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방(버지니아 울프)
- 행복한 책읽기/문학
- 2018.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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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걸쳐 읽었다. 쉽지 않았고, 어떤 부분은 강렬했고, 어떤 부분은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난해했다. 작가의 분노와 처절함이 곳곳에 배어 나와 아릿아릿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책을 다 읽은 나 자신이 뿌듯했다. 제인 오스틴과 에밀리 브론테를 감동하며 읽은 나 자신이 대견했다. 왜 여성에게 자기만의 방이 필요한지, 재정적인 자립이 절실한지를 느끼고 텅 비어 있는 자기만의 방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도 큰 성찰을 주는 독서였다.
100년이 지나도 그렇게 많이 달라지지 않는 모습에 버지니아 울프는 많이 좌절했을 것 같다. 젊은 나이에 주머니에 돌을 채워 매일 산책하던 우즈 강에 몸을 던진 작가의 마음을 약간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인상 깊은 구절-
39 나는 소설가에게 허용되는 모든 권리와 자유를 이용하여 내가 이곳에 오기 전 이틀 동안 겪었던 일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어깨에 짊어진 이 주제에 눌려 고개도 들지도 못한 채, 어떻게 그 문제를 고민하며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생각했는지 말입니다. 내가 지금부터 묘사할 내용이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는 아님을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요. 옥스브리지는 꾸며낸 대학이고, 퍼넘도 지어낸 칼리지입니다. ‘나’ 역시 실제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을 부르는 편리한 용어에 불과합니다.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그 거짓말에는 진실이 섞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진실을 찾아내고 그중에 기억할 많나 것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만약 그럴 만한 게 없다면, 내가 한 말을 통째로 쓰레기통에 넣어 잊어버리면 그만이지요.
‘여성과 픽션’에 대한 강의를 이렇게 가장 적확한 방식으로 담아내다니! 버지니아 울프가 얼마나 재능이 많은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었고, 유머러스하면서도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도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41 그 남자는 공포와 분노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순간 이성보다는 본능적인 깨달음이 도움이 되더군요. 그는 학교 관리원이었습니다. 나는 여성이었고요. 여기는 잔디밭이고, 길은 저쪽이었지요. 연구 교수와 학자들만 이 여기를 지날 수 있고, 내게 허용된 길은 자갈길이었습니다.
43 그 신사는 유감스럽지만 여자는 칼리지 연구 교수와 동행하거나 소개장이 있을 때만 도서관에 출입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느꼈을 황당함과 분노, 아픔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가장 지성적이고 자유로운 대학에서 300년 묵은 남성중심의 전통이라는 두꺼운 벽과 만나 느낀 답답함과 황당함! 황당함을 넘어 화가 났을 텐데, 버지니아 울프는 손해본 것이라고는 물고기를 잃어버린 것 뿐이라고 담담하게 읊조릴 뿐이다.
61 부인이 사업을 벌였다면, 인조 실크 제조업자가 되거나 증권거래소의 거물이 되었더라면, 퍼넘 칼리지에 2, 3백 파운드를 남겼더라면, 우리는 오늘 밤 이 순간 안락하게 앉아서 고고학, 식물학, 인류학, 물리학, 원자의 본질, 수학, 천문학, 상대성 이론, 지리학 같은 것들을 대화의 주제로 삼을 수 있었겠지요. 시턴 여사와 그녀의 어머니와 그녀의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들의 아버지와 그들의 아버지의 아버지처럼, 돈 벌기라는 위대한 기술을 배워서 연구비, 강좌 기금, 상금, 장학금이 그들과 같은 여성을 위한 기금으로 돌아가도록 그 돈을 남겨 주었더라면, 우리는 여기서 우리끼리 자고 고기와 와인 한 병을 먹으며 꽤 괜찮게 만찬을 즐겼을 것입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자기만의 방을 갖기 위한 금전적인 자립을 일관되게 이야기한다. 세상의 모든 이슈는 남성들이 독점하던 시대에, 사적인 만찬 자리에서 조차도 소외감을 느꼈을 작가의 마음이 슬프게 다가오는 대목이었다.
74 프로이트의 이론을 빌려보자면, 혹시 어린 시절에 예쁜 여자아이한테 놀림을 받았던 건 아닐까? 어렸을 적에도 그는 그다지 어여쁜 아이일 리가 없었을 테니까요.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여성의 정신적, 도덕적, 생리적 열등성을 논하는 위대한 저작을 집필하고 있는 그림 속의 교수는 매우 화가 나고 추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 굳이 정신분석학이라고 고상하게 부르지 않아도, 심리학의 아주 기본적인 개념들만 떠올려보아도, 노트 속에 그린 분노에 찬 교수의 초상은 나의 분노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었지요. 내가 몽상에 빠져 있는 동안 분노가 내 연필을 낚아채 갔던 것입니다. ~ 나는 분노에 찬 교수의 얼굴에 수레바퀴와 원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에는 여성을 폄하하고 열등하다고 평가한 여러 학자와 유명인들이 등장한다. 페리클레스, 나폴레옹, 무솔리니와 그 외 버지니아 울프와 당대를 살아갔던 편견으로 가득찬 남성학자들! 그들에 대한 분노가 가득 담긴 작가의 솔직한 고백에서 묵직한 슬픔을 느꼈다.
82 투표권과 돈 둘 중에서 내 손에 들어온 이 돈이 훨씬 더 중요하게 보였다고 고백해야겠지요. ~ 무엇보다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 꼭 필요한 것은 아닐 수도 있지만 필요한 것으로 보였던, 걸려 있는 돈이 워낙 중하기에 위험을 무릅쓸 수는 없는 그런 일을 마음에 없는 말을 해가며 비위를 맞추면서 노예처럼 일한다는 것, 그리고 별것 아니지만 소유자에게는 중요하고 세상에 드러내지 않으면 죽는 거나 마찬가지인 재능이 소멸하고 있다는 것, 나 자신, 나의 영혼과 더불어 소멸하고 있다는 생각, 이 모든 것들이 꽃피는 봄날을 갉아먹고 나무 속을 파먹는 녹이 되어갔습니다.
투표권과 돈 둘 중에 돈이라니! 자신의 내면에 충실하고자 했던 작가에게 자신의 영혼을 지켜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재정적인 자립이라는 것을 피끓는 심정으로 고백하고 있다. 돈이 없었던 그 시절 얼마나 공포스럽고 고통스러웠는지를 ‘영혼과 더불어 소멸하는 노예 같았다’라고 표현한 부분에서 마음이 아려왔다.
97~99 그러나 그런 재능이 노동 계층의 사람에게도 있었던 것처럼, 여성에게도 분명 존재했을 것입니다. ~ 내 기억에 에드워드 피츠제럴드는 서정시나 민요를 지어내며 아이들에게 나지막이 불러준 이는 여성이며, 실을 잣거나 긴긴 겨울밤을 보낼 때 그 노래로 지루함을 달랜 이도 바로 여성이었다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지어낸 셰익스피어의 누이의 이야기를 다시 살펴볼 때, 내 생가에 그 이야기의 진실은 16세기에 위대한 재능을 갖고 태어난 여자들은 분명 누구나 미치거나 자기 자신에게 총을 쏘거나 마을 변두리의 한 오두막에서 반은 마녀로 반은 마법사로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조롱하는 존재로 살다가 외롭게 생을 마감했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시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고자 했던 명민한 여자아기가 다른 이의 방해에 가로막히고 제지당하며, 고집스러운 자신의 재능 탓에 고통받고 갈기갈기 찢기고 말 것이라는 것, 그리하여 육체적인 건강과 정신적인 건강을 잃고 말리라는 것은 특별히 심리학적 분석을 동원하지 않아도 충분히 확신할 수 있으니까요.
~(여성이 누릴 수 있는 큰 영광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것이다. 페리클레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자신은 사람들의 입에 숱하게 오르내린 인물이면서 말이지요.) 익명성은 여성의 피 속에 흐르고 있습니다. 베일 뒤에 숨고자 하는 욕망은 여전히 여성들을 사로잡고 있지요.
엘리자베스여왕 시대에 왜 여자 셰익스피어가 나오지 못했는지를 너무도 구구절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남성 중심의 사회가 강요한 익명의 DNA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판박이처럼 똑같다. 최근에 읽은 <춘향전>과 <방한림전>도 역시 여성의 익명성으로 숨은 걸작은 아닌지?
101~102 아버지가 인심 쓰듯 주는 여성의 용돈이란 필요한 옷을 사입을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키츠나 테니슨, 칼라일 같은 가난한 남자들조차도 누릴 수 있었던 도보여행, 짧은 프랑스 여행, 매우 초라할지언정 가족의 요구나 횡포로부터 몸을 피할 수 있는 독립된 숙소와 같은 진정제가 여성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지요. 이러한 물질적인 어려움은 매우 극심한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더욱 어려웠던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환경이었지요. 키츠나 플로베르, 다른 재능 많은 남자들이 견디기 어려워했던 세상의 무관심은 여자의 경우에는 무관심을 넘어선 적대감이었습니다. 세상은 여자에게는 남자에게 하듯이 말하지 않았슴니다. 네가 원하는 것을 써라. 나는 상관없다. 세상은 실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글을 쓴다고? 네가 쓴 글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
재정적인 어려움과 같은 물질적인 장애와 더불어 세상의 손가락질에 더욱 상처받았던 모든 여성 작가들을 대신해 버지니아 울프가 아파하고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118 셰익스피어에게 말로가, 말로에게 초서가 없었다면, 초서에게 자연상태의 거친 언어를 다듬고 길을 개척했던 잊힌 시인들이 없었다면 글을 쓸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걸작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작품은 수년간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일군의 집단이 생각해 낸 결과물입니다. 따라서 하나의 목소리 이면에는 집단의 경험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제인 오스틴은 패니 버니의 무덤에 화관을 놓아야만 합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영국박물관 도서관에서 왜 먼 옛날부터 여성 작가들을 불러오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자기만의 방>에서 가장 칭찬하는 에밀리 브론테와 제인 오스틴은 그냥 떨어진 별들이 아닐 뿐 아니라, 버지니아 울프도 그들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리라.
129 지배적인 것은 남성의 가치입니다. 거칠게 말해서 축구와 스포츠는 ‘중요한’ 일입니다. 유행을 좇고, 옷을 사는 건 ‘하찮은 일’이고요. 그리고 이러한 가치 평가는 피할 수 없이 삶에서 픽션으로 전이됩니다. 비평가들은 이렇게 판단합니다. 이 책은 전쟁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책이야. 이 책은 거실에서 여성이 느끼는 감정을 다루고 있으니 시시한 책이지.
세상에 100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구나!
130 그것을 병들게 한 것은 소설 한 가운데 자리한 그 결점이었습니다. 그녀는 다른 이의 의견을 좇아 자신의 가치를 바꾸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른쪽으로든 왼쪽으로든 전혀 흔들리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철저히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그 모든 비평에 맞서 물러서지 않고 자신이 본 그대로의 견해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재능이, 얼마나 철저한 완전성이 필요했을까요. 오직 제인 오스틴과 에밀리 브론테만이 그런 일을 해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또 다른, 아마도 가장 뛰어난 성취입니다. 제인 오스틴과 에밀리 브론테는 남성이 쓰는 방식대로가 아니라, 여성이 쓰는 방식대로 썼습니다. 소설을 쓴 수많은 여성 가운데에서도 오직 그들만이 전적으로 저 영원한 현학자들의 끊임없는 훈계를 무시했지요.
와~ 제인 오스틴과 에밀리 브론테가 얼마나 위대한 작가인지 느낄 수 있어서 감동적이었다. 두 작가의 책을 읽은 것 자체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133 여성이 쓰기에 적절한 문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사극이나 시극의 형태가 여성에게 맞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성이 작가가 될 시기에 모든 문학의 옛 형식들은 고착되고 굳어진 상태였습니다. 소설만이 여성이 쓸 수 있을만큼 부드러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여성이 소설을 썼던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왜 여성들이 시나 시극을 잘 쓸 수 없었는지, 소설에서 유난히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는지 나름 설득력 있게 다가온 대목이었다. 거기에 버지니아 울프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민요와 노래를 전승시킨 주체는 바로 여성이었다는 점, 다시 말해 서사성의 원천도, 이를 전달하는 주체도 여성이었다는 점도 덧보태고 싶다.
169 사람은 남성적인 여성 혹은 여성적인 남성이 되어야 합니다. ~ 의식적인 편향을 가지고 쓰는 글은 소멸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글을 비옥한 상태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런 글은 하루 이틀 동안은 훌륭하고 효과적이며, 강인하고 능수능란해 보일 수 있겠지만, 해 질 녘이면 시들어버리고 맙니다. 그런 글은 다른 이의 마음에서 자랄 수가 없습니다. 마음 속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의 협동이 일어나야만 예술 창작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왠지 이오덕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특히 ‘그런 글은 다른 이의 마음에서 자랄 수가 없습니다.’라는 대목. 이런 생각을 펼치기 위해 <올랜도>라는 소설을 썼을까?
174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에 달려 있습니다. 시는 지적 자유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여성은 항상 가난했습니다. 단지 지난 200년간이 아니라, 태초부터 그러했습니다. 여성은 지적자유가 노예의 자식보다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여성은 시를 쓸 기회가 조금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내가 돈과 자
기만의 방을 그토록 강조한 이유입니다.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을 다시 마지막에 방점을 찍으며 강조한다.
<부록> 191 이러한 자유는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방은 여러분의 것이지만, 그 방은 여전히 텅 비어 있으니까요. ~ 처음으로 여러분은 스스로 그 대답이 어떤 것이어야만 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성참여협회에서 재정적인 여유를 갖춘 전문직 여성들에게 던진 울프의 말이다. 소름 돋는 감동이 밀려왔다. 나에게도 던져진 질문이기에. ㅜㅜ
2018.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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