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김훈)

 

시교육청의 중학생 추천 도서에 이 책이 있다. 중학생들과 눈높이를 맞출 겸 책을 들었다.

작년 말 극장에서 본 뮤지컬 영화 “영웅”이 너무 강렬해서인지 책의 초반부는 다소 밋밋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읽을수록 서술자의 담담한 목소리 속에 당시 상황을 그대로 전달하려 했음이 느껴졌다. 책을 다 읽고 주석을 읽으니 작가의 의도도 그렇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두 사람이다. 안중근과 이토. 치밀하게 조선과 대륙을 삼키려는 이토, 그런 이토의 행동을 멈춰 동양과 조선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이토를 제거함으로써 그 의도를 표현해야겠다는 안중근 의사의 목소리를 모두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개인의 분노한 감정이 아닌 철저히 정치적인 정당성을 바탕에 둔 의거였음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며 묘하게 지금의 우리 현실이 겹쳐진다. 철저히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 우리나라를 활용하려는 일본의 치밀한 계획과 100년이 지났어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과 그에 비해 우리의 이익보다는 일본의 이익을 먼저 챙긴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정부나 관리의 모습 역시 100년이 지났어도 계속되고 있어서. 


밑줄 긋고 생각해 볼 구절이 많았지만 몇 군데만 골랐다.

(89) 이토의 목숨을 제거하지 않고서, 그것이 세상을 헝클어뜨리는 작동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니, 그렇기 때문에, 이토를 죽여야 한다면 그 죽임의 목적은 살에 있지 않고, 이토의 작동을 멈추게 하려는 까닭을 말하려는 것에 있는데, 살하지 않고 말을 한다면 세상은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고, 세상에 들리게 말을 하려면 살하고나서 말하는 수밖에 없을 터인데, 말은 혼자서 주절거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대고 알아들으라고 하는 것일진대, 그렇게 살하고 나서 말했다 해서 말하려는 바가 이토의 세상에 들릴 것인지는 알기가 어려웠다. 

✎뮤지컬 영화 "영웅"은 보여주기가 중심이다 보니 극적인 장면이 많다. 안중근 의사가 독립군 단체와 모의를 하거나, 의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함께 했던 사람들의 피해, 전쟁 중에 살려주었던 포로의 밀고로 인한 고충,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항소하지 말고 죽으라는 장면 등이 영화에서는 크게 부각되고 관객의 감정을 끌어 올리지만, 소설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소설 후기 작가의 말에 안중근 의사의 거사에 직접 관련성이 낮은 것들은 뺏다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안중근 의사의 진짜 속내가 잘 드러난다. 영화와 책을 비교하고 있지만 사실 둘 다 보면 좋겠다. 종합적으로 당시의 상황이 더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느껴질 것이다.

 

(177) 뮈텔은 거리의 적막에 두려움을 느꼈다. 인력거에 몸이 흔들리면서, 뮈텔은 이토를 쏜 자는 한국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선교사로 사목해온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이 작은 반도에서 벌어진 학살과 저항이 그런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뮈텔은 스스로 알았지만, 그것을 사타케에게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미개한 사회의 원주민들이 문명개화로 이끄는 선진(先進)의 노력을 억압으로 느끼고 거기에 저항하는 사례들을 뮈텔은 세계의 후진지역에 파송된 동료 성직자들의 보고를 통해서 알고 있었다. 불꺼진 집들의 어둠 속에서 한국인들이 목소리를 낮추어서 이토의 죽음을 기뻐하고 있는 모습을 뮈텔은 상상했다.

✎이야기 속 뮈텔 주교는 철저히 제국주의 입장을 드러낸다. 선진 문명으로 개화하려는 걸 야만인들이 불필요한 항거를 한다는 시각이 그것이다. 그래서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알게되자마자 신도가 아니라고 부정한다. 이 일에 대해 100여 년이 지나서야 김수환 추기경께서 사과했다고 하니, 교회의 인간적인 모습을 새삼 확인한다. 물론 교회 등 종교가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고비마다 선한 역할을 해 왔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다만 이렇게 목에 가시처럼 걸릴 때가 적지 않다. 코로나 시국에서도. 

 

(206) 주둔군은 호남 일대를 체로 치듯이 걸러냈다. 의병은 힘센 군장을 만나면 이백이나 삼백으로 큰 세력을 이루기도 했으나, 대개는 열 명, 스무 명이 작당해서 동네에서 싸우고 산골에서 싸웠다. 일본군은 의병이 발생한 마을에 보초를 세워놓고 통행하는 주민들을 잡아가고 쏘아 죽였다. 의병들은 청주, 포천, 봉화, 양주, 곡산, 평산, 파주에서 싸웠다. 돌진하다가 죽고 달아나다가 죽고 끌려가서 매맞아 죽고, 산속으로 숨어들어가서 굶어죽고 자살했다.

✎이토의 죽음 이후 황태자 이은은 3개월간 상복을 입었다. 지방 군수들은 사죄단과 위문단을 구성해 일본으로 가면서 그 비용들을 주민들에게 걷었으며 태황제의 무당 ‘수련’은 굿판을 벌여 이토의 혼백을 위로했다고 한다. 지배층의 친일부역 행위가 자세히 나오는 것에 비해 민중들의 행위는 간략하게 나온다. 기록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분량으로 그 시대의 주류 목소리를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또 의병들의 짧지만 강렬한 의지도 더욱 느껴진다.

그럴수록 안중근 의사가 얼마나 고립된 상황에서 의거를 결행했는지가 더 잘 느껴진다. 

 

중학생이 이 책을 잘 읽을 수 있을까, 중3이면 괜찮을 것 같다. 다만 이토가 서술자인 부분에서는 한자어가 많다. 지배층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느라 그런 것 같다. 이토 저격 이후에는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은 없다.

특히 안중근 의사에 대한 사형이 집행된 후 유해를 찾을 수 없는 서사나 안중근 의사의 가족이나 형제에 대한 이야기도 안타까움이 컸다. 영화와 다른 결에서 여운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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