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유록: 조선 선비 일본을 만나다(신유한)


<인상 깊은 구절>

(15) 일찍이 오산 차천로가 독축관으로 뽑혀 갔을 때 일본인으로 글을 아는 자들과 만났는데 차천로가 종횡 분방한 필치로 어찌나 시를 잘 썼던지 명성이 널리 퍼져 그 나라 사람들이 깊이 흠모하였다. 그 뒤 백여 년 동안 통신사가 갈 적마다 반드시 조정에서 글 잘하는 사람을 가려 뽑아 이름을 독축관 겸 제술관이라 하여 문필에 관한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그러다 임술년 사행 때부터 일광산에서 제사하는 일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독축관이라 하지 않고 제술관이이라고만 하였다.근래에는 글에 대한 왜인들의 열의가 더 왕성해져 우리 나라 사행이 들어가면 그 문예를 흠모하여 모여드는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어 ‘학사 대인’이라 부르면서 시를 구한다. 글을 청한다 하여 거리가 꽉 차고 문이 메곤 한다. 그런 까닭으로 그들의 청을 받아 주며 우리 나라의 높은 문화 예술을 빛내는 것이 제술관에게 달렸으니, 그 일이 번다하고도 책임이 중대하다. 또 사신의 막하로서 만 리 험한 파도를 헤치고 건너가 통역을 통해 왜인들 속을 드나들며 사행을 돕는 일이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므로 사람마다 이 일을 마치 칼 끝 피하고 화살 피하듯이 꺼렸다.

✎ 당시 통신사의 제술관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또 얼마나 책임이 막중한 것인지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신유한은 이러한 어려움으로 몇 번 고사했으나, 막중한 책임을 맡게 된다. 일본 사람이나 우리 나라 사람들의 생각을 모두 알 수 있어 길지만 모두 옮겨 보았다.

 

(17)  그대는 ‘작은 산에 松柏이 없다.’ 생각하여 소홀히 하지 말고 곧 천 편 만 수를 풍우처럼 빨리 써내어 제후들이 항우에게 굴복했던 것처럼 다 기가 질려 감동하게 해야지 한 사람만을 굴복시키려고 해서는 안 되네.

✎ 곤륜학사 최창대의 말이 신유한의 조금은 우쭐한 기분했던 기분을 꺾고 현실적인 자세로 돌아가게 하지 않았을까 싶다.

 

(70~71) 이 섬은 조선의 한 주현이나 고을과 같을 뿐이오. 도주가 임명을 받아 국록을 먹으며 크고 작은 정사에 위의 지시 명령을 받는 것이 우리 나라 지방관의 지위와 다를 것이 무엇이오? 당신네 도주는 우리 나라 예조 참의나 동래 부사와 동등한 예로 외교 문서를 주고받으니 그것은 곧 급이 같다는 것이요. 나라법에 조정의 벼슬아치로서 나랏일로 외지에 나가게 되면 그 위계를 불문하고 지방관과 한자리에 앉아 서로 존경하게 되어 있소. 지금 나는 문신으로 저작랑의 직함을 띠고 귀국에 왔소. 내가 사신의 다음 자리에 있으니 도주보다 조금 차이를 두면 그만이 아니겠소. 또 손님과 주인의 예를 동등하게 하기는 곤란하다 하여 도주는 남쪽을 향해 서서 나는 도주 앞에 나가 서로 마주 서서 나는 두 번 읍하고 도주는 한 번 읍한다면 이는 비록 도주에게 치우치는 감이 있더라도 특별히 우리 사신을 생각해서 한 급을 사양하는 의미에서 허용할 수도 있을 것이오. 그러나 끝내 서서 절을 하고 앉아 절을 받는 것으로 예를 삼자고 한다면, 이는 우리 임금이 보낸 사신을 대마도주에게 예를 잃게 할 뿐이라고 생각하오.

✎ 신유한의 이런 강직한 태도는 몇 분의 전교조 선생님들을 생각나게 한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면 분명히 옳은 말이되 누구든 앞장서려 하기 꺼려하는 그런 일들이 있다. 그냥 넘어가면 쉽게 해결될 수 있는데, 이의를 제기하면 누구나 불편해지는. 하지만 반드시 고쳐야 하는. 신유한은 글도 잘 쓸 뿐 아니라 강직하기까지 한 모양이다. 모두 불편해지고 특히 대마도주가 무척 껄끄러웠겠지만, 다음 통신사부터는 그런 전례가 없어졌다고 하니 대단한 고집이 아닐 수 없다.

 

(76) 제술관이 사사로이 초청을 받고 상급 받는 규정은 나 때부터 폐지되었다.

(86) 내 생각에 일본 풍속은 남을 이기기를 좋아하니 이기지 못하면 죽음이 있을 뿐이다. 까닭없는 일에도 이렇거든 하물며 전함을 가지고 전투가 벌어져 교룡이 성내듯 고래가 달리듯 하는 데서야 더 말 할 것 있겠는가.

(97) 송포의는 나이가 마흔, 사람은 작아도 고운 풍채로 재사의 티가 있었다. 시론도 기발하였고 작품도 더러 사랑스러운 것이 있었다. 나는 치질이 있는 까닭에 오래 앉아 객을 응접할 수 없어 배에 나가 있으면서 조리하였다.

✎ 그 동안 보아왔던 선비의 풍모와 너무 다른 병명에 놀랍고 재미있었다. ‘치질’은 이런 기행문에까지 기록될 만큼 그리 수치스러운 병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107) 나이 어린 축전주 태수의 글 받으러 오는 모습

✎ 미소년이 이다지도 많은지? 그리고 아름다운 사람을 그릴 때 정말로 칭찬하는 듯한 느낌이 묻어나는 대목들이 적지 않았다.

 

(120~122) 초장중장이 다른 자가 있는데 만나 본 일은 없지만 수백 자의 글을 써 보내면서 자기가 쓴 시문을 평가해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일찍이 중국 남경의 맹씨 성을 가진 사람한테 배워 중국 거장의 문체를 체득하였노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써 보낸 것이 하도 괴벽하여 하나도 알아볼 만한 것이 없었다.~ 이 사람이 저런 글자를 배워 가지고 까박까박 저 혼자 신기하여 일본서는 자기를 알아줄 사람이 없다고 하는데 공의 넓은 안목에는 어떻습니까? ~ 물으실 것도 없지요. 이 사람의 괴벽함이 다 그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 자야말로 딱한 작자였군. 애써 바다을 건너와서 초장중장의 생애를 결딴냈구려. ~그러나 참된 문장이라는 것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천하가 다 알 수 있어야 합니다.

✎ 중국의 맹씨에게 글을 배워 인생이 결딴난 초장중장(이름도 너무 재미있다)의 이야기에 배꼽잡고 웃었다. 일본은 글을 잘 하는 이가 없어 초장중장처럼 설치는 사람이 많았을 것 같다. 어쨌든 우문에 현답이라. 신유한의 참된 문장론은 기가 막히다.

 

(141) 산천과 누대와 사람들의 차림만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참대숲과 꽃떨기가 또한 제각기 내로라고 나서며 샘을 내는 듯 다투어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왼쪽만 바라보다가는 바른쪽 풍경을 잃을까 싶어서 바른쪽에 눈을 팔 때에는 왼쪽이 문득 더 기이해지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배가 한나절을 가는 동안 두 눈시울이 다 붉어지도록 눈을 팔았으니 마치 츱츱스러운 사람이 진기한 음식을 보고 자꾸 먹어서 배가 부른데도 입에서는 싫지 않음과 같았다.

✎ 바다를 건너오며 하천을 거슬러 올라 오는 동안 일본의 풍경에 대한 칭찬이 입에 마를 정도이다. 배가 부른데도 입에서는 당기는 맛으로 비유한 대목에서는 진정으로 신유한이 풍경에 감탄하고 있음을, 그리고 나도 거기에 함께 하고 싶음을 간절히 느낄 수 있었다.

 

(146) 이렇게 이 나라의 번화함과 풍부함, 지리의 이로움과 풍경의 기이함은 아마 천하에 드물 것이니 옛날 문헌에 기록된 인도 계빈국이나 파사국(페르시아)도 이보다 더 하지는 못할 것이다.

✎ 통신사가 지나치는 모든 도시들이 갈수록 부유하고 사치하게 표현된다. 당시에 일본의 국력, 경제력이 정말로 조선을 앞섰던 것이 아닐까?

 

(153) 나의 피로함이여! 대판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요구로 시를 짓고 읊기에 지친 나는 좋은 시 한 편이라도 읊을 수 있는 기력이 회복되지 못한 채 졸음이 앞서 이 아름다운 강산에 대답을 주지 못하니 한없이 애달프구나! 

✎ 피곤해서 시를 짓지 못하다니. 얼마나 시를 많이 지었으면.

 

(156~157) 나는 이미 왜말을 익히 들어 왔으므로 가끔 알아듣는 말도 있어서 자주 왜인을 불러 차를 청하여 마시기도 하며 길도 물었더니 왜인은 그때마다 크게 즐거워하며 곧 응해 주었다.

✎ 두세 달이면 외국어 속성? 어쨌든 여행은 해볼 맛이다.

 

(163) 왜의 풍속이 그릇이 더러워도 먹지 않고 주인이 얼굴이 못생겨도 먹지 않는다. 그래서 늘어서 있는 주점에 미인이 많다.

✎ 유달리 미인, 미소년에 대한 기록이 많다. ^^

 

(164) 이 오랑캐가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도 좋은 강산을 차지하였을까?

✎ 이 말이 언젠가는 나올 줄 알았다. 

 

(184) 밤중에 지진이 있었다.

✎ 당시에도 지진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장 궁금했던 단어 “망궐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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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을 공경하고 충성을 나타내기 위한 의식으로, 조선시대의 법전인 《대전회통(大典會通)》 등에 그 기록이 있다. 주로 궁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근무하여 직접 왕을 배알(拜謁)할 수 없었던 관찰사·절도사·목사·부사 등의 관리들이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지방 관청이나, 왕과 궁궐의 상징인 궐패(闕牌)를 모신 객사(客舍) 등에서 대궐을 향해 예를 올렸다. 
또 설·단오·한식·추석·동지 등 명절이나 왕과 왕비의 생일날 예를 올려 임금 내외의 만수무강을 빌던 의식 또한 망궐례라 한다. 이밖에도 꼭 임금을 배알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정이 있어서 예를 올리지 못했던 관리나 과거에 낙방하고 귀향하는 선비, 유배지에 있는 관리도 망궐례를 올렸다. 
고려·조선시대에 임금이 정월 초하루나 동지, 성절(聖節:중국 황제의 생일), 천추절(千秋節:중국 황태자의 생일)에 왕세자와 조정의 신료들을 거느리고 황제가 있는 중국 북경 쪽을 향하여 예를 올리던 의식도 망궐례라고 하였다. 
현존 국내 최대 단층 목조건물인 여수진남관(麗水鎭南館:보물 324)이나 완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완도객사(莞島客舍:전남문화재자료 109), 그리고 전국의 객사 건물 중 규모가 가장 큰 나주목(羅州牧)의 객사 금성관(錦城館:전남유형문화재 2)은 망궐례를 올리던 곳으로 유명하다.이 의식은 대한제국 이후 폐지되었다    [출처] 망궐례 [望闕禮 ] | 네이버 백과사전
(212) 이날 밤 종사관께서 막료의 고발에 따라 역관들의 행장을 수색하였는데 권흥식의 자루에서 인삼 열두 근과 은자 2150냥, 황금 24냥이 나왔고 오만창에게서 인삼 한 근이 나왔다. 그래서 두 사람을 결박하고 목에 칼을 씌우고는 대마주에 가서 처단하기로 하였다. 처음 사신이 떠날 때 인삼을 몰래 나라 밖에 내다가 파는 것은 나라에서 금하는 것이니 여러 역관 중에서 범하는 자가 있으면 열냥쭝 이상은 곧 처단하리라는 뜻을 언명하였다. 그런데도 이자들이 죽기를 무릅쓰고 법을 어겼으니 그저 둘 수는 없지만 남의 나라에까지는 소문 내지 말자는 것이었다.

 (269) 역관 권흥식이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권흥식은 인삼 장사를 못 하게 한 법을 어겼으므로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할 것이니, 사신이 귀국하여 처단할 뜻을 이미 조정에 보고하였다. 권흥식 스스로도 처벌받을 것을 알고 먼저 자살한 것이다. 죄는 비록 용서할 수 없으나 마음에 참 불쌍하였다.

✎ <열하일기>에서도 이와 비슷한 대목을 언급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조선의 공적인 업무 집행이 얼마나 열악한가를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한데, 역관들의 위법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더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뒤에 이어지는 자살 이야기는 더욱 더 그러한 생각을 갖게 한다.

 

(216) “이는 곧 일본의 창기 집 풍경을 표현한 것입니다. 혹시 조선의 기루에서도 저런 자태를 볼 수 있는가요?” 하고 물었다. “복색은 다를지언정 그 태도야 다를 것이 있겠소? 표현이 그림 같구려.” 하고 내가 대답하였다. “학사 또한 저런 흥취를 아시는가요?” 하고 그가 또 물었다. “세상에는 쇠나 돌로 만들어진 사람이 없거든, 나라고 왜 모르겠소. 다만 스스로 삼갈 뿐이지요.” 하였더니, 그가 크게 웃었다. 이윽고 보기가 점점 실큼하여 사신이 분부하기를, “음탕 해괴한 짓거리를 다 보고 싶지 않소.” 하니, 곧 거두도록 하여 음악을 다 걷어치우고 놀음놀이가 나왔다.
* 실큼하다 : 싫은 생각이 들다.

✎ 치질에 걸린 이야기처럼 인간적인 대목들이 많이 나오는데, 근엄한 조선의 사신들이 기녀들과 광대들의 공연을 보고 있는 장면도 참 인간적이다. 얼마나 삼가고 또 삼가는 척 노력했을까?

 

(223) 또 아쉬운 것은, 강호의 산천과 누각의 풍경이 곳곳마다 그림같이 아름답건만 이 나라의 금법 때문에 한 번도 흥에 젖어 문밖에 나갈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다. 머문 지 반달 동안 왜인들이 시문을 졸라대어 몹쓸 빚에 쪼들리고 반찬 비린내만 행장에 배었을 뿐, 끝내 가슴 속에서 우러나오는 말로 한 폭 좋은 풍경을 그려 보지 못하였으니 이 아니 한스러운 일인가!

✎ 엄격하게 제한 된 사신들의 행로를 알 수 있다. 가난하고 힘든 일본 모습은 당연히 볼 수 없겠지? 그런데 ‘반찬 비린내만 행장에 배었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227~228) 길에서나 저자에서나 밀감을 산더미같이 쌓아 놓고 파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문인과 시승들이 와서 환대하는데, 그들은 반드시 대바구니에다 귤을 담아다가 자리 위에 놓아 술안주로 입가심을 삼는다. 푸른 잎이 그대로 붙어 있는 것이 매우 운치가 있었다. 내가 이것을 먹으면 한 광주리로 모자랐다. 말하자면 시가 귤을 많이 요구하는 탓인가? 가끔 나는 스스로 웃으면서 말했다. “뱃속의 시가 다 가을 향기를 좋아하니 마치 꿀벌이 꽃을 빨아 꿀을 만드는 것과도 같은 게야!” 이 말에 왜인들이, “공의 시는 마땅히 귤 속의 신선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여 또 웃었다.

✎ 귤을 좋아한다는 이유도 참 시적이다. 변명이지만 귀엽고 멋지다.

 

(229) 뭇 왜인들이 또 우리 나라 언문의 글자 모습을 보여 달라고 청하기에 대강 써서 보였더니, 어느 시대에 창제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우리 세종대왕께서 거룩하셔서 온갖 과학에 널리 정통하셨으므로 열다섯 줄로 된 새로운 모양의 글자를 만들어 천하 만물의 음을 낱낱이 표현할 수 있게 하셨는데 그것이 삼백 년 전이었소.” 하고 대답하니, 왜인들은 모여 보면서 말했다. “글자의 형태가 별과 초목을 상징하니 반드시 대자연에서 형상을 도입하였으리라.”

✎ 17세기에 일본까지 널리 퍼진 한글의 위상! <해유록>에서 발견하니 새롭고 기쁘다. 언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세종대왕’ ‘천하 만물의 음을 낱낱이 표현할 수 있게 하셨는데’라는 대목에서 보면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245) 대판에 서적이 많기로는 실로 천하의 장관이라 할 만하다. 우리 나라 여러 현인들의 문집 중에 그들이 높이 평가하는 것으로 <퇴계집>만 한 것이 없으니 이를 사람마다 외고 있다. 선비들이 필담에서 제기한 문제도 반드시 <퇴계집> 가운데 쓰여 있는 것으로 첫째 도리를 삼고 있었다. 그들은 심지어 도산서원의 소재지가 어느 군에 속하는지, 선생의 후손이 지금 몇 사람 있으며 무슨 벼슬들을 하고 있는지, 선생이 생시에 좋아하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하는 질문이 몹시 많았으므로 이루 다 기록하지 못한다.

✎ 옛날에도 한류가 있었다. 훨씬 다른 차원의~

 

(246) 그러나 가장 통탄할 것은, 김성일은 일본 견문론 <해사록>과 유성룡의 임진왜란 기록 <징비록>, 강항의 <간양록>같은 책은 나라의 기밀에 속한 것이 많이 실려 있는 것이라 공개할 수 없는 것인데, 지금 모두 대판에서 출판되었으니 이 어찌 적정을 정찰하여 적에게 일러 주는 것과 다르겠는가. 나라의 기강이 엄숙하지 못하여 역관들이 사사로이 매매하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구나!

✎ 임진왜란이 언제 적 일인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오히려 이런 책들이 일본에 돌면서 오류는 바르게 잡고, 좀더 개방적인 분위기로 갔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270~271) “신묘년에 사신으로 오셨던 분들도 서로 사랑하여 깊어진 우정이 꼭 오늘과 같았건만 이별할 때는 눈물이 없더니, 십 년 동안에 정신과 머리털이 늙어 추물이 다 되었을뿐 아니라, 늙으면 정에 약하다는 옛말이 과연 옳은 것 같소이다.”하였다.나는 그를 잘 알고 있다. 위인이 음험하여 겉으로는 말로 꾸미고 안으로는 칼을 품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가 나라의 요직에 앉아 권세를 잡는다면 반드시 이웃 나라에까지 일을 낼 작자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자기 나라 법에 묶여 그저 작은 섬의 기실에 지나지 않으니 늘 거기서 늙어 죽는 것을 안타까워 하고 있다. 오늘 우리와 이별하는 자리에서 눈물을 떨구는 것도 실은 제 설움일 따름이다.

✎ 우삼동과 이별하는 장면이다. 그 어떤 일본인보다 자주 출연했기에 나름 정이 들대로 들었는데, 이별이라니 아쉽다. 통역과 안내자 역할을 맡았지만, 교활하면서도 때론 다혈질적인, 그리고 마지막엔 눈물 흘리는 나약한 모습까지 참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심 무서운 인물이지만 작은 섬에 들어앉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조금 안쓰럽다.

 

(273) 진호를 시켜 조선간장에 겨자, 생강, 초와 갖은 양념을 하여 어회에 들버무리고 또 고기를 다져 넣고 떡국을 끓이게 하였는데 이것이 우리 고향의 설음식이다. 이를 보고 나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하염없이 한숨을 지었다.

✎ 17세기 어회와 떡국. 정말 어떤 맛일까?

 

(274~275) 나는 왜인들한테서 받은 선물로 귀국 행장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 딸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생각건대 여섯 배의 사공들과 기수, 취수와 심부름하는 아이들도 우리 영남 사람들로 괴로움과 즐거움을 같이했기에 다 불러서 나누어 주었다. 그러고는 다만 사신한테 받은 몇 가지 물건과 내가 구입한 한당서 백 권과 큰 칼 한 갑만 남겼다.

✎ <열하일기> 마지막 대목이 생각난다. 그 동안 기록했던 종이와 붓들로 가득했던 연암의 행장에 비해 신유한의 행장은 좀더 인간적인가? ^^ 근데 한당서를 중국도 아니고 일본에서 사다니 우리나라 체면이 좀 말이 아닌가?

 

(289~290) 서복이 바다로 나간 뒤에 그가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모르니 세상의 일 벌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서복의 자손이 지금의 왜 황제이고 데리고 간 동남동녀 5백 명은 각각 씨족이 되어 비로소 왜국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근거 없는 말이다. 세상이 생긴 이래 땅이 있으면 사람이 있게 되었고 사람이 있으면 우두머리가 생기게 된다. 왜의 땅은 여러 섬을 병합하여 거의 수천 리나 된다. 아름다운 산수와 기름진 평야가 있어 백곡이 잘 되며 만물이 다 난다. 이런 조건에서 어찌 진시황 때를 기다려서야 사람이 있었으며 어찌 서복을 기다려서야 임금이 있었겠는가. 서복 부자는 본디 초월한 사람이라 바다 가운데 살 만한 땅이 있을 것을 알고 불안한 진나라를 피할 계책으로 약을 구한다는 구실로 큰 다락배와 동남동녀를 얻어 가지고 바다로 나온 것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왜국이 있는 것을 몰랐으나 그곳에 가 보니 살기 좋으므로 서복이 일본에서 그냥 살다가 일본에서 죽었다는 것은 믿을 만하다. 그러나 서복의 자손과 4백 남녀의 자손들이 어찌 되었는지는 다 그 성도 바꾸었을 테고 너무 오래 전 일이므로 고증할 길이 없다.

✎ 서복이 일본 황제의 시작이라는 말에 대한 반박인데, 나름 논리에 맞는다고 생각한다. 

 

(291) 이 나라 사람들로 민첩하고 명석한 자들은 많아도 순박하고 너그러운 자는 적은 것이 이 같은 강산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 풍수지리에 인성이 영향을 받는 것이 사실일까?

 

(299) 뭇 왜인들은 서로 돌아보며 입을 딱 벌리고 기가 질린 듯하였다. 일본은 범과 표범이 없을 뿐 아니라 곰이나 늑대, 이리 따위도 없다. 왜인들은 다 몸과 마음이 가냘프고 약하다. 그들은 잔꾀는 잘 부리나 큰 용맹은 없으므로 내 말을 듣기만 하고도 이렇듯 놀라 겁내는 것이다.

✎ 인터넷에 찾아보니 까치도 없다고 한다. 까치를 한국 까마귀로 부른다나?

 

(310) 일본 풍속에는 앉으면 반드시 무릎을 꿇고 앉는다. 귀천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앉을 때면 비록 길가에서 술을 파는 여자건 밭에서 곡식을 거두는 사람이건 반드시 두 무릎을 땅에 대고 옷을 여미고 앉는다. 그들의 풍습을 고찰하건대 예의를 차리느라고 그러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대개 그들의 옷이 앞에는 섶이 없으며 아래로는 바지, 잠방이가 없으니 이렇게 하지 않고는 음양을 감추기 어렵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꿇어 앉는 것이 습관이 되지 않았을까? 이러하고 보면 그 또한 우스운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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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상식문답/도서출판 기파랑> 방 가운데에 ‘이로리(圍爐裏)’라는 이름의 난로를 피워 실내를 데운다. 하지만 다다미에 철버덕 주저앉으면 엉덩이가 시리다. 흡사 벌이라도 받듯이 무릎을 꿇고 앉으면 바닥의 냉기가 단숨에 엉덩이를 통해 온몸으로 전해지지는 않으니까 한결 낫다. 그렇게 방한을 위해 무릎을 꿇고 살다보니 ~ 무릎을 꿇고 앉는 것을 예법으로 치게 된 또 다른 유래가 있다. 그것은 다도, 그 중에서도 16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 치하에서 붐을 이룬 ‘와비차’에 기인한다. 차의 명인 센노리큐가 완성시켰다는 와비차의 다도는 간소함과 정적(靜寂)을 모토로 삼는다. 아무런 치장을 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소박하고 수수한 다실에 모여 차 한 잔을 음미하며 허례허식을 벗어 던진 인간 본연의 다소곳한 자세로 돌아가는 것이다.문제는 다실이 너무 좁다는 데 있다. 좁은 곳에 보다 많은 사람이 들어가 앉으려니 무릎을 꿇고 몸을 움츠려야 한다. 책상다리로는 그만큼 더 공간을 차지하게 된다. 그런 식으로 다들 무릎을 꿇다보니 그게 다도의 예법으로 굳어졌고, 급기야는 일상생활에서의 정좌법으로 자리 잡고 말았다는 설이다.이와는 달리 사무라이 유래설도 있다. 언제나 길고 짧은 두 자루의 일본도를 차고 적의 기습을 경계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무사들, 그들은 실내에 앉아 대화를 나눌 때에도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지 않았다. 반드시 무릎을 꿇은 자세를 취했다. 만약 불시에 적이 공격해 온다고 치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가 일어설 때와, 무릎을 꿇었다가 일어날 때는 간발(間髮)일망정 벌써 한 템포 차이가 나는 것이다. 한편 최근 <정좌와 일본인>(고단샤 발간, 丁宗鐵 저)이라는 책을 펴낸 한의사의 주장은 또 달랐다. 그는 정좌가 일반화한 것이 메이지시대 이후이고, '근대 일본인'을 형성하기 위해 정부가 의도적으로 현재의 일본식 정좌를 가르쳤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스스로를 다스리는 무사도의 상징으로서의 정좌를 국민들에게 교육시킨 결과, 정좌법이 널리 뿌리를 내렸다는 주장이었다. 

 

(314) 여름에 더울 때에도 파리 같은 곤충들이 매우 드무니, 실내가 깨끗하여 더러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고기나 생선이 썩은 것은 바로 땅속에 묻으며 변소의 더러운 것은 바로 밭으로 내가니 파리 같은 것이 생길 데가 없다. 모기가 생기면 푸르게 물들인 베로 모기장을 만드는데 네모지게 나무로 틀을 짜고 거기에 베를 돌려 붙인다. 높이는 사람이 일어나 앉을 정도이고 넓이는 한 사람이 누워서 잘 정도이다. 변소를 항간에서는 설은(雪隱)이라고 한다. 설은 곁에는 반드시 욕실이 있고 욕실 안에는 큰 통에 물이 담겨 있으며 그 곁에는 상 하나가 있고 상 위에 흰 모시 두어 자가 놓여 있다. 그들 풍속에 변소에 갔다가는 반드시 씻으므로 이런 도구가 있는 것이다. 남녀가 동침하는 방에도 이런 것들이 있다고 한다.

✎ 정갈한 일본인들의 습성이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雪’이라는 한자에 ‘눈’이라는 뜻 외에 ‘씻다’ ‘더러움을 씻다’라는 뜻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324) 주의 세법이 농민에게만 너무도 각박하여 물 한 방울 샐 틈이 없다. 촌락의 농민들은 한 해 내내 농사지어 온통 관가에 바치고 마는 형편이니 풍년이 들었더라도 죽도 먹기 어려워 처자를 스스로 팔기에 이른다. 이렇듯 빈부가 고르지 못함이 다 국법이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나라 백성들은 한 번 납세만 하면 다시 무슨 가렴주구란 없다. 관백 이하 각 주의 태수가 왕래할 때에도, 마부와 말의 징발이니 역참의 접대니 뭐니 하는 따위 민간 부담은 일절 없으며 또 우리 통신사 일행을 위하여 동원되는 허다한 인원과 접대 물자가 날마다 방대한 수량에 달하지만 다 관에서 지출할 뿐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니, 민생이 유지되는 까닭이 실로 여기에 있다.

✎ 나라에나 과한 세금은 백성들에게 부담이 된다. 하지만 그 외에 가렴주구란 없다는 말에 당시 일본만의 합리적인 세금 집행법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17, 18, 19세기까지 가혹한 세금과 그 외 토호들의 수탈로 힘들었던 우리 백성과 비교해 일본 백성은 좀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닌지?

 

(329) 각 주의 사람은 각기 표식이 있다. 장막 또는 돛과 옷깃 뒤쪽에 반드시 검은색으로 표식을 하되 모나거나 둥글거나 매화처럼 또는 나뭇잎처럼 또는 태극도처럼, 또는 품 자나 품 자 위에 한 긋을 긋기도 하니, 각각 지방에 따라 다르게 하는 것이다. ~ 우리 나라에서 각 영이나 각 초의 의복 빛깔과 깃발 빛깔을 구별하여 정한 것과 같은 원리이다. 그러나 만백성을 의복의 표식으로 묶어 평상시 드나들 때도 감히 서로 거주지를 혼동할 수 없게 하였으니, 그 법과 제도가 얼마나 가혹하고 각박한가를 알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 정말 엄청난 제도이다. 거주지까지 옷에 표시하고 다니다니. 다산 관련 책을 읽다보면 정순왕후 수렴청정기에 천주교인을 잡아내기 위해 ‘오가작통법’을 실시하였다고도 하니, 어떤 제도가 더 각박하고, 가혹할까? 자못 궁금해진다.

 

(330) 우리가 한길을 지날 때 길 양옆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을 보면 모두 한길 밖에 질서 정연히 앉아 있었다. 작은 사람들은 맨 앞 첫 줄에, 좀 큰 사람들은 둘째 줄에 더 큰 사람들은 그 뒤에 다금다금 대열을 이루어 정숙하고 정돈되어 도무지 떠드는 소리가 없었다. 수천 리 길을 지나며 보아도 함부로 행동하여 길을 범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생각건대 이 나라는 군사 훈련이 일반 백성들의 생활 풍습에까지 침투한 것으로, 예의를 가르쳐서 이렇듯 질서가 잡힌 것은 아닐 것이다. 관백과 태수의 정치가 다 군대 제도에 기본을 두었으니 대소 백성들이 오랜 기간 보고 듣고 익혀 생활화된 것도 다 군법에서 나온 것이다.
** 다금다금 : 잇달아 놓거나 덧놓은 사이가 매우 짧은 모양을 이르는 말. 

✎ 예전에 맥아더 장군이 패망한 일본의 도로를 차를 타고 지나는데, 일본 사람들이 모두 뒤를 돌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한다.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대열을 이루어 정숙하던 과거의 일본인들이나 맥아더 장군 앞에서 숙연한 대열을 정비하던 그때의 일본인들이나 신유한이 지적한대로 모두 군사문화에 젖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는지?

 

(345) 이 나라에 나도는 서적을 보면 우리 나라에서 건너간 것이 한 백 종이나 되겠고, 중국 남경에서 상인을 통해 들어간 것이 천 종은 될 것이다. 이리하여 고금의 서적과 백가의 문집들로 서점에 간행되고 있는 것이 우리 나라보다도 성황을 이루고 있다. 그들은 이렇듯 글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천품이 총명 민첩한 데다가 이른 바 과거 제도에서 오는 표절의 해악이 없어서 공부가 성실하여 연구가 심오하다. 고사를 토론하고 장단을 평가하는 것을 보면 견해가 정확하여 글 잘하는 논객에 가깝기도 하다.

✎ 역으로 보면 조선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대목! 과거제도로 인한 표절의 해악이나 짧은 식견으로 연구가 얕은 선비들이 많음을 비꼬고 있는 듯하다.

 

(355) “귀국의 풍속은 과연 괴상하구려! 남녀 두 성의 정욕이란 본래 천지자연의 번식 원리에서 나온 것이니 천하가 다 같지만 그래도 음란에 빠질까 경계하거늘, 세상에 어찌 음이 없이 양끼리만 서로 정을 느껴 기뻐할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학사 또한 그것을 모르시는구려!” 하고 우삼동은 빙그레 웃었다. 우삼동 같은 사람이 하는 말도 이러하니 이 나라 풍속이 그러함을 알 수 있었다. 

✎ “학사 또한 그것을 모르시는구려!” 이 대목에서 엄청 웃었다. 하하하. 어쨌든 일본이 선진국이긴 하다.

 

해유록-조선 선비 일본을 만나다
국내도서
저자 : 신유한 / 김찬순역
출판 : 보리 200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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