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사록, 조선 선비의 중국 강남표류기(최두찬)
- 행복한 책읽기/문학
- 2014. 3. 25.
중국땅이지만, 해외여행을 쉽게 갈 수 있는 시대이니만큼 요즘 3~40만원이면 갈 수 있는 곳! 항주와 소주 그리고 서호!
불과 200년 전에는 <승사록>에 있는 표현 그대로 표류를 통하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곳이었다. 청 황제의 여름행궁 열하를 방문한 박지원이나 중국 선비와 거리를 뛰어넘는 우정을 나눈 홍대용도 강남선비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 결코 가볼 수는 없었던 곳! 책에서는 조선에서 표류한 사람들이 종종(?) 강남땅을 거쳐갔음을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표류한 사람들이 꽤 많았음에도 알려지지 못한 것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승사록> 전에 <표해록>이 있었지만 말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기록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예기치 않은 여정이었지만 <승사록>은 여행견문록이다. 그런데... 시가 정말 많았다. 작가의 신분과 당시 여정의 특성상 선비들과 교유하기 위해서 나눈 시들이었겠지만, 한시의 감흥과 감동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는 나에게는 너무도 버거운 짐이었다. 결국 글자만 읽었다고 할까? 그래도 <고려백지가> 같은 한시는 조선을 그리워하는 작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참 좋았다.
여정을 읽으며 강남땅 선비들의 손님을 맞이하는 마음과 풍요로운 인심, 표류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귀국까지 책임지는 대국의 자세, 최두찬의 박학다식함에 감탄했다. 하지만 기존에 읽었던 ‘연행록’과 같은 흥미진진함은 덜했던 것 같다. 최두찬에게는 상당히 힘들었던 여정일 것 같은데, 강남선비들과 교유하던 것이 주된 내용이라 여행 중에 있었던 소소한 일상들은 생각보다 기록이 덜 되어서인 것 같다. 18~19세기 바야흐로 산문의 시대에 탄생한 여행기에 거는 기대가 너무 컸나 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류와 귀국의 험난한 여정 속에서 기록을 잊지 않았던 최두찬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인상 깊은 구절-
20 (서문) 현실적으로 강남땅은 표류를 통하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최두찬의 <승사록>은 최부의 <표해록>에 필적할 만큼 강남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요즘 ‘신의 선물’이라는 드라마를 하고 있는데, 최두찬의 표류가 혹시 ‘신의 선물’이 아닐까?
28~29 자신이 귀환할 수 있도록 힘이 되어준 강남 사인(士人)들에 대한 고마움을 절절히 써 내려갔다. 그는 오래도록 그들의 호의와 환대를 잊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끔찍한 표류 체험을 하였다. 아마도 그 자신에게는 다시는 떠올리기 싫을 기억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는 표류를 통해 미지의 땅에 발을 디뎌 누구도 쉽게 하지 못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는 돌아와서 강남정이란 이름의 정자를 지었다. 다시 만나기 힘들 강남땅의 선비가 그리워서였을까? 아니면 너무다 아름다운 강남땅이 떠올라서였을까?
⇒ 다시 만나기 힘들 강남땅의 선비와 아름답고 풍요로우며 인심이 후한 강남을 모두 그리워하지 않았을까?
80~81 배가 출렁대 왼편으로 기울면 곧바로 왼편이 무겁데 되고, 오른편이 기울면 곧바로 오른편이 무거워졌다. 그러자 뱃사람들이 비로소 묶어놓은 말을 풀어서 바다로 던지자는 의논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사상(私商)은 그의 말을 아끼고, 선주는 그의 뱃삯을 아껴서 자못 서로 버팅기려는 뜻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사는 것을 좋아하고 죽는 것을 싫어하는 마음은 동물이나 사람이나 같다고 생각하여 우선은 짐짓 가부를 결정하지 못하였다. 바람이 더욱 세차게 불어 배가 거의 뒤집혀서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나는 “사람이 다쳤는가만 묻고 말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는 뜻으로 (말을) 바다에 던지니, 배가 조금 안정되었다.
⇒ 번역이 조금 이상하지만, 배 안에서 지은이가 선택의 중심에서 결정권을 쥐고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이 뒤로도 관원들과 이야기하거나, 상소를 올릴 때 등에서도 표류한 사람들의 중심에 지은이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동물도 사는 것을 좋아하고 죽는 것을 싫어한다’는 대목에서 <슬견설>이 떠올랐다. 결국 말을 바다에 던졌지만.
98 아! 예전에 표류하는 배에서 죽게 하였다면 비록 만금이 있었더라도 모두 수부(水府)의 물건이 되었을 것이다. 나에게 보은하는 계책을 만들게 한다면 마정방종(摩頂放踵)한다 하여도 아주 적은 보답이 되기에도 부족할 터이다. 얼마 안 되는 집기들에 대해 무에 생각할 것이 있겠는가. 의로움으로 시작해서 이로움으로 마친 것이 한스러우니, 어찌 의로운 장부에게 흠이 되지 않겠는가?
⇒ 표류하는 사람들을 살려주고 가진 집기들을 모두 빼앗아간 어부들에 대한 원망이 아닌 고맙다는 말을 참 거창하게도 한다. 어쨌든 살아났으니, 그 마음이 이해할만 하다. 그래도 조금은 원망했겠지?
161 내가 들으니 ‘영파를 경유하여 북경으로 가는 길에는 육지길과 물길이 있다’ 하기에 글을 올려 육지길로 하기를 청하였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병든 기러기가 활에 상처를 입으면 빈 활시위에도 저절로 떨어지고, 늙은 소가 해를 두려워하게 되면 달을 보고서도 헐떡거리게 됩니다.”
⇒바닷길에서 그리 험한 고생을 했으니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랐’으리라. 자라와 솥뚜껑이 아닌 병든기러기외 빈화살, 늙은 소와 달의 비유가 새롭다.
231 “근심스럽습니다. 그대께서 옷이 없다니요. 집에 있는 사람들도 닷새 만에 옷을 갈아입으면 땀 냄새로 괴롭습니다.” 내가 대답하였다.
“황제께서 너그럽고 어질어서 모든 옷과 식사와 관련된 것은 모두 은혜를 베푼 사례가 있으니 먼 데서 온 사람이 옷이 없는 것은 과부가 할 걱정은 아닙니다.”
⇒ 솔직히 정말 냄새가 많이 났을 것 같다. 아마 최두찬도 이런 기록을 남기는 것을 보면 본인도 냄새와 불결한 위생상태로 무척 고생했을 듯.
257 “서호는 볼 수 없습니까?” “볼 수 없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좌우에서 모두 말이 없었다. 내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말을 세워놓을 염려가 있어서인가.” 그러자 좌중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소통의 가장 큰 단계는 유머와 웃음이 아닐까? 말이 통하지 않는 중국 사람들을 웃게 한 최두찬의 지식과 소통능력에 감탄한 구절이다.
301 저녁밥을 먹자 어떤 사람이 고려지 두 장을 가지고 와서 글씨를 청하였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초백지였다. <고려백지가>를 지어주었다.
우리 동방 토산에는 좋은 닥 생산되니
종이 빛 매우 희어 서리, 눈과 같이 희네.
지공들이 두들겨서 종이를 만드노니
두껍거나 얇거나 모두 다 이름 있네.
북으로는 중국 가고 동으로는 일본 가니
가격이 뛰어올라 천금도 싸다 하네.
조선 사람 천히 여겨 아낄 줄 모르니
하루에 문방에서 천 장이나 허비하네.
겨울이면 눈보라를 막으려고 창문을 보수하고
때로는 인쇄공에 부탁하여 경전 찍네.
올해에 표류하다 절강부에 이르니
분지와 화전에 상다리가 휠 것 같에.
유인들은 종이 빌려 <승사록>을 베끼고
묵객들은 종이 구해 서호장을 썼도다.
시험 삼아 먹물을 듬뿍 묻혀 쓰려 하니
종이가 거칠고 뻣뻣하여 붓이 나가지 않네.
종이 펴고 붓 던지며 한 번 길게 탄식하니
그 품질 자못 달라 한양 것 아니어서네.
억지로 붓 대려도 손에 공이 없으니
염파가 조나라 군대 생각한 까닭이었네.
오늘 아침에 비로소 고국의 낯 씻게 되니
하늘가 먼 곳에서 떠도는 서생 같네.
⇒ <승사록>에는 정말 많은 시가 나온다. 모두 다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이 시는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것은 왜일까?
311 “외이(外夷)라 한 것은 중국에 대해 상대적으로 말한 것이지 낮추어 본 것이 아닙니다.”
⇒ 최두찬이 상당히 발끈했을 듯.
327 일행 중에 고한이 [밭에서] 신을 고쳐 신었다는 이유로 밭 주인에게 맞게 되었다. 윤제국이란 사람이 화해를 도와주어 마침내 무마되었다. 그런데 노상에서 일이 자꾸 꼬이는 것이 한 번으로 충분치 않았으니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 고된 귀국길에 이런 일이 매우 비일비재했을 듯.
334. 노구교, 정양문..
조선관에 묵게 하였으니 관에는 제주에서 고기 잡던 배가 표류하다 소주에 이르게 된 열두 명이 있어서 영접했다. 먼 곳에서 유랑하였으니 스스로 동병상련의 탄식이 나왔다. 그러한데 배 세 척이 표류하였다가 한 곳에서 만나게 되었으니 우습고 한탄할 만한 일이었다.
⇒ 낯익은 이름, 노구교, 정양문. 표류하던 사람들을 만나는 것보다 더 반갑다.
339 사람들이 모두 다 냉골에 있었기 때문에 설사와 학질 등의 증세가 번갈아 나타나 앓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으니 매우 우울하였다.
⇒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을까?
427 부군이 돌아가신 지 백 년이 가까워온다. 아름다운 말과 아름다운 행실이 점차 사라지게 되었으니 나와 같은 힘없는 자손이 아는 것은 적고 정성은 부족하여 당세의 문장가의 문하에 들어가서 숨어 있는 것을 드러내 퍼뜨리지는 못아였으나, 오직 오래갈수록 증거가 없어질까 두렵다. ~ 벼오년(1906년) 맹춘 임오에 불초 증손 지영은 감격에 북받쳐 울면서 삼가 쓰다.
⇒ <승사록>이 1906년 나오게 되었다니 무척이나 새롭다. 그러고 보니 지은이가 표류한 것이 1800년 초중반이었으니, 1906년이란 연도가 그리 멀지는 않구나. 나라가 망해가도 역시 가문은 소중한 것 같다. 아님 이러한 정신이 결국 치열한 기록의 정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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