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커(추정경)
- 상황별 청소년 소설 추천/가족과 갈등할 때
- 2013. 10. 8.
"내 이름은 망고"에서 씩씩하고 어른스러운 주인공 캐릭터를 선보였던 추정경이 매우 색다른 소설로 청소년 문학에 두 번째 문을 두드렸다.
일단 이 소설은 끝까지 책에서 손을 놓지 못할 정도로 매우 흡인력이 강했다. 집단 폭력으로 병원에 누워있는 하균이와 하균이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에 한강 다리 밑 벙커에 숨어사는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가출이’를 중심으로, 소설 속 이야기는 꼬인 실타래를 함께 풀자고 하는 듯 독자를 잡아당겼다. 마치 주인공이 처음 벙커의 문을 발견했을 때처럼.
소설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하균이 동급생들을 괴롭히고, 그것이 다시 집단 폭력으로 이어지는 하균이 이야기와, 새엄마의 가정폭력으로 목숨까지 잃을 뻔한 민호와, 그리고 자신이 누군지조차 모른 채 벙커 속에 숨어 미노(민호)와 그의 수호천사 메시를 만나 절망의 운동화를 빨고 있는 가출이, 그리고 하균이 아버지와 어머니, 사업에 실패한 김씨 아저씨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한 할아버지, 본드 할머니까지. 이 인물들이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아는 순간(메시의 말에 따르면 공통점을 찾을 것!) 인물들의 고통에 공명하며 따뜻한 연민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
판타지라는 흥미로운 외피에 ‘가정폭력’과 ‘학교폭력’을 다루고 있으면서,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절망과 희망, 고독과 연대, 불통과 소통이라는 중심줄기를 독자들에게 놓치지 말라고 작가는 마지막에 힘주어 말한다.
죽음의 문턱까지 가서야 그토록 자신을 미워하던 스스로를 용서하고, 아버지를 용서하고 삶의 길을 찾아나간 주인공에게 박수를 보내며 책장을 덮었다. 우리 아이들이 죽음의 문턱까지 가지 않도록 몽골인들처럼 서로에게 거울이 되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메시(축구선수 메시가 연상되지만, 혹시 메시아에서 온 메시가 아닐까? 신적인 존재! 수호천사 말이다)와 같이 절망의 운동화를 닦아주는 그런 사회(학교)시스템이 수호천사처럼 든든하게 설 수 있도록 이젠 정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야 할 때다.
** 인상 깊은 구절 **
(64) “김가출,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해?”
“뭐?”
“모든 희망을 잃어버려 속이 텅 빈 사람이야.”
“무슨 소리야?”
“희망의 자리에 몇 배나 무거운 절망이 대신 채워졌다고나 할까? 그래서 희망을 놓아 버린 사람의 운동화는 이렇게 무거운 거야. 우린 그 절망의 무게를 덜어 주는 일을 하는 거고.”
(76) “자기 스스로를 통제하고 멈추는 게 아이에겐 가장 중요한 순간이야. 미노가 기쁨이든 고통이든 그걸 스스로 제어하는 순간이 오면 그때는…….”
"그때는 더 이상 이 벙커가 필요 없겠지. 앞으로 더 힘든 길이 있다 해도 매일 스스로 발전기를 돌리고, 보상을 미룰 줄도 알게 되고, 제 마음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도 알게 될 테니까."
(106)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라는 말에는 그 사람을 알기까지 ‘시간’과 ‘노력’을 들이다 보면 대부분의 사람이 이해 가능한 존재가 된다는 함정이 숨어 있다.
그 사람의 과거, 자라 온 환경,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따위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일이 어려운 것인데,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라는 결론에는 ‘이해와 공감이라는 힘든 과정을 거치면’이라는 말이 쏙 빠져 있는 셈이다. 나는 힘들게 노력을 기울여 녀석을 이해하게 되는 게 싫어서 일기를 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109)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날 밖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었고, 그 때문에 기분이 별로였다는 걸.
그걸 분출할 대상은 힘없는 엄마와 나뿐이라는 걸 그때 나는 깨달았다.
아버지의 폭력은 술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 때문도 아니었다.
단지 아버지 스스로가 만든 화를 분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걸 알게 된 순간부터 나는 아버지를 증오였다.
엄마는 아버지를 말리려다 몇 번이나 나가떨어졌다.
엄마가 불쌍하다.
왜 아버지 같은 사람을 만나 이 고생일까?
왜 나를 낳아서 헤어지지 못하고 저렇게 사는 걸까.
(195) "아저씨한테 왜 내가 보일까 생각해 봤는데 결론은 하나예요. 아저씨가 사람이든 영혼이든 나처럼 마음 붙일 곳 없이 떠돌다가 다른 사람 마음에 빌붙어 살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건 확실한 거죠. 진짜 자기 마음은 찢어지게 가난해서 마음 하나 쉴 곳이 없는 사람인 거예요."
"사실은 모든 걸 망치는 게 바로 아저씨 자신이라는 거 아저씨도 알죠? 가족들이 싫어하는 것도 아저씨 때문이고 사업이 망한 것도 결국은 아저씨 때문이잖아요. 그래서 이렇게밖에 되지 못한 자신이 정말 밉잖아요. 그런데도 모든 게 나 때문이란 그 말을 못해서 이 지경이 된 거고요."
(223) 어쩌면 김사장처럼 나는 처음부터 내 자신이 너무나 미워 스스로를 부정하며 지워버렸던 게 아니었을까? 메시가 말한 것처럼 나 역시 내 자신을 너무 증오한 나머지 누군가의 마음에 숨어드는 파렴치한 짓을 한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지 숨이 막혔다.
(228) 저도 부모로서 아이를 이렇게 키운 걸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요. 하지만 댁들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우리 애를 비난하기 전에 여섯 명이 한 사람을 폭행한 잘못을 먼저 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쯤에서 덮고 싶으시다고요? 그쪽 부모님들 숫자가 더 많은 걸 내세워 이 일을 무마하려 하신다면 여섯 명의 아이들이 우리 아이 하나를 때린 것과 뭐가 다른가요? 원래 싸움은 더 많이 가진 사람, 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지만 이런 진흙탕 싸움에서는 더 잃을 게 없는 쪽이 이기기 마련이죠. 저는 잃을 게 없는 쪽이니 끝까지 가겠습니다.
(245) 이 사람 역시 지금을 놓치면 영영 아들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혼신을 다해 자신의 방법대로 아들을 부여잡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유일한 방법이 폭력일 수밖에 없는 이 사람을 나는 이제 이해한다. 그의 어린 날이 그랬고, 살아온 길이 그랬고, 또 지금도 달리 방법을 찾지 못했을 테니까.
(253) 몽골 사람들은 거울이 없어서 서로의 얼굴을 봐 준단다. 눈곱이 꼈는지, 땟물이 묻었는지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 되어 준다더라. 뭐, 거기 가면 화장할 일도 없는데 이것도 짐만 되겠다.
~ 그 말대로 엄마는 늘 내 얼굴을 열심히 들여다본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들여다보고 이해하려고 무진장 노력 중이란 걸 알고 있다. 나도 가끔 엄마의 잠든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엄마도 마침내 자기만의 벙커를 찾아 그 속에 평화롭게 깃든 얼굴이다.
보이지 않는 내 얼굴도 그러하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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