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홀(박지리)
- 상황별 청소년 소설 추천/가족과 갈등할 때
- 2013. 2. 4.
예상대로 암울했다. 살인이라는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청소년을 다룬 성장소설이라니.
소설은 처음부터 주인공이 저지른 범죄를 보여주지 않는다. 주인공의 시선으로 그 사건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역순행적으로 보여준다. 마치 영화 <박하사탕>의 타락한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가는 것처럼. 읽으면서 이옥수 작가의 <개 같은 날은 없다>를 떠올렸다. 폭력을 저지른 아버지와 형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주인공과 <맨홀>은 주인공은 닮았으면서도 달랐다.
폭력에 대한 용서와 잊을 수 없는 분노! 이 작품과 이옥수 작가의 작품을 함께 읽으면서 토론을 해도 좋을 것 같다. 과연 폭력은 쉽게 치유되고 아물 수 있는 것인가? 그런데 작품을 읽다보니 <맨홀>의 주인공 편에 손을 들고 싶었다. 폭력은 그렇게 재생산되는 것이라고, 용서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고. 어머니와 누나, 여자친구, 또는 친구들 어디에도 기댈 수 없었던 주인공이 머물던 ‘맨홀’은 상처이고, 위안이며, 마지막 안식처였을 것이다. 그래서 참담하다.
폭력의 상처로 마음이 피투성이가 된 이들이, ‘맨홀’이 아닌 진정한 안식처를 부디 찾을 수 있기를. 이 사회가, 사람들이 부디 서로를 따뜻하게 보듬어 주기를 기원하며 책을 덮었다.
생각할 거리도 많고 이야기 나눌 거리도 많지만, 소재나 상황이 학교에서 나누기에는 부담스러운 부분이 많다.
-인상 깊은 구절-
(66) 친척들조차도 폭력의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앞집 사람들과는 일부러 눈도 마주치지 않고 다녔다. 집 밖에서의 위장, 그것은 누나의 연극과는 완전히 종류가 달랐다. 그건 자신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가식이었고 누나와 나를 골탕 먹이는 또 다른 학대였다. 누나가 제발 이혼하라고 울며불며 애원했을 때도 엄마는 이혼하지 못하는 이유를 우리에게 떠넘겼다. 우리는 매일매일 죽고 싶을 만큼 불행했는데 정작 엄마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이혼하지 못한다는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누나는 그 사람만큼이나, 아니 그 사람보다 훨씬 더 엄마를 혐오했다.
✎ 폭력을 당하는 사람이 무기력하기 때문에 반복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피해자의 자녀 입장에서 본 어머니의 모습은 답답할 정도로 무기력했다. 무엇보다 자녀들 때문에 계속된 폭력을 묵인하겠다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을 비춰졌다. 그래서 주인공이 더욱 불쌍했다.
(157~158)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소방관인 그 사람이 가스 선에 라이터를 갖다 대며 집을 폭파시켜 버리겠다고 협박하는 그런 때가 아니라 결국 언젠가는 늙어 버릴 그가 어느 날 나에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짧은 편지를 써서 내 손에 쥐여 주는 순간이라는 걸. 언젠가 늦은 밤에 하는 텔레비전 고발 프로그램에서 어린 아들을 학대했던 아버지가 다 늙어서 아들과 화해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늙고 못생긴 그 남자는 연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한때 아들에게 큰 실수를 했다고 고백했다. ……실수?
하지만 사과를 하겠다는 사람이 뭐 하나 제대로 기억하는 게 없었다. 아들이 ‘이랬었죠, 저랬었죠’ 고통스럽게 얘기하면 머리를 갸웃거리며 ‘내가 그랬었나’ 하는 수준이었다.
나는 구역질이 나왔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정신과 의사, 상담사들도 죄다 머저리였다. 그 사람들은 위로를 해 주는 척하면서 그의 아버지 역시 어쩔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그가 학대를 하는 동안 그 자신도 학대당하고 있었음을, 그 역시 아버지로부터 폭력을 당한 피해자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아들을 협박했다. 그들은 아버지에게 두들려 맞는 엄마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범 가정에서 자라난 행운아들이 분명했다. 그런데 가장 이상한 건 그 아들이었다. 아들은 그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들으면서 눈물을 질질 흘리는 것이었다. 나는 저거 병신 아니야, 라고 중얼거렸다.
✎ 폭력에 대한 상처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 특별한 폭력에 대한 기억이 없는 나조차도 주인공의 생각에 동의한다. 먼 훗날 단순한 사과의 말로 잊힐 수 없을 것이다. 과연 어떻게 그들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인가?
(159~160) 그런데 죽음이란 게 그 모든 기억과 증오를 다 앗아 갈 정도로 힘이 세다니, 나는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내 몸, 지난 시간을 기억하고 있는 내 세포 하나하나가 그 말도 아 되는 이론에 저항하고 있었다. 나에게 그 사람의 죽음이란 그저 일찍 죽고 늦게 죽고의 차이일 분이었다. 아침이 오기 전ㅇ, 나는 누구에게든 물어보고 싶었다.
왜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 이토록 노력해야 하는 건지, 정작 그 사람은 우리 누구에게도 미안하다는, 그 짧은 사과의 말도 한 적이 없고, 세상의 영웅이 되어 죽었으니 이제 와서 우리의 용서 따위는 필요로 하지도 않을 텐데. 왜 피해자인 우리가 그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 이렇게 애를 쓰고 서로 싸우고 눈물을 흘려야 하는 건지.
용서를 하고 나면 내 마음이 가장 편안해질 거라고?
그따위 속임수는 쓰지 마. 누가 편안해지고 싶대? 누가 그딴 걸로 행복해지고 싶다 했냐고. 자기 상처를 판 대가로 행복을 얻는 거라면 차라리 불행한 게 훨씬 양심적인 거 아니야?
그러나 어둠은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고 나는 아주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했다.
……아무 슬픔도 느끼지 않는 내가, 용서의 마음이 손톱만큼도 자라지 않는 내가 정말 잘못된 인간일까?
✎우리나라는 죽음에 너무도 관대하다. 그 사람이 어떤 과거행적을 지녔건 간에 죽음을 맞는 순간 좋은 일만 기억하려 한다. 그리고 쉽게 용서한다. 그렇기에 독재자의 딸이 한 마디 사과도 없이 저리도 뻔뻔하게 대선후보로 나오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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