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빨강(김선희)

‘사고로 일곱 살이 되어 버린 아버지, 야동, 몽정, 자위, 매운 맛’ 등 상당히 자극적인 소재를 배치했음에도 나는 조금 싱겁게 읽었다. 이런 자극적인 인생의 양념들이 스스로 성장하는 건강한 캐릭터라는 중심 줄기와 섞이면서 짜지도 맵지도 싱겁지도 않은 삼삼한 맛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스스로 성장하는 건강한 캐릭터라면, 일단 처절한 외로움 속에 몽정과 자위를 하는 주인공 길동, 아픈 과거를 매운 맛으로 잊으려 하는 미령, 새로운 사랑을 찾아간 희우, 그리고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가정에서도 긍정적으로 성장하는 마파두부와 고추조아를 가리킨다. 

 

일곱 살짜리 지능을 가진 아버지와 재개발 보상금을 주식으로 날려버리고 도망간 형, 끊임없이 닭을 튀겨야 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함께 나눈 즐거움이나 행복보다는 함께 나눈 고통이 더 많았지만 마지막까지 가족을 생각하며 좋아하는 미령이를 챙기는 길동을 보면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우리 아이들도 살면서 무수히 많은 외로움의 순간을 직면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자위든 몽정이이든,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표출될 때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주인공들과 함께 성장했으면 좋겠다. 매운 맛을 이해하고, 야동을 졸업하며, 현실에 놓인 어려움과 힘든 가족을 감싸 안는 그런 길동이처럼!

 

문제는 아직도 성장통을 겪고 있는 형이다. 어찌 보면 무한 긍정적인 길동보다 더 현실적인 캐릭터이기도 하다. 김인해의 <우리들의 사춘기> 중 ‘몰락’에 나오는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다 사고사를 당한 형의 모습과 비교해 볼만 하다. 두 사람 모두 이 시대 대학생 혹은 대학 졸업생들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문체는 매우 가볍다. 소재도 아이들이 매우 좋아할만 하다. 문학적이지는 않더라도 실존적 고민을 던져주는 소설이기에 아이들에게 적극 권하고 싶다.

 

<인상 깊은 구절>

(73) 순결을 지키는 것도 좋지만 굳이 목숨 걸고 지킬 필요까지는 없어. 섹스는 성인 남녀 사이의 사랑을 확인하고 추구하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이거든. 섹스는 사랑하는 사람과 몸으로 하는 대화야. 즉 사랑하는 마음을 몸으로 표현하는 거지. 사랑한다면 서로를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아끼고 존중해줘야 해. 서로의 몸을 존중해 주다 보면, 서로의 관계에서도 배려해 주고 존중하는 마음이 절로 생기거든. 부디 아름다운 사랑을 하기 바란다.
선생님의 마지막 말이 ‘부디 아름다운 섹스를 하기 바란다’로 들린 건 나뿐이었을까?

(76)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좁은 방 안을 왔다 갔다 했다. 몸 중심에서 직각으로 서 있는 내 존재가 민망해서 안 보려고 했지만, 내 눈은 자꾸만 몸 중심축으로 쏠렸다. 마치 내 몸이 중심에서 그렇게 뻣뻣하게 서 있지 않으면 내 몸이 모래처럼 무너져 내리기라도 할 것처럼, 마치 거대한 우주의 중심을 잡고 있기라도 하듯 꼿꼿하게 직각으로 뻗어 무게 중심을 잡고 있다.

(92) 내가 아는 가장 먼 미래? 나도 모르겠다. 우리 집은 이제 머지않아 재건축으로 헐릴 거다. 아마 올해 말이나 내년 초쯤? 아버지는 영원히 일곱 살일 거고 나는 언제까지 그런 아버지를 책임져야 할지 모르겠다. 형이 과연 정규직으로 취직될지, 엄마는 언제까지 닭을 튀길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내가 내 미리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내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뿐이다.

(119) 처음에는 혀가 아팠다가, 나중에는 온몸이 아팠다가, 결국에는 마음이 아팠다. 온몸의 아픔이란 아픔은 죄다 훑어 낸 눈물이 줄줄 흐르고 나서야 이상하게 몸이 개운해졌다. 몸이 가벼워지면서 속도 후련해졌다. 마치 몸속에 있던 나쁜 불순물들이 쏙 빠져나가고, 순도 100퍼센트의 알맹이만 남은 기분이었다.
갑자기 미령의 얼굴이 떠올랐다. 보고 싶다, 오미령. 정말 아주 많이.

(124) 희우에게 사랑이란 한 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 같은 거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사랑은..... 슬프지만 아름답고, 괴롭지만 소중하고, 그리고 버려도 다시 쓸 수 있는 재활용품 같은 거.

(128)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처럼 죽어야 할 이유도 있을 것이다. 겉으로 봐서는 모른다. 아무리 집안이 화목하고, 공부를 잘하고, 얼굴이 예쁘거나 잘 생겼어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은 있다. 그런 사람은 살아야 할 이유보다 죽어야 할 이유가 더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내가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건, 죽어야 할 이유보다 살아야 할 이유가 훨신 많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첫 경험도 안 했다. 첫 경험은커녕 첫 키스도 못 해 봤다. 대학에도 안 가봤고, 내 손으로 돈도 한 푼 못 벌어 봤다. 결혼도 안 해 봤고, 애도 안 낳아 봤다.
아니 무엇보다 죽을 만한 이유가 아직 없다. 아버지가 일곱 살짜리가 됐어도, 형이 직장을 못 얻고 점점 난폭해져도, 엄마의 한숨 소리가 깊어 가도, 내 미래가 먹물처럼 새카매도, 그래도 그게 죽을 만한 이유는 될 수 없다.

(150) 생각해 보면, 아버지와의 기억이 없는 건 아니다. 단지 기억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뿐. 조각난 기억들이 하나하나 제 짝을 찾아 떠오른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지금 아버지 몸에 붙어 있는 이 비누 거품처럼 풍성하고 부드럽다.

(187) 식구들 생각이 났다. 일곱 살이 되어 버린 아버지, 떠나 버린 형, 지난한 삶의 현장 속으로 다시 뛰어든 엄마. 우리는 이제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겠지만, 그전보다는 다른 형태의 결속으로 맺어질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우리는 별로 행복해 본 적이 없는 가족이고, 함께 나눈 즐거움이나 행복보다는 함께 나눈 고통이 더 많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단단해진 가족 공동체가 되지 않을까, 하는 확신.
문득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이런 적, 처음이다.

 

더 빨강
국내도서
저자 : 김선희
출판 : 사계절 2013.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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