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가 되는 주문(단요)

 

올해 1월, 전국국어교사모임의 회지 “함께 여는 국어교육” 2023 봄호에 ‘내면의 문제로 고민하는 학생들에게 추천하는 청소년 소설’이란 글을 쓴(내용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고 편집팀의 도움을 받아 마무리한 글이라 공유하지 못했다)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글을 보고 ‘책폴’ 출판사 편집자께서 연락을 주셨다. 1인 출판사로 청소년과 어른이 함께 읽고 소통하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출간하고 있는데 이번에 “마녀가 되는 주문”을 새로 출간했다고 추천해 주셨다. 보내 주신 소개 자료를 읽어보니 재미있을 것 같았다. 뒷감당할 생각도 못하고 책 욕심에 읽어보겠다고 했다. 금방 책이 도착했고 얼른 소감을 나누고 싶어 읽었지만 끝까지 읽지 못했다. 당시 아이들과 자유학기제 수업으로 'SF 단편소설' 쓰기 수업을 하고 있던 때라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 비슷한 이유로 작가님과 ‘주파수’를 맞추지 못했다. 묵은 숙제를 털고자 방학하자마자 이 책을 들었다.

“마녀가 되는 주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재 중에서도 뛰어난 학생들만 들어올 수 있는 학교(고등학교~대학 통합)에 입학한 ‘서아’는 희망했던 연구실에 모두 탈락하면서 미래가 불확실해진다. 가장 큰 문제는 이 학교의 학비(심지어 규칙위반으로 인한 벌금이나 파손 비용 등도)는 졸업할 때 모두 지불해야 하는데 대납해 줄 기업체를 구하지 못하면 졸업 후 20년 동안 갚아야 한다는 것이다. 본인이 갚지 못하면 가족이 갚아야 하는데, 본인이 죽는 경우만 예외로 면제된다.
절망에 빠진 ‘서아’가 삶을 포기하려 하는 순간 선배 ‘현’의 권유로 학내용 게임의 관리자(마법소녀 또는 마녀)가 된다. 그리고 이들이 속한 연구실에 들어가고, 이전 마녀들처럼 연구실과 연계된 기업체에 취직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서아가 관리하는 학내용 게임은 접속 내역이 기록되지 않아 학생들이 가상현실 속에서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힐링의 공간이다. 하지만 괴물에게 잡아먹히면, 실제 현실에서도 제때에 치료받지 않으면 뇌출혈로 죽는 미완성의 시스템이기도 하다. 이런 버그로 게임 초장기 사회적으로 크게 주목받고 정리된 듯 하지만 마녀가 괴물을 처리하고 새로운 기능이 추가되면서 이용자는 꾸준히 늘어난다. 그런데 이 게임의 버그를 용도와 다르게 활용하려는 이용자들이 생기고 서아를 비롯한 마녀들은 딜레마 상황에 빠진다. 마녀들의 논쟁과 선택을 통해 이 게임과 학교, 기업체, 미래 사회(그러나 현대를 상징하는)의 문제가 드러난다. 서하는 이 딜레마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이야기는 과거 사건의 진상 파악하고 결말을 예측하는 과정에서 여러 번의 반전이 등장하며 흥미롭게 전개된다. 그래서 쉽게 책장을 넘기지만 작가의 말을 여러 번 곱씹게 되는 부분도 적잖게 있다. 무엇보다 이야기의 결말이 인상적이다. 소설이 담고 있는 상징이나 작가의 표현에서 이 소설이 청소년만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확장된다. 
이야기 속 딜레마 상황은 마녀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사회 구조적인 문제이기에 개인적 저항이나 밝은 미래를 꿈꾸는 것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오히려’ 이 소설이 청소년 소설을 넘어선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사회에서 고립되면 모든 문제가 내 탓이고 내가 감당해야할 문제가 된다. 그래서 많은 한계(심지어 학교는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재생산한다는 비판도 있지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학교에 모여 ‘혼자’에서 벗어나 연대와 협력을 경험하며 ‘사회’ 속에서 안정감을 경험한다. 미래 사회 역시 과거처럼 직접 대면해 대동단결할 수는 없겠으나 스마트기기를 활용해 개인을 기반으로 한 네트워크가 활성화되며 끊임없이 교류하며 개인과 사회의 접점을 잘 만들어 가리라 믿는다. 

그래서 이 책 “마녀가 되는 주문”이란 제목이 참 인상적이다.
19쪽에서 “마법소녀는 좋은 거. 마녀는 나쁜 거.”라는 말이 나오는데 확실히 마법소녀보다는 마녀의 이미지가 부정적이다. 마법소녀 하면 헤리미온느가 떠오르지만 마녀는 중세 기득권층의 음모를 꾸미는 참모이거나 기득권층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만든 희생양의 이미지도 떠오른다. 그래서 “마녀가 되는 주문”은 기득권을 강화하는 이야기이거나 기득권에 저항하는 이야기 모두를 떠올리게 한다. 양면적이고 중의적이다. 

또한 ‘마녀가 되는 주문’이란 말은 책에서 게임 접속을 의미하는 참신한 표현이다.
일단 책에서는 “현의 사설 서버에 접근하는 주소. 또는 마법소녀가 되는 주문.(63)”이라며 인터넷 또는 메타버스에 접속하는 상황을 이야기한다. 생각해 보니 많은 이야기에서 현실이 아닌 상상의 공간(가상에 실재하는 세상도)에 들어갈 때 주문을 외는 의식을 거행한다. “열려라, 참깨!”가 대표적이다. 그래서 “마녀가 되는 주문”도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의식으로 여겨진다. 다만 게임의 관리자가 마녀이고, 관리자의 역할이 현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이므로, 새로운 세상이라고 했으나 기존 질서에 편입한다는 의미를 상징한다. 그러나 이 또한 마녀가 어떻게 결정하느냐에 따라 기존 질서를 유지할 수도, 기존 질서를 파괴할 수도 있으니, 어느 쪽으로 보아도 ‘마녀가 되는 주문’은 선택의 힘, 인간의 의지력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읽힌다. 

끝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궁금한 부분이 있다. 
책의 마지막 부분 ‘첫 번째 리뷰’에서도 이야기되지만 이른바 ‘어른’이 등장하지 않는다. ‘학교’나 ‘기업체’라는 시스템만 등장한다. 그런데 더 궁금한 것은 ‘여자만’ 등장한다. 문득 고도화된 사회에서는 나이도 큰 의미가 없고, 성별 역시 여성으로(그런데 '언니'라는 호칭이 있어 여자라는 느낌이 들지 남녀 차이가 잘 드러나지는 않음) 수렴되거나 역시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일까?

보통 독후감을 쓸 때 인상적인 구절을 적을 때 가급적 5곳을 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 이 책은 작가님의 개성적인 표현이 많아 좀더 많이 발췌했다. 문제가 되면 좀 더 가려보겠다.

 

(29) 삶에는 절정이 있다. 그 절정이란 촉망받는 학생이었다거나 테스트에서 최고점을 받았다거나 하는 통속적인 명세라기보다는 입학식 날의 차갑고 밝은 햇살, 머리 바로 위에서 부서지듯 빛나는 유리 지붕, 기숙사에서 연구동으로 이어지는 새하얀 길의 이미지 같은 것이다.

 

‘절정’은 보통 최고의 순간을 의미한다. 그런데 ‘절정’의 특성상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시작의 순간이라는 느낌도 든다. 새 출발의 느낌을 가장 잘 담았다는 생각이 든다. 새 학기, 새 학년은 그런 점에서 우리 삶의 절정인가.

(36) 서아는 시간에 물성이 있다면 펠트와 비슷할 거라고 생각해 보았다. 어떤 시간은 미리 재단된 채 봉제 인형의 한쪽 다리나 몸통이 되길 기다린다고. 맞은편의 천 조각이 나타났을 때 둘은 비로소 꿰매져서 완전한 형상을 갖춘다고. 그건 조금은 운명이지만 대체로 결심의 문제였다. 

(122) 진짜 문제는 내가 열심히 할 마음이 없는데도 열심히 해야 한다는 거야. 코스를 벗어나면 바로 죽어 버리는 마라톤을 뛰는 기분이야. 달리는 게 지긋지긋해져도 선택지가 없어. 나는 그만두고 싶은데. 이런 건 줄 알았으면 애초에 학교엔 안 들어왔을 텐데. 그런데 어른들이 가라고 했지.

(136) 이력서가 텅 빈 학생은 서아 말고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현이 본 것은 다른 누가 아니라 서아였기 때문에 둘은 여기에 있었다. 이전 관리자들도 비슷한 만남을 겪었을 것이다. 그 반복과 발견의 쌍에는 운명적인 면이 있었다. 구원의 순간을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을 스스로 정함으로써 완성되는 운명이었다. 

 

이 세 부분은 맥락이 서로 연결된다. 삶의 결정적인 순간(=절정?)은 100% 운명도, 우연도 아니지만, 그래도 의지의 문제다. 이런 구절 때문에 이 책의 결말에 다른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175) 아이들과 학교와 회사의 관계가, 학생과 졸업생의 관계가 느슨한 구조를 갖춘 채 머릿속에서 굴러다녔다. 무사히 졸업해서 회사에 들어가기만 하면 멋진 삶이 펼쳐지기 때문에, 언젠가는 자신도 명함을 달고 아이들을 굽어볼 것이기 때문에, 학생은 회사와 학교에 불만을 품지 않는다. 그래서, 성과를 내지 못하고 빚에 짓눌리는 상황은 그 학생의 책임이자 잘못이 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게임의 역할은…

(187) 사실 그게 모두 학생 책임일 수는 없을 거야. 가꿈은 학교가 일부러 싸움을 붙이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는걸. 그냥 달리기 시합을 하면 다들 적당히 뛸 텐데, 10등 아래로는 죽는 규칙이라면 누구든 전속력으로 뛸 거 아냐. 평균 속도야 엄청나게 올라겠지만… 그러다가 지친 사람은 그만 죽어 버리는 거지. 중간에 시합을 포기할 수도 없는데.

(198) 진솔은 게임조차도 학교의 일부라고 말했다. 어떤 아이들은 살리고 어떤 아이들은 죽이는 식으로 학교가 굴러가는데, 게임은 그런 원리가 조금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장소일 뿐이라는 거였다. 게임의 존재가 학생에게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오로지 학교 안의 위로라고도 했다. 

 

일단 ‘게임’이란 단어를 ‘수능’으로 치환해서 읽고 싶다. 일년에 한 번 치러지는 ‘수능’은 공정한 경쟁이라는 신화를 만드는 공정을 가장한 ‘쇼’다. 게임에 출전한 사람들의 출발점도 다르고 무엇보다 이 게임은 단판 승부다. 식당 메뉴를 결정할 때도 삼세판인데... 수능 말고도 우리나라에는 이런 단판승부적 성격을 띠는 직업들이 많다. 

(210) 얼음을 녹이는 데 필요한 열량은, 즉 0도를 1도로 올리는 데 필요한 열량은 같은 양의 물을 60도까지 올리는 데 필요한 열량과 같았다. 각각의 사물에는 온도계의 숫자만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열량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잠열이라고 한다. 사람의 삶에는 합리성이라는 말로는 설명하지 못할 그 무엇이 잠열처럼 도사려 있었다. 그런데 그걸 표현할 방법은 명확하지 않아서, 보통은 얼버무리듯 넘어가야만 했다.

(215)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려 애쓸지라도 어느 지점에서는 물건을 대하듯 단호해지는 순간을 맞닥뜨리게 된다. 서먹한 사이라면 훨씬 일찍, 깊이 엮여 든 사이일수록 훨씬 늦게. 그 늦음에는 연민이나 온정 같은 이름표가 붙기 마련이지만 늦음의 결과가 언제나 따스한 것만은 아니다. 그건 마치 원주율을 어디에서 끊느냐 하는 문제와 같다. 3에서 끊으면 정확한 값이 나오지 않고, 3.14를 넘어서면 그것도 곤란하다. 값이야 정확해지겠지만 3.14159265358…를 곱하다 보면 제한 시간을 넘기곤 하니까.

(246) 다정한 마음은 한 사람을 구할 수 있다. 하지만 구해야 하는 게 세상의 모든 한 사람이라면, 그 한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 내는 세상이라면 어떨까. 다정과 이해도, 곁에 있어 주는 시간도, 도피처가 되는 꿈도 모두 그 세상 안에만 있는 거라며. 학비도 대신 내 주지 못할 용기만을 껴안은 채 세상을 깨고 밖으로 나아가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 모두 다 함께 여기를 뛰쳐나가면 빚도 무엇도 없을 거야. 그런 울림이 그리는 세상은 달콤했지만 게임의 마지막 순간처럼 쉽게 부스러졌고, 그래서 그건 똑같은 꿈이 되었다. 

 

표현이 인상적이다. 사람마다 다 다르니, 그리고 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한 사람의 문제이므로 개인적으로 판단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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