 학교마다 체육 특기부가 있었다. 여자 축구부, 탁구부, 여자 정구부. 담임도 여러 번 맡았는데 그 관계가 참 애매했다. 내 아이, 우리반 아이라는 느낌보다 출석처리 등 행정업무로만 연결돼 있는 특별한 아이로.


그래서 체육특기생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두 차례 했던 기억이 난다. 담임으로서 수업 참여나 학급활동 참여의 문제, 학운위 위원으로서 예산 지원 등에 대한 문제에 대해. 교장 선생님들은 1교 1기를 교육청에서 권장한다거나 함께 공부하는 체육특기생들의 성취를 통해 일반 학생들의 자신감을 높이고 성취 의욕을 자극할 수 있다는 말로 이해를 당부했던 것 같다. 물론 교사들도 그럴 때마다 아이들이 체육특기생과 공유하는 시간이 적어 공감의 효과의 별로 크지 않다는 말도 했고.


그래서인지 “하프라인”을 통해 체육특기생들의 생활과 고민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합숙에, 잦은 시합 등으로 일반 학생들보다 더 힘들게 살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아이들뿐만 아니라 부모, 감독과 코치까지 경쟁과 승자독식의 시스템에서 ‘축구’에만 올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그러나 일반 과목의 교사로서 이해는 되지만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도 여전히 많다. 학교 공부라는 것이 이분법적으로 선택 가능한 대상인지 고민된다. 공부 아니면 체육 이렇게. 그래서 이 책을 책 읽기 힘들어하는 특기생들에게 권하고 싶다. 공감가는 게 많은 것이다.


인상 깊은 구절은 교사인 내 입장에서 주로 발췌하였다.

요새 학교폭력과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말이 많다. 이 둘이 길항 관계는 아닌데, 학교폭력의 원인을 인권조례, 곧 진보교육에서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배움으로부터 소외된 학교, 무한 경쟁으로 치닫게 하는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 없이 ‘폭력’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34) “난 때리는 거 반대예요. 때려서 잘하면 아주 병신이 되도록 때리면 되겠네요. 그건 아니거든요. 애들이 짐승이에요? 때려야 말듣게. 자기들은 선수 때 잘했대요? 유능한 감독은 어떻게 선수를 자극해서 더 잘하게 유도하느냐, 이거예요.”


(40) “기본기를 배워야 해요. 그 스피드에 기본기만 받쳐준다면 최고예요. 학교 축구요? 가보세요. 기본기 안 해요. 그저 게임만 뛰어요. 그렇게 게임만 뛰면 뭐 해요?”


학교는 기본에 충실하며 배움에서 소외되는 아이들이 생기지 않도록 자극하고 유도하는 일일 것이다. 학교의 기본 중 단연 중요한 것은 민주성에 따른 자발성이고. 이게 ‘적당히’ 때리는 기술적인 문제인가, 본질적인 차이다.


(60) “네가 해보지 않아서 쉬워 보이는 거야. 공부한다고 다 좋은 대학 가는 것도 아니고. 전국의 학생 수가 얼마나 되는 줄 알아? 그중에서 명문대 가는 애들의 비율을 따져봐. 그리고 요즘은 좋은 대학 나와도 소용없어. 대학 나와서 취직 못하고, 또 취직해서 회사 다녀도 언제 잘릴지 모르는 거야. 너는 그래도 운동에 재능이 있고, 여태껏 해왔잖아. 요즘에 한 가지만 잘하면 돼.”

아버지의 열변을 토하는 표정이 왠지 비겁해 보였다.

“정의로운 사람이 되어라.”

이런 멋진 말을 할 수는 없을까.


(105) 내가 축구를 하기 시작하면서 엄마는 오로지 내게만 집중했다. 일을 시작한 것도, 매일 출근하는 정규직이 아닌 파트타임으로 한 것도 나 때문이었다. 연습 경기라도 있는 날이면 될 수 있는 한 운동장으로 달려왔다. 한때 시폰 치마를 즐겨 입던 엄마는 이젠 추리닝만 입었다. 나는 엄마가 자신의 인생과 자식의 인생은 다른 거라고 생각했으면 했다. 하지만 엄마는 부모의 열성이 자식의 성공과 비례한다고 믿는 사람 중 하나였다.

부모의 세대, 기성세대는 하고 싶은 것이 많았으나 형편 때문에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식만큼은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밀어주고 싶다. 그리고 절박하게 감당했으면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우리 아이들은 절박할 수 없다. 성장과정과 삶의 조건이 그렇다.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는데 부모와 학교는 절박하게 공부하거나 운동하기를 바란다. 삶의 무게를 덜어주어야 세상을 폭넓게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길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삶에 공감하며. 


(116) 돼지 코치님은 화이트보드에 오십-삼십-이십이라고 크게 썼다. (중략)

“우리가 축구를 하는 데 정신력이 오십, 실력이 삼십, 운이 이십이라는 말이야.”(중략)

“그게 문제라니까. 왜 자신을 믿지 않아? 정신력, 실력, 운에 조건이 있어? 키는 몇이어야 하고, 얼굴은 잘생겨야 되고, 집은 부자여야 한다는 조건이 있느냐고?”(중략)

“모두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는 거야!”(중략)

‘희망적인 말 아닌가.’

내 귀에는 다른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다. 운은 나도, 다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정신력과 실력은 모두 나에게 달려 있었다. 오로지 나만이 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팔십을 가진 사람이 된 것 같았다.


(155) “나도 열심히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끝까지 배우는 자세가 돼야해. 그래야만 자신을 가다듬을 수 있어.”

공부를 강조하는 감독님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다.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기 힘들다는 뜻일까.

“사람들이 축구선수의 멋진 플레이에만 박수를 보내는 건 아니야. 겸손하고 따뜻한 인간성에 더 열렬하게 응원하고 성원하기도 해. 왜냐면 우리는 인간이니까.”


(179) “축구 이외에는 무지했어.”

우리도 그렇다. 텔레비전 드라마, 최신 유행가요, 영화, 여자의 심리에 대해서는 막힘없이 얘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부정사의 용법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연산법칙에서 곱하기를 먼저 하는지도 다 잊어버렸고, 히틀러가 독일 사람인지, 제이차 세계대전과 관련이 있는지도 몰랐다. 대입 수능학력고사에서 팔십점을 못 받아서, 대학에 떨어질까봐 학원에 다니며 공부한 형도 있었다.

축구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나중에 무엇을 하건 공부는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잘 해야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계속 다양하게 해야한다는 이야기다.  


이 책 제목 “하프라인”도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보게 된다. 하프라인은 축구의 시작 지점이다. 이 책에서 '나'는 스트라이커로 활동하다 미드필더로 포지선을 바꾸는데, 하프라인에서 주로 활동하는 선수가 미드필더이다. 미드필더는 가장 많이 뛰고 가장 넓게 축구장을 바라보며 흐름을 읽고 조율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공 배급도 하지만 기회가 있을 땐 골을 넣기도 한다. 


소설의 제목, "하프라인"처럼 학교에서는 공부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여러 번 있다. 새롭게, 다양하게, 자신을 조절해가며. 교사나 학생이나.


하프라인
국내도서
저자 : 김경해
출판 : (주)자음과모음 2011.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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