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고래(김형경)
- 상황별 청소년 소설 추천/내면의 문제로 고민할 때
- 2011. 6. 12.
"어른이 된다는 건 어떤 삶인가. 사람들은 저마다 슬퍼하는 방법이 있다."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부모를 한꺼번에 잃은 '니은'이는 그 슬픔을 감당하기가 힘들다.
슬프지만 그걸 풀어낼 힘이 없다. 그러면서도 열일곱 살, 주민등록증은 있으나 여전히 미성년자인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어른이 되는 것인지 고민이다.
<꽃피는 고래>에는 여러 사람들의 저 마다의 상실감이 풀어진다.
열 살 남짓한 때 정들여 키웠던 개를 잡아 먹은 아버지로 인한 상실감과 슬픔, 처용의 전설이 남아 있는 포구가 대규모 정유소를 개발되면서 자연과 고향과 삶을 일허버린 슬픔, 한평생을 고래잡이 어부로 살았으나 더 이상 고래를 잡을 수도, 고래와 한 몸이 될 수도 없는 슬픔, 남편과 아들을 잃고 살아가는 슬픔들.
그 슬픔들은 하나같이 결정적 계기가 있고,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것들이라 견디기가 쉽지 않다. 상실감으로 인해 이상해지고, 비뚤어지는 마음에 브레이크를 걸기가 어렵다.
그래서 좌절, 고민, 방황, 자포자기 상태에 빠지기도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삶과 그들의 말과 행동 속에서 슬퍼하는 방법을 터득해 나간다. 어른이 된다는 건 자기 삶을 스스로 감당하고 책임져 나간다는 의미라는 것을.
극복해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만의 방식으로 슬퍼하고 살아간다는 것을.
(24) 건축중인 건물을 보고 있으니 모든 사물에는 운명이 바뀌는 한순간이 있는 게 분명했다. 매립지가 바다에서 육지로 바뀌던 그 경계에는 흙을 한 트럭 쏟아붓는 것과 같은 결정적 행위가 있었을 것이다. 영원히 말라갈 듯하던 매립지에 건물이 들어설 때도 측량이라는 최초의 행위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 생에도 많은 것을 달라지게 하는 한 순간이 있다고 엄마가 말해 주었다.
(69) 예전부터 늘 그것이 궁금했다. 유관순 언니가 독립만세를 부르다 옥에 갇혔을 때, 한석봉이 홀로 산에 들어가 붓글씨 쓰기에 전념했을 때 그들은 내 또래였다. 오성과 한음이 신의있는 우정을 나누었을 때 그들은 나보다 어렸다. 위인전을 보면 그들은 용맹스럽고 지혜로웠다. 위험하고 어려운 일과 맞닥뜨려도 굳은 신념과 자발적인 의지로 정의를 실천했다. 나는 언젠가 위인전 속 인물을 만나면 꼭 한번 물어보고 싶었다. 진짜로 그 어린 나이에도 자기가 하는 행동이 확신이 있었는지, 겁나거나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지.
(137) 이제 나는 어쩌면 엄마 아빠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엄마가 잃은 강아지나 아빠가 잃은 바다도 손쓸 틈 없는 상실이었을 것이다. 아빠에게 바다를 잃는다는 것은 다만 거대한 푸른물과 그 속에 사는 생명체들을 잃는다는 뜻만이 아니었다. 몸에 와닿는 파도의 감촉, 입 안으로 들어오는 짜고 비린 맛, 손가락 사이에서 살강거리는 모래알 소리...... 그런 모든 감각을 빼앗긴다는 뜻이었다. 오감과 기억과 삶 일부를 잃는 거였다. 바다에서 올라오는 신비한 이야기까지.
(144) 나는 이제 한가지 사실을 알 것 같았다. 사람들은 소중한 것을 잃을 때마다 마음이 꼬이고 날카로워지는 것 같았다. 어른들이 저마다 이상해 보이는 이유도 그들을 잃어버린 것들 때문인 듯했다. 상실과 이상함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186) "그런 건 모두 니 마음에 달렸을 거다. 신도 천국도 니가 있다고 믿으면 있고 없다고 믿으면 없는 거다. 바다동물도 고래도 마찬가지다."나는 할아머지의 그 말씀도 가슴에 새겨두기로 했다. 무엇이든 내가 있다고 믿으면 있는 거라고.
(256) 나는 이제 어른이 된다는 것의 핵심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나이를 먹고 몸이 커지고, 고래배를 타거나 시집을 가는 것 말고, 엄살, 변명, 핑계, 원망 하지 않는 것 말고 중요한 것이 그것 같았다. 자기 삶에 대한 밑그림이나 이미지를 갖는 것. 그것이 쨍쨍한 황톳길을 땀흘리며 걷는 일이든, 미끄러지는 바위를 한사코 굴려올리는 일이듯, 푸른 하늘에 닿기 위해 발돋움하는 영상이든.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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