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이 빛나는 순간(이금이)

 

1. 표지는 작가의 따님이 그린 것 같다. <우리반 인터넷 소설가>의 표지처럼 선명하고 색채가 강렬하다. 서로 다른 환경의 지오와 석주가 겪는 청춘의 방황기인데,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을법한 이야기 같아 몰입이 잘 되었다.

대학생이 된 두 사람이(별로 친하지 않은데), 추풍령역에서 만나기로 하면서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며 그려지는 성장담이 인상적이었다. 지금 읽고 있는 부분은 모범생인 석주가 자신과 관계를 맺었던 은설이 임신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충격받아 영동으로 찾아가는 장면이다.
다음 장면이 매우 궁금하다.

 

2. 작가의 필력은 놀라웠다. 끝에서 가슴 시원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유부단한 마마보이, 모범생 석주가 한 여자의 남편으로, 한 아이의 아버지로 건강하게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지오가 석주를 만난 추풍령역은 은월농장에서 매우 가까운 곳이었고, 추풍령 역까지 가는 동안 지오도 엄마를 용서, 아니 이해를 하는 과정을 거친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은 지오와 석주의 과거를 번갈아 비쳐주며, 기차여행에 대한 환상을 갖게 했다.
그리고 제목 '얼음이 빛나는 순간'에 대한 의미도 알게 되었다. “빛나지는 못하더라고 고이지는 말자. 그렇게 선택하며 현재를 아름답게 살아가자.” 
지오처럼, 석주처럼, 은설처럼 건강한 아이들로 우리 아이들이 자랐으면 하는 바람으로 책을 덮었다. 꽃샘추위로 몹시 살벌한 주말이었지만, 책 한 권 덕에 봄이 가까워진 듯하다.^^

 

3. 석주와 지오처럼 우연처럼 찾아온 여행, 인생의 큰 변곡점! 생을 바꿔버린 아름다운 만남! 우리 아이들에게는 어떻게 그런 귀한 만남을 가지게 할 수 있을까?

 

<인상 깊은 구절>

34 갑자기 엉망인 성적표로 남은 지난 1년이 허망하게 여겨졌다. 지오는 대학에 들어오면서 아예 길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어쩌면 대학 합격이 인생 최대의 목표였고 그 이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지오가 보기에 부초 같기는 같은 과 신입생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나같이 운이 나쁘거나 실수해서 왔다는 아이들은 학교에 뿌리 내릴 생각 대신 반수나 편입으로 학벌 세탁할 생각들만 하고 있었다. 성공률이 희박한 목표나 꿈은 자기 위안에 불과할 뿐이다. 시작부터 열패감에 잠겨 시작하는 아이들에 비하면 지오는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합격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는 터였다. 

✎ 이 부분을 읽으면서 엄기호의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가 떠올랐다. 대학 합격을 인생 최대의 목표로 두고 공부하는 우리 아이들은 대학 입학부터 학벌에 따라 자연스럽게 서열과 계급이 정해지고, 초등학교 때부터 이어져 오던 열패감이 완전히 고착이 된다는 무서운 현실! 그 속에서 지오와 같은 아이들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37 그는 누군가 자신에게 비밀을 털어놓는 게 부담스러웠다. 비밀의 무게만큼 상대에 대한 마음을 비워 놓아야 하는 게 싫었다.

✎ 같은 이유는 아니지만 남과 비밀을 공유하는 것이 부담스럽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에 대한 책임감 등 오히려 부과되는 게 많기 때문이다.

 

79 여자들은 진실한 사람보다 거짓이라도 원하는 걸 해 주는 사람을 더 좋아하는 모양이다. 단 거짓인 걸 모르게 해야 한다. 그게 어렵다.

✎ 진실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다. 뒤에 은설이 보여주는 모습은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99-100 아버지는 친구조차도 전략적으로 사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게 성공의 비결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빈한한 가문에서 홀로 성공한 아버지가 온갖 열등감을 극복하고 난 뒤에도 남은 결핍은 그들만의 리그를 지닌 자들의 생래적인 여유였다. 아버지는 당사자들의 능력보다-그건 이미 자신도 소유했으므로-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자신은 죽어도 발을 디딜 수 없는 리그를 더 부러워했다. 아버지가 무리해서 지오와 지윤을 조기유학 보낸 것도 그래서였다. 이란성 쌍둥이인 지오와 지윤이 열세 살 때였다. 지윤은 캐나다의 명문 대학에 입학해서 잘난 사람들과 동문이 됐으니 성공한 셈이다. 아버지에게는 오랜 이별 탓에 딸과의 사이가 데면데면해지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딸이 명문대라는 ‘리그’에 입성했다는 게 중요했다.

✎ 대한민국의 높은 교육열의 궁극적인 원인! 자녀들이 부모들이 갖지 못한 결핍을 대신 충족시켜 주기를 바라는 마음! 

 

102 지오 생각에는 군대가 남자들의 철을 늦게 들게 하는 원흉이었다. 군대에서 보내는 2년을 생산적인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남자애들은 없었다. 대학 입시라는 형기를 이제 겨우 마쳤는데 다시 더한 감옥에서 썩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미칠 것처럼 억울해져 놀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군대라는 게 없어지면 남자애들도 여학생들처럼 1학년 때부터 열심히 학점 관리하고 스펙을 쌓으려 들 것이다.
군대를 생각하면 한없이 마음이 박해져 군대 갈 걱정 없는 여자애들까지 얄미워졌다. 올림픽 같은 대회에서 메달 딴 남자 선수들이 병역 혜택 받는 것을 두고 해수는 여자 선수들한테도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 줘야 한다고 핏대를 올렸다. 그대 지오는 해수를 한 대 칠 뻔했다.

✎ 군대에 대한 남자들의 생각이 이럴 수 있구나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군대가 철들게 한다는 말보다, 오히려 남자들이 철드는 것을 늦춘다는 대목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131 자퇴에 대한 인식이 예전과 많이 달라진 점도 도움이 됐다. 아빠는 지오의 자퇴를 낙오가 아니라 성공의 지름길로 가기 위한 자발적 일탈로 받아들였다.

✎ 자퇴라는 것이 여러 가지 시각에서 달리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원래부터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일반적으로 자퇴는 중도포기, 탈락, 선수권 박탈을 의미하였으나 이제는 성공을 위한 단기 코스 전략 수정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것! 작가는 이걸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229 석주에겐 아기에 대한 은설과 같은 본능적인 애정이 없었다. 다만 한 생명이 이런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대접을 하는 이가 다른 사람도 아닌, 목숨과 맞바꿀 결심까지 하며 자신을 세상에 내놓은 엄마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만일 좀 더 읽찍 은설의 임신 사실을 알았다면 엄마는 진짜 막장 드라마처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뱃속의 아이를 없앴을 것 같았다.

✎ 한 생명이 이런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지극히 기본적인 석주의 양심! 가장 기본적인 생각임에도 실천으로 옮기기기는 무척이나 힘들다. 현실이 너무나도 가혹하기 때문이다. 석주 엄마의 선택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석주나 석주엄마가 모두 이해가 된다.

 

259 엄마는 지오를 버린 게 아니었다. 엄마는 인간으로 사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 엄마가 죽을힘을 다했다는 것을 지오는 인정해야만 했다.

✎ 이 대목을 보고 기차여행이 갑자기 하고 싶어졌다. 다른 교통기관과 다른 여유와 사색, 관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단 몇 시간이지만 지오의 여행과 사색, 통찰은 기차여행이기에 가능한 것처럼 생각된다.

 

282 어른이 된다는 건 살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목록’보다 ‘그럴 수도 있지 목록’이 더 늘어나는 일인지도 모른다.

✎ 옳다! 공감 100배다.

 

303 “물가에 있어 보마 깨진 얼음장이 흘러가다 반짝 하고 빛나는 순간이 있제. 돌에 걸리거나 수면이 갑자기 낮아져가 얼음장이 곧추설 땐 기라. 그때 햇빛이 반사돼가 빛나는 긴데 그 빛이 을매나 이쁜지 모린다. 얼음장이 그런 빛을 낼라 카믄 일단 깨져야 하고 돌부리나 굴곡진 길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는 기라. 사람 사는 일도 마찬가지지 싶다. 인생은 우연으로 시작해서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것 아니겄나. 사는 기 평탄할 때는 그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보마 그제사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기다.”
말을 마친 아저씨는 열무 줄기에서 연두색 벌레를 잡아 원두막 밖으로 던졌다. 벌써 몇 마리째다. 열무 잎에는 벌레가 갉아 먹은 자국인 듯 작은 구멍들이 나 있었다.

✎ ‘빛을 내려면 일단 깨져야 하고, 굴곡진 길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사는 것이 평탄할 때 어떤 선택을 하는 지를 보고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아저씨의 말씀이 가슴에 묵직하게 남는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나? 빛이 나지는 않더라고 고이는 물은 되지 말아야지. 석주의 건강한 선택과 아저씨의 작은 애벌레도 생명으로 여기는 모습이 겹쳐져 매우 감동적인 대목이었다.

 

305-306 그전에 난 항상 먼 미래만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아. 근데 여기선 그럴 수가 없어. 나무들은 필요한 걸 제때에 해 주지 않으면 안 되거든. 수아랑 비슷하다. 수아는 어른들이 어떤 상황이든 저 하고 싶은 걸 해야 돼. 그렇지 않으면, 너도 떼쓰는 거 봤지? 휴, 걔 아무도 못 당한다. 처음엔 너무 버릇 없는 거 같아서 걱정되는 거야.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그때그때 저한테 필요한 걸 원하는 거더라구. 나무가 자라려면 필요한게 있듯이 그 애도 자기가 잘 자라기 위해서 필요한 게 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아. 나무가 수아 같다고 생각하니까 일하는 게 나름 재밌어.

✎ 책을 읽는 내내 아이같은 석주의 우유부단함에 실망했는데, 이건 10년 부모인 나도 깨닫지 못하는 걸 석주가 알고 있다는 것이 매우 놀라웠다. 맞다, 그때 필요한 걸 아이들에게 해줘야 한다. 물론 다 해줄 수는 없지만,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놓치지 않는 부모가 돼야겠다. 그리고 그런 교사가 돼야겠다. 그런데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도 나무를 키워봐야 하나?

 

얼음이 빛나는 순간
국내도서
저자 : 이금이
출판 : 푸른책들 2013.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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