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망고(추정경)

 

독특하지만, 아름다웠다. 낯설지만 낯익은(?) 사람들의 풍경이, 수아의 복잡한 내면이, 생활고에 지친 엄마의 마음이 그랬다. 성장소설이면서, 관광소설(?), 세계사소설(?) 등, 이름 붙이자면 여러 가지 장르로 나뉠 수 있는 이름이 붙을 수 있는 참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처음엔 낯선 캄보디아라는 설정이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빚에 쫓겨 캄보디아까지 숨어 지내는 수아 모녀의 이야기는 왠지 억지스러운 설정인 것 같았다. 그리고 덜 성장한 모습의 전형을 보여주는 수아 엄마(이름이 ‘지옥’이다. 참..)와, 불편한 이웃 삼콜 할배와 쩜빠, 쏙천은 왠지 허구 세계에서 덜 마른 채색옷을 입고 나온 캐릭터 집합처럼 보였다. 그런데 읽을수록 낯설고 혼란스러운 이야기에 점점 몰입이 되었다.

사라진 엄마를 대신해 가이드 일을 보는 수아와, 병든 엄마를 대신해 통역을 보는 쩜빠의 초보 가이드 도전기, 그 둘의 갈등과 화해, 캄보디아의 역사를 되짚어 보며 점점 정신적으로 성숙해 가는 수아와 쩜빠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흥미로웠다.
수아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약하지만 본디 강했던 엄마와 60, 70년대 우리나라 정서를 지닌 캄보디이 이웃들의 관심과 사랑 때문일 게다. 물론 튼튼한 버팀목 아버지 존재가 드리운 그늘이 워낙 컸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 소설을 읽고 캄보디아 여행을 가고 싶어졌다. 그리고 국내, 국외 범주를 포함한 모든 여행을 생각했다. 여행은 추억을 심고, 그곳에 마음을 심는 일은, 좀더 알고, 사랑하고,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10대 수아가 아니더라도 20대, 30대, 그 이상의 세대까지도 좀 더 자아를 확장할 수 있는 방법은 마음을 연 여행으로부터가 아닐까? 채무자를 쫓아 머나먼 캄보디아까지 쫓아온 택이엄마와 오봉아저씨처럼. 그들처럼 그렇게 부드럽게 변할 수 있겠지?

 


<인상 깊은 구절>

(33) 어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아이가 갑자기 부쩍 자라는데 그 시점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는 사실 아닐까. 이를테면 ‘조그만 게 따박 따박 말대꾸하고 기어오를래?’와 ‘너도 이제 다 컸으니 네 앞가림은 해야지. 언제까지 엄마가 입히고 먹여서 학교 보내주길 바라냐?’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기. 어른들은 자신이 그러는 줄 모르거나 알면서도 모른 체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어느 시점에선 확실히 깨닫게 된다. 부모가 하는 이런 말들이 몇 년 치 쌓이면 모순투성이란 사실을.

✎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서 자녀들의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혼란스러워하는 부모의 모습을 참 잘 포착했다고 할까?

 

(70) -수아야, 왜 발버둥치지 않니?

-어차피 꿈이잖아.

-꿈도 네가 사는 세상의 바깥문이야.

-깨고 나면 달라질 것도 없는데 뭐.

-그래도 지금 이겨 내지 못하면 가라앉은 무게만큼 네 마음도 힘들거다.

-그럼……왜 우릴 먼저 구해 주지 않은 거야?

-…….

-어떻게 우리를 몰라볼 수가 있어?

✎ 간혹 수아의 꿈이나 회상에서 나타나는 아빠의 모습은 무척 이상적이다. 다정하고, 섬세하고,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심지어 타국의 가난한 아이들에게 마음을 써 줄 줄 아는. 지금 수아의 꿈에 나타난 아빠의 모습도 다르지 않다. 이 소설 말미의 반전을 암시하기도 하는데. ‘그래도 지금 이겨 내지 못하면 가라앉은 무게만큼 네 마음도 힘들거다’라는 대목은 너무 좋아 기억하고 싶은 대목이다.

 

(105) 삼 년 전 아빠는 내게 똑같은 말을 했었다. 단 한 번 보고 모든 것을 다 봤다고 믿진 말라고, 언제나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려는 의지가 필요하다고 했었다. 인간이 위대한 것은 이런 사원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걸 만들어 낸 의지에 있다고. 문득 엄마 역시 관광객들을 데리고 이곳에 올 때마다 아빠가 했던 그 말을 떠올렸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행복했지만 돌아갈 수 없는 추억을 매일 꺼내 보는 엄마의 마음은 슬펐을까 기뻤을까. 잠시 엄마의 뒷모습이 떠올라 얼른 고개를 저었다.

✎ 또 다시 회상 속의 아빠 모습. 역시 멋진 말만 골라서 하신다.

 

(156-157) “할아버지 말에 따르면 캄보디아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두 가지 아수라가 산대요. 하나는 배움에 대한 불신의 아수라, 또 하나는 학교에 대한 공포의 아수라.”

그 마음도 이해가 갔다. 배운 사람이 제일 먼저 처형되고, 그 처형의 무대가 학교였다는 점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겼을 것이다.

“그래도 배워야 한대요. 한국 사람들처럼 열심히 공부해야 발전할 수 있고, 다른 힘에 지배당하지 않을 수 있대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일 달러를 쥐여 주는 것보다 교육의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학교에 기부하거나 작은 공책이라도 선물하는 게 더 좋은 일이래요.”

✎ 이 작품의 또 다른 미덕. 캄보디아의 관광지를 무대로 하지만, 그 속에 숨은 역사, 캄보디아의 현재, 미래를 알기 쉽게 삼콜 할배의 입에서, 쩜빠의 입으로, 수아를 통해 우리에게 속삭여준다는 것이다. 캄보디아 여행을 하게 되면 이 말을 잊지 않으리라.

 

(202) “아니다. 할아버지 생각 다르다. 지구는 플러스, 마이너스를 하면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데, 그 에너지가 돌지 않아서 슬픈 거라고 한다. 따뜻한 나라 열이 올라가서 차가운 나라를 데우고, 그 에너지가 계속 돌아 내려와야 지구가 숨 쉰다. 태풍처럼, 에너지가 멈춰 있지 않는 것처럼, 못살고 잘살고 문제 아니다. 그런데 자꾸 한쪽이 계속 가지려고만 해서, 그래서 슬픈 거다.”

✎ 오세훈이 들어야 할 이야기. 아직도 집 구하고 있을까?

 

(223) 삼 년 전, 아빠는 바이욘 사원에 얽힌 이야기를 바로 이 자리에서 내게 들려주었다. 쉰네 개의 탑과 이백 개가 넘는 얼굴상은 모두 이 세상 사람들의 얼굴이라고……. 세상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다르고 우리가 순간순간 가슴에 담는 감정이 다 다르듯, 이 석상들의 표정도 어느 것 하나 같은 것이 없다던 말, 그 말이 지금 내 입에서 반복되고 있다.

✎ 또 멋진 말은 아빠의 등장?

 

(226~227) -수아야, 포도나무는 말이야, 땅이 비옥하면 오히려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해. 그냥 잎만 무성하게 자랄 뿐이야. 적당히 비바람도 불고 토양도 어느 정도 척박할 때 좋은 포도알을 맺는 거야.

-난 나쁜 거 다 통과하고 그냥 쑥쑥 자라서 어른이나 됐으면 좋겠는데.

-무슨 그런 서운한 얘기를. 수아 나이가 얼마나 멋진데. 수아 나이 때는 앞에 정말 많은 문이 열려 있잖아. 그런데 나이가 들면 그 문이 점점 사라지는 기분이 들거든.

-아빠 나이가 되면 괴로운 거야? 더 열고 나갈 문이 없어서? 저렇게 많은 표정이 없어서?

-그래…….

-아빠는 참, 뭘 모르긴. 등을 돌리고 서면 거꾸로잖아. 들어왔던 데로 나가면 다시 점점 더 문이 많아지는 거 아니야? 인생이 심심하면 뒤로 돌아가서 선택했던 문 몇 개만 바꾸면 되겠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듣고 보니 수아 말이 맞네. 근데 여긴 말이야, 어떤 기분일 때 오더라도 자기 얼굴이랑 똑같은 얼굴이 있어. 찾아보면 수아 지금 네 얼굴이랑 똑같은 것도 있을 거야.

-몰라, 이왕이면 웃는 얼굴이 좋지, 시큰둥한 게 뭐가 좋다고 돌로 새겨 두기까지 해.

-가끔은 힘든 일이 도움이 될 때도 있다니까. 아빠는 말이야, 수아가 지금보다 더 혼자였으면 하거든. 엄마가 침대 정리해 주고, 학원 시간표 짜 주는 거 그만두고 수아 혼자서 자기 일에 부딪쳤으면 좋겠는데.

-아, 또 잔소리, 아빤 무슨 얘길 해도 꼭 잔소리로 끝난다니까.

✎ 혼자인 우리 아이들, 불안하지만 꼭 헤쳐가야할 성장의 디딤돌. 수아의 성장기처럼 우리 아이들도 아프지만 아름답게 성장했으면. 수아 아빠의 바람처럼.

 

(255-256) 아빠는 내게, 추억은 묻혀 버리기 쉬운 거라고 말했었다. 꼭꼭 숨겨 놓고 꺼내 보다가 언젠가부턴 묻힌 자리가 어디인지 몰라서 찾지도 못하게 되는 게 추억이라고 했다. 그러니 매 순간 묻어 둔 자리를 잘 기억해야 한다고, 그래야 원하는 순간에 꺼내 볼 수 있다고.

✎ 그래서, 이제부터 잘 기억해둘 테다. 힘든, 좋은, 가슴 아픈 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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