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살의 털(김해원)


유쾌하다. 그러면서도 묵직하게 무언가 뒤를 돌아보게 하는 의미가 꽉 차 있다. 


두발문제, 가족관계, 친구와의 관계 더 나아가 개발에 관한 사회문제 등 제법 묵직한 문제를 다루면서도 골치 아프지 않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도 넘치는 유머와 해학 속에서 가볍게 뛰어넘는다는 것이다. 냉소도 아닌 지나친 과장도 아닌 딱 열일곱 남자 아이의 시선 속에서 가정과 학교, 세상을 표현하는 작가의 재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결론 부분. 두발규제라는 어려운 화두를 어렵지 않게 풀어내는 작가의 역량에 찬탄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결론이 무척 만화적이라는 것! 아버지의 등장부터심상치 않았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유를 찾아다니는 아버지의 등장에 소설의 분위기는 급반전된다. 무조건 아들을 지지하는 아버지(물론 이해가 되기는 하지만)와 아이들 머리에 별을 그려주는 할아버지! 통쾌하고 기막힌 반전이지만 사실 만화적인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에서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는 오광두라고 생각한다. 어느 학교에나 있을 법한 학생부장 역할. 괴팍하고 폭력적인 매독같은 선생은 오히려 더 찾아보기 어렵다. 아이들을 이해하지만 현실에 타협하며 이 시대의 교사로 살아가는 노란 표지의 일본 소설을 손에 쥔 오광두의 모습은 이 작품에 현실성을 부여하는 것 같다. (교사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일까?)


이 책을 읽고 학생들에게 권해줘도 괜찮을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학생과 교내생활지도계라는 지금의 내 모습이 오광두 같아서 어줍잖기는 하지만 당연히 권해 줘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호가 정학까지 당하면서 피케팅을 하는 모습을 따라 배워서 너희들도 한 번 그렇게 원하는 인권을 쟁취해 보라는 생각은 아니다. 


사실 이 책이 마음에 드는 가장 큰 이유는 머리(이발)에 대한 철학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두발규제든 두발자유든 사실 우리 아이들이 가장 크게 잃어가고 있는 것은 ‘개성’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아이들이 말하는 두발자유는 동방신기나 빅뱅 따라하기, 서인영 등 아이돌 스타들의 아류, 모방에 그치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들에게 태성이발소 송명관 옹의 “좋은 이발사는 타고난 머릿결을 살려 이발해 주는 거야”라는 말은 어느 정도의 울림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개성을 외치지만 개성을 잃어가는 아이들에게 꼭 권하고 싶다.


<인상 깊은 구절>

(12-13) 그 아이들은 나처럼 거웃이 자란 뒤에는 태성이발소를 아예 오지 않았다. 오로지 그 아이들의 아버지들만이 병사를 잃은 장수처럼 혼자 쓸쓸히 찾아왔다. 아버지들은 자신의 충실했던 어린 양들이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다 세상을 이끌고 갈 건실한 어른이 되지 못할까 봐 걱정했다. 그 한탄에 할아버지는 장단을 맞추며 더 열심히 가위질을 했다. 할아버지는 그 아버지들만이라도 더 짧은 머리고 건전하게, 강건하게 이 세상을 지켜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버지들이 걱정하는 아이들은 모든 염려와 탄식을 비웃으며 미용실에서 제 입맛에 맞는 어른이 되려고 몸부림쳤다. 아이들은 아버지와 싸우며 천천히 어른이 되고 있었다. 나만 빼고.


(28) 고개를 숙인 이들의 머리털은 길바닥에서, 이발사가 아닌 선생의 손에 깎였다. 오광두는 아침마다 잘 다려진 바지와 좋은 냄새의 화장품과 잘 닦인 구두를 신으면서 ‘오늘은 어떻게 가르칠까’가 아니라 ‘오늘은 어떻게 밀까’를 고민하는 건가? 이발사도 아닌데 말이다.


(34-35) 자, 보십시오. 1학년 1반 송일호 학생 머리는 놀랍지 않습니까? 먼저 앞머리, 5cm 이내로 깎아 얼굴 라인이 깔끔하게 드러납니다. 시야를 가려 학업에 방해되는 일은 절대 없지요. 또 옆머리는 귀 윗부분부터 말끔하게 밀어 귀 솜털까지 선명하게 보입니다. 개미 소리라도 귓바퀴를 돌아 귀 고막을 울려 뇌에 고스란히 전달될 수 있으니 수업 시간에 아주 유리하겠지요? 그리고 이 뒷머리. 여기가 포인트입니다. 목덜미를 시원하게 치고 올라가 뒤통수에 바짝 붙어 있는 머리털은 아무리 오랫동안 베개에 눌려도 곧 원상복귀가 되니 날마다 머리 감느라 시간을 빼앗길 필요가 없습니다. 이 머리야말로 학업에 열중할 수 있는 최상의 열공 모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39-40) 9년 동안 학교에서 길들여진 아이들은 의뭉스럽고 가살지다. 어른들한테는 특히 선생님들한테는 섣부르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싫어도 좋은 척, 좋아도 마지못해 하는 척, 아이들은 야자 때문에 열대 과일 야자는 거들떠보기조차 싫다고 해도 내색할 리 없다. 반 아이들 중 몇몇은 정규 수업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미련이 남는 마당에 야자를 해주는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56-57) 담임은 눈앞에 송일호가 서 있는데도, 기록부에 남겨져 있는 송일호를 찾느라 애썼다. 담임은 기록부에 있는 내 성적을 잣대로 내 행동을 평가할 것이다. 선생의 가치 기준은 성적표에 있는 과목의 점수다. 선생은 국어가 100점인 학생은 욕을 입에 달고 살아도 언어 능력이 폭넓다고 말할 것이며, 수학이 100점인 학생이 싸움질을 하면 논리적인데다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까지 갖춘 탓이라 이해할 것이고, 영어가 100점인 학생이 가출을 하면 이문화에 호기심이 많아 항상 새로운 것을 습득하려 애쓴다고 할 것이다.


(69-70) “선생도 사람이야. 간혹 실수할 수도 있지. 그렇다고 너처럼 행동해서는 안 돼. 상대방의 잘못을 깨닫게 하려면 네 행동에 정당성이 있어야 한다.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며칠 전 네 행동은 분명히 지나쳤다.” 오광두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83) “집에 있는 아버지라고 나을 거 없어. 아버지들은 말야, 집에는 껍데기만 남겨 놓고 다 집 밖에서 떠돌거든.”


(147) 엄마는 다시 1단계로 돌아갔다. 깨어 있다는 엄마도 대학 문 앞에서는 여지없이 자유가 없는 억압된 철갑옷을 꺼내 입는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똑같은 철갑옷을 입혀 놓고 열심히 공부해서 세상에 나가 자유롭게 이상을 펼치라고 가르친다. 자신들처럼 철갑옷에 익숙해진 아이들이 자유롭게 날지 못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오래 전 엄마가 단단하게 크라고 했던 것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단단한 철갑옷을 입고 자기만 지키라는 뜻이었다. 철갑옷으로 단단하게 무장한 엄마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199) “별은 말야, 우리가 다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귀하다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 머리 마음대로 밀지 말라는 거지. 저 할아버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이발소인 태성이발소의 3대 이발사셔. 그런 분이 보기에도 우리 학교 두발 규제가 문제가 있다는 거야. 안 그러냐?”


(204) 할아버지는 한참 만에 이발소로 돌아왔고, 우리 셋은 나란히 걸어 학교에서 나왔다. 어느덧 해가 기울어 가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버스 정류장에서 슬며시 내 손을 잡았다. 내가 길을 잃었을 때처럼, 나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땅에 뿌리를 내려 살아왔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17년 만에 만난 아버지는 자유롭게 날 수 있는 하늘을 보게 해 주었다면, 할아버지는 내가 서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알려 주었다.


(208) 어른들이 우리들을 길들이려고 하듯, 어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에 길들어 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길들여지기 싫어 세상 밖으로 나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오광두도 길들여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나름의 방식으로 싸우고 있는 것이다.
오래 전 할아버지는 이런 말을 했다.
“사람들은 머리를 길들일 수 있다고 생각해 가르마를 오른쪽으로 바꿔 달라, 왼쪽으로 바꿔 달라 그러는데 그건 그렇게 쉽지 않다. 머리털은 제가 타고난 대로 제자리를 찾으려고 고집하거든. 아무리 뛰어난 이발사라도 타고난 머릿결 방향을 바꾸지 못하지. 좋은 이발사는 타고난 머릿결을 살려 이발해 주는 거야.”


열일곱 살의 털
국내도서
저자 : 김해원
출판 : 사계절 2008.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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