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큼하진 않지만(김학찬, 문학동네)

 

평범한 학생의, 평범한 일상과, 성장이 아닌 평범한 변화를 읽었다. 드라마틱한 설정은 없었지만, 주인공의 일상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나도 조금은 변화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특히 ‘청소년 성장 소설’에 대한 생각이. 

 

작가는 주인공과 작은누나의 입을 빌어 성장소설이 가진 한계와 폭력성을 지적한다. 결국 ‘개천에서 용나는 이야기’만 가득하고, 현실에서는 ‘모두가 자라는 것이 아닌데’, 그런 극적인 성장담에 거짓 위로를 받는다고. 그래서 작가는 작정하고 이 소설을 쓴 것 같다. ‘성장’이 아닌 ‘변화’에 방점을 두면서. 

 

컴퓨터 게임을 좋아하지만 친구 영현이처럼 프로게이머가 될 생각은 없고, 성적은 딱 중간에, 별거 중인 부모님과 이혼한 큰누나, 과거 엄친딸이었지만 박사과정에서 진로를 수정한 작은누나, 그리고 애완견 삼식이와 함께 사는 딱 전형적인 한국 중산층 가정의 모습이다. 

 

이들의 어딘지 결핍돼 보이는 삶들이 함께 모아지면서 모두 조금씩 변화(성장이 아닌)한다. 과외샘 혹은 짝사랑하는 효주 혹은 프로게이머의 세계에 진짜 몸을 담게 된 영현이 때문일지는 모르겠으나 몇 개월 간 공부에 몰입하는 경험을 하고, 진로와 미래를 조금씩 구체적으로 그려나가고 홀로서기를 배워가는 주인공이 변화의 중심에 있다. 그리고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 별거중인 어머니와 아버지는 각각 러시아어를 배우고, 커피전문점을 열면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이혼한 큰누나는 다시 그 매형과 재혼을 하고, 공부만 알던 작은누나는 과외샘과 목하 열애중. 

 

이렇듯 작은 변화들이 모여 상큼하진 않지만, 가슴 어딘가에 따뜻한 기운이 조금씩 퍼져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흔하고 평범하더라도 몰입할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찾아가는 것이 자아 발견이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며 기분 좋게 새해 첫 독서를 마쳤다. 

 

<인상 깊은 구절>

20 종이 울렸다. 쉬는 시간 십 분은 늘 너무 짧다. 점심시간 한 시간도 짧기는 마찬가지다. 이야기가 막 열이 오를 만하면 종이 치고, 축구가 한참 재미있을 만하면 종이 치고, 만화책에 중요한 장면이 나오면 항상 종이 친다. ‘재미있는 학교 만들기’라며 이것저것 학생들만 피곤하게 하지 말고 쉬는 시간이나 오 분 늘려 주면 학교 다닐 맛이 날 텐데.

✎ 시시껄렁하지만 평소 생각과 맞는 구절을 만나면 정신이 확 깬다. 항상 재미있을 때 치는 학교종은 마법의 종?

 

28~29 영현이가 프로게이머를 지망한다고 했을 때 나는 속으로 웃었다. 어른들은 우리가 단순히 프로게이머에 열광한다고 생각하겠지. 어른들의 생각과 달리 우리도 프로게이머에 대해 마냥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직접 게임을 하고 중계방송을 보기 때문에 프로게이머가 얼마나 힘들고 위태로운 직업인지 잘 안다. 게임 중에서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이 있는 경우는 얼마 없다. 새로운 게임 대회가 열리더라도 보통 한두 번 이벤트로 그치고 만다. 꾸준히 열리는 게임 대회는 많지 않다. 그래서 폐인이 프로가 되지만, 대부분 폐인에서 끝난다.

당장 프로게이머가 되는 것도 아니다. 연습생으로 시작해 숱한 게임을 하고 커리어를 쌓아야 프로게이머가 된다. 그런데 프로게이머 중에서 사람들의 인기를 얻고 돈을 버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꾸준히 장수하는 프로게이머는 많지 않다. 길어도 일이 년이고 짧게는 한두 달 반짝하다가 사라진다. 새로운 게임이 대세가 되면 다시 그 게임을 익혀야 한다. 차라리 공부를 하지……. 전교에서 공부로 노는 애들은 프로공부머인지도 모른다.

✎ 아이들 진로 희망 중에서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을 심심치 않게 본다. 보나마나 밤새 게임하는 폐인인 경우가 많다. 단순히 가망 없다고 혀만 찼는데, 주인공의 말을 듣고 보니 얼마나 그 세계가 좁은지, 프로게이머가 될 가능성이 희박한지를 알게 되었다. 이 구절, 그 아이들에게도 보여주고 싶다.

 

46 모의고사를 보고 난 후 한동안 불을 끄고 나면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사물들이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보니 컴퓨터는 나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다. 컴퓨터가 인공지능이 아닌 게 다행이다. 엄마 아빠 없이는 살아도 컴퓨터 없이는 못 산다.

✎ 마지막 대목이 가슴을 찌른다. 엄마로서, 교사로서.

 

55~56 그런데 이제 그런 영웅은 식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은근히 영웅을 바란단 말야. 뻔한 건 싫다고 하면서도 영웅이 없는 건 또 싫어하지. 어떻게 이걸 해결하느냐? 마음대로 살아도 괜찮다. 이것 봐라, 그래도 성공할 수 있다는 미담을 만드는 거지. 하나하나 뜯어보면 슈퍼맨과 다를 게 없는데 마치 평범한 학생들의 이야기인 것처럼 보여주는 거야.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자신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위로를 받지. 근데 그게 진짜 위로가 될가?

✎ 성장소설의 함정을 작은 누나가 열변을 토하며 주인공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인 것 같다. 그래서 우리의 주인공, 참 끝까지 평범하게 끝난다. 

 

75 대부분 고등학생들에게 컴퓨터는 공부를 빙자한 게임용이며, 친목용이며, 시간 때우기용이다. 인터넷 강의는 고등학생들에게 컴퓨터 사용의 합법화를 가져왔을 분이다. 엄마는 지금 내가 인터넷 강의를 듣고 있는 줄 알고 있다.

✎ 인터넷 강의, 그리고 학원 교육의 함정. 이것만 보내면 아이들이 다 공부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대한민국 부모들의 허상.

 

100 평생 읽을 책을 이번 방학 때 읽은 것 같다. 평범한 사람이 등장하는 평범한 소설은 없었다. 적어도 추천도서에는 없었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것은 힘들다면서 책 속에는 용들만 바글바글했다. 개룡남. 아니 개구리 왕자들의 수기를 읽고 그들이 대단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죄책감마저 들었다. 내가 찾는 길이 용이 되는 건 아닐 텐데, 용이 되어야만 했다.

어려운 사람들 이야기만 바글바글한 책들도 마찬가지다. 불쌍한 사람들을 보고 그래도 나는 이 사람들보다 괜찮구나 하면서 억지 위로라도 받으란 말인가.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는 없다. 책 속에서 뛰어난 사람과 불쌍한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책에서 그럴듯한 사례는 여럿 볼 수 있었지만 해답은 없었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건 거짓말인가 보다.

✎ 역시 작가의 생각과 주제 의식이 엿보이는 대목. 개룡남들만 가득한 성장소설 세계에서 무언가 다른 모델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생각들이 가득한 것 같았다.

 

109 니가 계속 고민하는 문제, 장래 희망이 없다는 문제가 전형적인 사례다. 그리고 가장 심각한 문제다. 장래에 무엇이 된다는 건 너무나 막연하고 추상적인 개념이다. 장래 희망에 대해 꽤 뚜렷한 생각이 있는 아이들도 막상 그 직업이 하는 일을 한 시간도 상상하지 못한다. 진로를 구체화시킬 필요가 있다. 과외를 할 때마다 학생들에게 하는 말이다만 대부분 진로를 구체화하지 못하고 그냥 공부만 한다. 진로를 정하고 공부를 하는 것과 몇 등 안에 들겠다고 공부를 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몇 등 안에 드는 목표를 정하는 쪽이 당장에는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은 결국 진로를 설정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 지당하신 말씀이다. 

 

139 엄마 아빠도 알고 보면 애지. 어른들이 무슨 성인군자야? 니가 이때까지 봐 왔던 어른들이 그렇던? 아니잖아. 사람들은 계속 싸우는 거야. 그러면서 크는 거야. 죽을 때까지 크는 거라고.

✎ 성장이란 말이 청소년에게만 국한되지 않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그래서 뒤로 갈수록 변화하는 엄마, 아빠의 모습, 큰누나, 작은누나의 모습이 자주 나오는 것 같다.

 

157 그래 네 말대로 기껏 복잡한 세상을 담아내려고 소설을 썼는데 그걸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남는 게 별로 없다. 소설에서 말하는 성장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다 자라는 건 아니다.

✎ ‘모두가 다 자라는 건 아니다’ 이 말이 가슴이 남는다.

 

159 젊음은 분명 특권이지만 무작정 젊은 사람은 이래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도 좋은 것은 아니다. 너는 열심히 온갖 힘을 다해 공부하고 있지 않느냐? 몇 달 동안 죽을 만큼 공부에 집중하는 것도 드문 경험이다. 대부분 보름은 고사하고 일주일도 못 넘기고 포기한다. 공부에 미쳐 보는 것도 네 모든 걸 걸어 보는 일이다. 그것이 흔해 빠진 공부라고 해서 의미가 없는 게 아니다. 흔해 빠진 일이지만 막상 그것에 집중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평범한 공부 중에서 네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거니까. 꼭 자아 발견이 독특하고 특이한 것일 이유도 없다.

✎ 흔하고 평범해도 스스로 푹 빠질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바로 자아발견이다라는 과외 선생님의 논리! 나름 인식의 전환이다.

 

170~171 성장은 없다. 있으면 안 되는지 모른다. 변화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다만 변화하는 것이지 자라는 게 아니다. 성장이라는 말 자체가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 작가의 결론.

상큼하진 않지만
국내도서
저자 : 김학찬
출판 : 문학동네 2012.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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