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홀(박지리)

 

예상대로 암울했다. 살인이라는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청소년을 다룬 성장소설이라니.

 

소설은 처음부터 주인공이 저지른 범죄를 보여주지 않는다. 주인공의 시선으로 그 사건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역순행적으로 보여준다. 마치 영화 <박하사탕>의 타락한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가는 것처럼. 읽으면서 이옥수 작가의 <개 같은 날은 없다>를 떠올렸다. 폭력을 저지른 아버지와 형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주인공과 <맨홀>은 주인공은 닮았으면서도 달랐다.

 

폭력에 대한 용서와 잊을 수 없는 분노! 이 작품과 이옥수 작가의 작품을 함께 읽으면서 토론을 해도 좋을 것 같다. 과연 폭력은 쉽게 치유되고 아물 수 있는 것인가? 그런데 작품을 읽다보니 <맨홀>의 주인공 편에 손을 들고 싶었다. 폭력은 그렇게 재생산되는 것이라고, 용서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고. 어머니와 누나, 여자친구, 또는 친구들 어디에도 기댈 수 없었던 주인공이 머물던 맨홀은 상처이고, 위안이며, 마지막 안식처였을 것이다. 그래서 참담하다.
폭력의 상처로 마음이 피투성이가 된 이들이, ‘맨홀이 아닌 진정한 안식처를 부디 찾을 수 있기를. 이 사회가, 사람들이 부디 서로를 따뜻하게 보듬어 주기를 기원하며 책을 덮었다.

생각할 거리도 많고 이야기 나눌 거리도 많지만, 소재나 상황이 학교에서 나누기에는 부담스러운 부분이 많다.

 

-인상 깊은 구절-

(66) 친척들조차도 폭력의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앞집 사람들과는 일부러 눈도 마주치지 않고 다녔다. 집 밖에서의 위장, 그것은 누나의 연극과는 완전히 종류가 달랐다. 그건 자신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가식이었고 누나와 나를 골탕 먹이는 또 다른 학대였다. 누나가 제발 이혼하라고 울며불며 애원했을 때도 엄마는 이혼하지 못하는 이유를 우리에게 떠넘겼다. 우리는 매일매일 죽고 싶을 만큼 불행했는데 정작 엄마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이혼하지 못한다는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누나는 그 사람만큼이나, 아니 그 사람보다 훨씬 더 엄마를 혐오했다.

✎ 폭력을 당하는 사람이 무기력하기 때문에 반복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피해자의 자녀 입장에서 본 어머니의 모습은 답답할 정도로 무기력했다. 무엇보다 자녀들 때문에 계속된 폭력을 묵인하겠다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을 비춰졌다. 그래서 주인공이 더욱 불쌍했다.

 

(157~158)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소방관인 그 사람이 가스 선에 라이터를 갖다 대며 집을 폭파시켜 버리겠다고 협박하는 그런 때가 아니라 결국 언젠가는 늙어 버릴 그가 어느 날 나에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짧은 편지를 써서 내 손에 쥐여 주는 순간이라는 걸. 언젠가 늦은 밤에 하는 텔레비전 고발 프로그램에서 어린 아들을 학대했던 아버지가 다 늙어서 아들과 화해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늙고 못생긴 그 남자는 연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한때 아들에게 큰 실수를 했다고 고백했다. ……실수?
하지만 사과를 하겠다는 사람이 뭐 하나 제대로 기억하는 게 없었다. 아들이 이랬었죠, 저랬었죠고통스럽게 얘기하면 머리를 갸웃거리며 내가 그랬었나하는 수준이었다.
나는 구역질이 나왔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정신과 의사, 상담사들도 죄다 머저리였다. 그 사람들은 위로를 해 주는 척하면서 그의 아버지 역시 어쩔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그가 학대를 하는 동안 그 자신도 학대당하고 있었음을, 그 역시 아버지로부터 폭력을 당한 피해자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아들을 협박했다. 그들은 아버지에게 두들려 맞는 엄마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범 가정에서 자라난 행운아들이 분명했다. 그런데 가장 이상한 건 그 아들이었다. 아들은 그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들으면서 눈물을 질질 흘리는 것이었다. 나는 저거 병신 아니야, 라고 중얼거렸다.

✎ 폭력에 대한 상처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 특별한 폭력에 대한 기억이 없는 나조차도 주인공의 생각에 동의한다. 먼 훗날 단순한 사과의 말로 잊힐 수 없을 것이다. 과연 어떻게 그들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인가?

 

(159~160) 그런데 죽음이란 게 그 모든 기억과 증오를 다 앗아 갈 정도로 힘이 세다니, 나는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내 몸, 지난 시간을 기억하고 있는 내 세포 하나하나가 그 말도 아 되는 이론에 저항하고 있었다. 나에게 그 사람의 죽음이란 그저 일찍 죽고 늦게 죽고의 차이일 분이었다. 아침이 오기 전, 나는 누구에게든 물어보고 싶었다.
왜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 이토록 노력해야 하는 건지, 정작 그 사람은 우리 누구에게도 미안하다는, 그 짧은 사과의 말도 한 적이 없고, 세상의 영웅이 되어 죽었으니 이제 와서 우리의 용서 따위는 필요로 하지도 않을 텐데. 왜 피해자인 우리가 그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 이렇게 애를 쓰고 서로 싸우고 눈물을 흘려야 하는 건지.
용서를 하고 나면 내 마음이 가장 편안해질 거라고?
그따위 속임수는 쓰지 마. 누가 편안해지고 싶대? 누가 그딴 걸로 행복해지고 싶다 했냐고. 자기 상처를 판 대가로 행복을 얻는 거라면 차라리 불행한 게 훨씬 양심적인 거 아니야?
그러나 어둠은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고 나는 아주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했다.
……아무 슬픔도 느끼지 않는 내가, 용서의 마음이 손톱만큼도 자라지 않는 내가 정말 잘못된 인간일까?

우리나라는 죽음에 너무도 관대하다. 그 사람이 어떤 과거행적을 지녔건 간에 죽음을 맞는 순간 좋은 일만 기억하려 한다. 그리고 쉽게 용서한다. 그렇기에 독재자의 딸이 한 마디 사과도 없이 저리도 뻔뻔하게 대선후보로 나오는 것이겠지

 

맨홀
국내도서
저자 : 박지리
출판 : 사계절 2012.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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