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나의 남자들(이현)

열일곱 전문계 여학생의 유쾌 발랄 상큼 찔끔(?) 성장기.

흥미를 끄는 제목부터, 10명의 남자들로 이어가는 10개의 챕터들, 그리고 ‘떡실신’ 동아리를 중심으로 때로는 배꼽을 잡고, 때로는 스릴 있고, 때론 묵직하게 그 무언가를 생각하게 하는 사건들이 반짝반짝 다양한 빛깔을 내는 구슬처럼 엮여 있다.

할아버지에게 3대에 걸친 한을 만들게 한 전두환, 성장은 더디나 자존심 하나는 최강(입으로만) 최강태진, 부모님의 잘 나가는 대학동창 조 기자, 풀이 꺾인 카리스마 한상진 선생님, 각도가 조금 엇나간 사랑 선우완, 부모님의 꿈이 아닌 자신의 꿈을 찾아 나선 오빠 나금호, 비뚤어진 소유욕의 화신 찌질이 오정우, 누구도 욕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아버지 나성웅, 정말 돌을 던지고 싶은 변 모씨, 영원한 판타지 강동원까지, 이렇게 다양한 인물과 사건들을 얽어 가는 중심 끈은 역시 주인공 나금영의 성장이다.

조금은 만화적이고 비현실적인 캐릭터들이 호감 있게 다가오는 것은 긍정적인 나금영의 시선 때문이리라. 전작 <우리들의 스캔들>보다 유쾌하고, 좀더 세상을 돌아보게 만드는 다양성이 이 책의 큰 장점이다. 특히 연애, 진로, 우정, 소수자에 대한 시선, 다수의 음험한 폭력까지 나름 맛깔나게 구성돼 있다.
어쨌든, 나금영을 비롯한 대한민국 모든 열일곱, 파이팅이다!

<인상 깊은 구절>

(23) 오빠와 나는 노래방 자막으로 한글을 뗐고 곡 번호로 수를 깨우쳤으며 반주기로 절대음감에 가까운 음감을 익혔고 노랫말로 문학적 감수성을 키웠고 탬버린으로 박자의 개념을 배웠다. 그리고 나는 이미 네 살부터 곡 번호를 외우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그때부터 오늘까지, 노래방 은 언제나 내게 목마른 사슴의 옹달샘이요 고달픈 육신의 찜질방이자 상처받은 가슴의 후시딘이다.

✎ 이 구절들만 가지고도 이 소설의 성격, 단번에 짐작된다. 가볍게 살짝 긁어주는 경쾌한 문체에, 익살스러움까지. 하지만 알맹이는 빠진 허전함이..

 

(69) 전체적으로 방송 내용은, 거짓은 아니었지만 진실이라고 말하기에는 좀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 이런 경험, 공감 100%다. 카메라가 열심히 돌아가지만, 정작 방송될 때는 거짓은 아니지만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아 허전하고, 애매한 그 무엇이 있다. 언젠가였더라, 학교폭력 관련 긍정적인 뉴스가 우리 학교를 대상으로 떴는데, 참 뭐라 말할 수 없는 씁쓸함이 느껴졌다.

 

(92) 나에게도 교복이 로망인 시절이 있었다. 초등학교 육 학년 때였다. 중학교에 입학하는 즉시 교복이란 초등학생들에게만 그럴싸해 보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어린이의 자유도, 선택할 수 있는 어른의 자유도 없는, 교복은 자유의 결핍에 시달리는 우리의 처지를 상징할 따름이다. 또한 교복은 우리의 눈부신 미모를, 아니 눈부실 미모를 가리는 먹구름이기도 했다.

✎ 교복에 대한 작가의 성찰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제 교복은 자유의 결핍이 아닌, ‘라인과 다리가 길~어 보이는’ 또 하나의 자본주의 아이템이 돼 버렸다.  

 

(155) 식탁 위에 놓인 케이크 표면이 번들거렸다. 더운 날씨에 초콜릿이 녹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케이크에 꽂아 둔 양초를 뺐다.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육군사관학교에 실패했다고 해서 오빠에게 이 양초가 쓸모없는 것은 아닐 테니까. 오빠에게 앞으로 축하해야 할 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남았다. 육사가 아니라도 다른 대학에 얼마든지 갈 수 있고, 여동생에게는 까칠한 오빠지만 어여쁜 여자 친구를 만나는 행운을 누릴 수도 있을 테고.

✎ “앞으로 축하해야 할 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남았다.”는 말이 가슴에 남는다. 한 번의 실패가 미래의 모든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169)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나는 늘 자유롭게 지냈다. 오빠는 나를 부러워했고 나는 오빠를 딱하게 여겼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런데 진짜 딱한 사람은 나였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뭘까. 마루는 여름방학 내내 전주에서 궁중 떡을 배웠다. 태진이는 일본 대학으로 진학하고 싶다며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고, 현지는 일단 자격증부터 따 놓겠다면서 지난달에 한식조리사 필기시험에 합격했다. 나금영, 넌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거냐? 낯설고도 어려운 질문이다.

✎나도 무언가 하고 있다면, 열심히 살고 있는 거겠지?

 

(226) “너무 그러지 마라. 그런 식으로 따진다면, 대한민국의 모든 아들딸은 제 아빠 때문에 헛구역질하며 살아야  거다. 너희 아빠가 노래방에서 도우미를 쓴다고? 그래서 뭐? 그럼 그 도우미를 부르는 사람은 뭔데? 너희 노래방에서 도우미 불러 달라고 신용카드 내미는 아저씨들은 아들딸 없을 거 같아? 그런 아저씨들은 특별히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아? 다들 그냥 직장에 다니고 뭐 그런 사람들이야. 누구네 아빠, 누구네 삼촌 이렇게 말하면 억울한 사람도 있겠지. 세상에 왜 착한 아저씨들이 없겠니? 하지만 난 그런 가능성은 접어 두기로 했다. 괜히 그런 기대하면 실망만 커지잖아.”

✎ 금영이처럼 실망하는 것도, 마루처럼 기대하지 않는 것도 비정상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타락한 세상이 됐을까? 부모에게 기대하지도, 실망하지도 못하게 만드는 세상.

 

(227) 좋아 우정의 총량은 비밀의 총량과 같다. 감추고 싶은 치부라면 효과는 두 배. 이 언니도 한 건 털어놓으마. 

✎ 어릴 적 내 생각과 비슷하다. 교사가 된 지금도 솔직히 아이들과 상담을 하면서도 먼저 다가가기 위해서, 던지는 밑밥이기도 하다. 

 

(231) 나는 엄마 아빠의 그런 모습에 마음 놓고 징징거릴 만큼 어리지도 않고, 엄마 아빠의 삶과 나는 무관하다고 큰소리칠 만큼 자라지도 않았다. 나는 혼란스러운 교차로에 서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은 채, 잘 모르는 동네에서.

✎ 발랄한 금영에게 닥친 시련. 성장통이겠지? 그런데 아직 나도 ‘마음 놓고 징징거릴 만큼 어리지도 않고, 엄마 아빠의 삶과 나는 무관하다고 큰소리칠 만큼’ 자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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