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가난이 온다(김만권)

 

학교자치 연구모임에서 같이 읽어 볼 책으로 이 책을 추천했다. 양극화와 능력주의, 무임승차에 대한 혐오 문제를 다루고 있고 방학 때 저자와의 만남도 가능하다고. 하지만 학기 중에는 일하느라 바빠 크게 생각하지 못했고, 방학 기간에 잡힌 저자와의 만남일은 그동안 마무리하지 못했던 자전거 국토종주를 다녀올 예정이라 마음에 담지 않았는데 웬걸, 코로나 확진으로 격리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책이 왔다.'

 

제목 새로운 가난이 온다

이전과는 다른 이유의 가난이 온다는 말인 듯싶다. 표지 삽화가 제목을 부연 설명해 주는 듯하다.

세상을 뜻할 것 같은 육면체 끝에 홀로 앉은 개인, 육면체 위에 올라앉아 있는데도 고개를 숙이고 있다. 육면체 옆에는 위로 오르는 사다리가 보이지만 위까지 연결돼 있지 않고 옆면으로 설치돼 있어 미끄러질수밖에 없다. 사다리가 있으나 오를 수 없고, 설사 올랐다고 해도 외롭고 불안한 착시. 결국 가난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표현하는 듯싶다.

 

표지의 현실에 비해 저자의 목소리는 따뜻하다. 그리고 복잡한 현실 이면의 작동 원리를 신랄하게 이야기해 준다. 나도 모르게 연필과 자를 들고 밑줄을 긋고 메모하며 읽기 시작했다. 글의 내용에 비춰 재미있다는 소감은 다소 부적절해 보이고 몰입하며 읽었다.

 

책을 읽고 보니 이전 시대와 다른 양상으로 심화되고 있는 가난에 대한 해석과 대안을 다루고 있어 기성세대는 물론 새 세대, 이른바 MZ세대들도 꼭 읽고 이야기 나눌 책이다. 읽으면서 출판 연도를 확인했더니 작년에 출간되었던 책이었다. 이 책이 작년에 논란이 되었다면 지금 우리의 정치 현실은 좀 더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기에 계속 유용한 책이다.

 

학교에서 코로나 3년차 아이들과 삶을 마주하고 있다. 학교도 배움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몸이 뒤로 처질만큼 무거운 가방을 든 아이들은 수업에도 진심이고 학교 이후의 생활(계속되는 학원 생활)에도 진심이다. 쉬는 시간에도 선행학습 문제집을 정신없이 풀고 있다. 반면 가방 없이 등교하는 학생들도 점점 늘고 있다. 이 친구들은 수업 시간에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사회적거리두기' 차원에서 개별적으로 앉아 있는 자리배치로 배움도 오롯이 개인의 문제가 되고 있다.

 

교실 내 협력을 경험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 개인을 넘어선 연대의 역량을 체득하는 데에도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방학 동안 그런 수업을 고민하고, 동료들과 꿈꿔야하고.

 

기억할 겸 책 내용을 다음과 같이 메모해 보았다.

 

#평범한 우리들

이 책은 코로나로 인해 선명하게 드러난 사회적·경제적·생태적 위기를 들여다보고 평범한 우리들이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 이야기하고 있다. 코로나 이전부터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시대이지만 양극화 현상은 심화되었으며 사회 안전망은 더욱 불안해졌다. 사회구조로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며 불평등은 더 공고해지고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코로나로 앞당겨진 뉴노멀의 시대, 다수의 평범한 우리들이 새로운가난에 맞서 새롭게 시작할 것은 무엇일까?’, 연대의 힘으로.

 

#인공지능 시대 #인간의 존엄성

우리가 살고 있는 제2 기계 시대(특히 4차 산업혁명)에는 디지털 기술과 로봇 기술이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능력을 증폭시켰다. 기계에 의한 인간 지배를 걱정하지만 기계는 학습을 통해 움직이므로 관건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정립이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인간과 로봇의 관계에도 적용되고 확대되기 때문이다. 로봇은 인간이 될 수 없다. 인간만의 특성인 유한성과 우연성은 알고리즘으로 표현할 수 없으므로. 문제는 로봇에 의한 일자리 대체다. 또한 디지털 기술을 통해 플랫폼 경제가 확대되면서 고용 없는 일자리가 양산되고 있다. 풍요로운 시대, 역설적으로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시대다. 결국 인공지능 시대에 맞는 새로운 윤리가 필요하다.

 

#복지국가 #신자유주의

산업혁명을 통해 풍요로운 시대가 됐지만 그 결과는 소수에게 집중됐다. 두 차례 세계대전 및 경제공황을 거치면서 사회보장에 대한 요구 및 안정된 노동력 필요, 민주주의가 결합해 복지국가가 탄생했다. 그러나 1960년대 성장률 저하 및 오일쇼크로 불황이 지속되면서 잉여 생산물이 생기고 자본은 국경을 넘어 전 지구적으로 확대되었다. 한 국가보다 영향력이 큰 초국적 기업이 등장했고 거대자본은 세금이 싼 곳을 찾아 이동하며 국가를 흔들었다. 국가는 자본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으며 복지국가에 큰 타격을 입혔다.

게다가 산업사회에서 포스트산업사회로의 전환은 생산자 중심에서 소비자 중심으로 전환되면서 노동자 계급의 쇠퇴를 가져왔다. 자본은 더 싼 노동력을 찾아 국경 밖으로 나갔고 국내 노동자를 보호할 수 없게 되었다. 국가가 보호하지 않는 노동자를 우리 사회도 감당하지 않았다. 자본은 국가가 담당하는 주요 공공산업에 대한 민영화를 요구하며 통합된 시장을 만들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복지국가에 반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특히 복지국가의 수혜를 받은 새로운 세대들은 자수성가의 신화를 만들었다. 국가의 보호에서 벗어날 때 노력한 개인은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지구적 헤게모니가 되었다. 이로써 인류가 애써 만들어 온 모든 사람들의 안전망인 사회복지제도는 무너지고 개인의 진취적 자립정신을 강조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 자기 삶의 어려움은 개인의 문제가 되었고 국가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현상이 일반화되었다..

 

#포스트민주주의 #우파 포퓰리즘

지구적 시장에서 경제적으로 발전한 국가도 빈곤이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또한 디지털 기술은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계층에 더 많은 소득이 집중되었다. 노동자본에 비해 자본소득이 컸으며 이는 자식에게 세습되고 불평등은 심화되었다. 소수의 부자들, 이른바 슈퍼리치, 울트라리치가 늘어나는 대신 중산층은 무너져 갔다. 민주주의의 근간인 중산층 역시 풍요로움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소외되었으며 실직에 대한 불안이 크다. 이제 계층 간 이동이 어렵게 되었고 주거·결혼·출산·교육 등 모든 면에서 불평등하다. 슈퍼리치들이 분배규칙 결정에 개입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민주주의 특성을 갖추면서도 소수의 정치 엘리트와 슈퍼리치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포스트민주주의는 포퓰리즘의 폭발로 이어졌다. 특히 우파 포퓰리즘은 소수의 정치 엘리트들이 평범한 사람보다 제3 집단에 더 관심을 쏟는다며 지지자들의 분노를 일으켰고 그 결과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한 대안으로 슈퍼리치를 뽑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선진국들의 흐름이 그렇다.

 

#잉여의 시대 #플랫폼 노동자

초국적 자본은 자리 잡은 영토 안에서 변수가 생기면 구조조정을 하며 떠난다. 하지만 노동은 이동이 어려우므로 결국 잉여가 된다. 또한 산업사회에서 소비사회로 전환되면서 생산자보다는 소비자 중심의 사회가 된다. 따라서 정치적 의사 결정 소득이 높은 사람에게 반응한다.

잉여가 된 노동자들은 플랫폼 노동에 뛰어든다. 부업이라는 개념 아래 노동자도 아닌 모호한 노동자로 국가의 보호망 외부에 놓인 국민으로 살아간다. 온라인·오프라인 플랫폼 노동자들 모두 자영업자라는 상황 때문에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면서 아무리 일해도 가난한 워킹 푸어가 된다. 그런데 산업사회 때 뿌리내린 노동윤리는 아무리 일해도 가난한 이들의 마이크를 빼앗거나 그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에서 벗어나게 한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

근대시대에 형성된 노동윤리는 이 시대에 맞지 않는다. 이제 세상은 물고기 잡는 법을 배워서 알고 있어도 물고기를 잡을 자리가 없다. 그런데 세상은 이미 풍요가 넘친다. 하지만 노동은 여전히 삶에서 중요하다. 따라서 노동의 의미를 재정립해야 한다. 생존을 위한 노동에서 삶을 위해 유용하며 다른 존재들과 공유하는 표현활동으로서 노동으로 재정립해야 한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을 통한 디지털 시민권은 기존의 자유권, 정치권, 사회권을 보장하기도 하고 그 자체로 다른 권리를 가지기 위한 권리로서 노동에서 벗어난 노동이 삶의 일부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던 일자리를 로봇에게 내주었으므로 그 대가로 로봇세를 걷고, 플랫폼만 제공하고 부불노동(임금을 지불하지 않는 노동. 상대 개념으로 지불노동)으로 이윤을 창출해 왔던 플랫폼에게 우리가 일한 몫을 구글세로 걷어, 재정립된 노동의 시대에 재원을 마련하자. 모든 시민들에게 기본소득을 주어 소비력이 인간 존엄인 사회에서 존엄을 지킬 수 있도록 하거나, 이미 앞선 세대들이 다 사유화해 버린 공유자산에 대한 기금을 만들어 후대에게 목돈의 형태로 지급해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살게 하는 기초자본을 줄 수도 있다. 또한 고용 없는 플랫폼 노동자를 위해 ‘전국민 고용 보험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제도를 통해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자.

 

#능력주의와 혐오

에필로그에서 따로 다뤄야 할 정도로 우리나라는 능력주의가 강조되고 있다. 미래사회에 대한 대응으로 제안된 내용들 대부분이 개인이 잘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능력을 강조하고 있지만 경쟁 시스템이어서 그 능력을 갖추어도 결국 소수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런데도 능력주의를 바탕으로 각자도생의 기회를 공정하게 보장하라는 요구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개인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덜 분배받는 게 정당할까, 민주주의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정치이다. 게다가 현재의 능력주의는 공정하지도 않다. 소수 엘리트의 부모 및 중산층 부모까지 모든 자원을 동원해 1%가 되기 위해 교육비를 쏟아부어 능력을 세습하고 있다. ‘부모의 부역시 지능처럼 타고난 것이기에 공정한 경쟁이라고 볼 수 없는데 이를 가리고 노력주의로 포장하고 있다. 그 결과 경쟁에서 밀린 평범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무능력하게 생각하며 자기혐오에 빠진다. 그러다 자신도 살기 위해 결국 밖으로 분출하여 타인을 혐오하게 된다.

능력주의 속에 무엇보다 중산층이 무너지고 있다. 민주주의는 중산층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소수의 엘리트들은 자신의 이익에 관심이 있고, 하층민은 먹고살기에 바쁘다. 민주주의가 소수를 위한 시스템이라면 그것을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란 이름에 걸맞게 새로운 기계 시대에 맞춰 새로운 분배를 상상해야 인간이 서로를 보호하는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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