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위의 딸(푸시킨)
- 행복한 책읽기/문학
- 2018.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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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재미있었지만, 첫 만남이 쉽지 않았던 러시아 문학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어렵고 복잡하고 변화가 많았던 이름들과 사건들, 긴 호흡의 대사들! 도스토예프스키의 큰 산맥을 힘겹게(물론 재미와 감동도 함께) 넘었던지라 제아무리 유시민 작가가 재미있었다고 할지라도(그래서 선택한 것이지만) 이 책을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 달 여를 다른 책에만 눈을 돌리다가 추석 연휴가 끝나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결국 정신을 차리고 주말에 읽었다.
그런데 세상에! 단숨에 읽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재미있었다니!
옆에서 남편이 낑낑대며 원고를 쓰고 있을 때, 나는 옆에서 낄낄대며 책을 읽었다.(좀 미안했다) 무엇보다 매력적인 캐릭터들! 엄격한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 방탕한 바람둥이 알콜중독 프랑스 가정교사, 일관된 충성심으로 끝까지 주인공을 챙긴 사벨리치, 반역의 쉬바브린, 벨로고르스끄 요새의 오랜 사령관 대위와 대위 부인 바실리사 예고로브나, 착하고 용감한 대위의 딸 마리아 이바노브나(마샤), 그리고 사랑의 열정으로 가득찬 주인공, 순박하고 건강한 농부이자 흉악한 반란의 수괴 뿌가초프까지! 중간에 등장하는 소소한 인물들도 나중에 적절히 다시 나타나서 독자를 기쁘게 해 주었다.
그리고 마치 양념처럼 러시아 민요, 속담, 민담을 차용하며 적재적소에 이야기맛을 살린 것이나, 단순한 양념이 아닌 핵심 주제까지 담고 있는 ‘까마귀와 독수리’ 민담까지! 재미와 의미심장한 메시지까지 던지고 있는 작품이었다. 원래 푸쉬킨은 시로써 명성을 얻었지만 점점 산문에 정열를 쏟기 시작했다는데, 나름 정점에 있는 작품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실제 이야기와 픽션을 교묘히 섞고, 뿌가초프를 새롭게 조명하면서 러시아가 지닌 문제들을 교묘하게 에돌아 비판하는 작가의 필력이 느껴졌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근처에 푸쉬킨 시가 있다고 하는데 꼭 가고 싶다. 다른 작품들도 읽어야지.
-인상 깊은 구절-
15 ‘잘 가라, 뾰뜨르야, 충성을 맹세한 사람한테 성심껏 봉사해라. 상관에게 복종하되 비위를 맞추려고 안달하지는 마라. 근무에 얽매이지도 말고 요령을 피우지도 마라. 속담에도 있듯이 옷은 처음부터 곱게 입어야 하고 명예는 젊어서부터 지켜야 하느니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첫째 드미트리를 보면 귀족 출신의 군인 장교들은 매우 화려하고, 방탕하게 그려진다. 주인공 뾰뜨르도 그런 코스를 밟을 뻔 했지만, 엄격한 아버지 덕분(?)에 진정한 군인의 길을 걷게 된다. 책의 곳곳에 등장하는 러시아 속담을 인용하는 아버지의 센스도 만점이다.
33 마침내 토끼 가죽 외투가 내어져 왔다. 농부는 그 자리에서 입어 보기 시작했다. 사실 외투는 나한테도 벌써 꼭 맞기 시작하던 것이라 그에게는 다소 작은 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야말로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해 실밥까지 뜯겨 가며 그것을 입고야 말았다. 사벨리치는 실밥이 뜯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거의 울부짖다시피 했다.
부랑자는 나의 선물에 지극히 만족스러워했다. 그는 마차까지 나를 배웅한 뒤 허리 굽혀 절하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나리! 나리의 덕행에 주님의 보답이 있으시길 빕니다. 나리의 은혜는 길이길이 잊지 않겠습니다.’
뾰뜨르는 알지 못하겠지만 운명의 순간이었다. 순간의 작은 선행이 목숨까지 살려주는 큰 보답으로 돌아왔으니, 정말 대단한 운명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운명의 순간에 작은 토끼 가죽 외투의 실밥까지 뜯어가며 입는 농부나, 그걸 울부짖으며 바라보는 사벨리치의 모습 때문에 낄낄 대며 웃었던 명장면 중 하나가 되었다.
49 그는 내 손에서 수첩을 낚어채더니 더없이 신랄하게 나를 우롱해 가며 한줄 한줄, 단어 하나하나를 무자비하게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수첩을 도로 빼앗은 다음 이제 앞으로는 절대로 내가 쓴 글을 보여주지 않겠노라고 말했다. 쉬바브리는 나의 이 같은 위협조차 비웃었다.
‘어디 두고 보자고.’ 그가 말했다. ‘과연 지금 말한 것을 지킬지. 이반 꾸즈미치가 식사 전에 보드까 한 병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시인한테는 독자가 필요한 법이야. 그런데 참, 자네가 사랑의 번뇌와 타오르는 열정을 고백한 이 마샤란 아가씨는 누군가? 마리야 이바노브나 맞지?’
사랑과 정열로 쓴 시를 무자비하게 난도질 하고, 독자 없는 시인은 없다는 입바른 소리를 하고, 짝사랑의 상대까지 눈치 챈 쉬바브린이 정말 얄미웠을 거다. 나도 그랬으니. 근데 나중에 이 소설을 더욱 재미지게 하는 엄청난 캐릭터였다니! 쉬바브린!! 참 음흉하다!
83 고문은 옛말부터 우리의 사법제도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으므로 그것을 폐지하라는 여제 폐하의 은혜로우신 칙령도 오랫동안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피고 자신의 자백은 그를 제대로 기소하는 데 불가피한 절차라고들 생각했지만 사실 그것은 전혀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건전한 법률적 사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생각이다. 피고의 범죄 부인이 그의 무죄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없다면 그의 자백은 더 더욱 유죄의 증거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이 야만적인 관습의 폐지를 유감으로 생각하는 늙은 판사들의 얘기를 나는 가끔 듣는다. 그러니 당시에는 판사건 피고건 간에 아무도 고문의 불가피성을 의심하지 않는 게 당연했다.
주인공의 순진하고 자유로우며 열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당시 러시아의 낡은 사법체제에 대한 비판이다. 푸쉬킨의 생각이 고스란히 녹아들어가 있겠지. ‘피고인의 범죄에 대한 부인이 그의 무죄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없다면 그의 자백은 더 더욱 유죄의 증거가 될 수 없다’는 논리가 가슴에 와 닿았다. 특히 고문에 의한 자백이라면 더욱 그렇겠지!
98 폭도 대장들 사이에서 까자끄 식 까프딴을 입고 머리를 둥그렇게 깎은 쉬바브린을 발견하고는 너무도 놀라 말도 안 나올 지경이 되었다.
엄청나게 충격적인 장면! 소설이 더욱 재미있어지는 장면이기도 했다.
118 그는 뿌가쵸프와 나의 관계가 우호적인 것을 보고는 그것을 이용할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약삭빠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나는 그의 미련한 열성을 꾸짖으려 했지만 웃음이 터져 나오는 바람에 그만두고 말았다.
사벨리치가 말했다. ‘웃으세요, 도련님. 마음대로 웃으시라고요. 하지만 나중에 살림살이를 모조리 새로 장만해야 할 때가 와도 웃음이 나올지 두고 봅시다.’
이 장면에서 얼마나 낄낄대며 웃었던지. 이 소설에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를 찾으라면 매우 단선적인 캐릭터지만 자기 직분에 충실하고, 일관된 태도를 끝까지 보이는 사벨리치일 것이다. 엄숙하고 긴장된 적진에서, 주인과 약간의 친분이 보인다고 약탈당한 물품이 적힌 종이를 내밀다니!! 정말 못 말린다! 하지만 너무 좋다. 이 캐릭터!
132 ‘당분간은 쉬바브린의 부인이 되는 게 더 나을걸세. 그놈이 지금은 그 아가씨를 보호해 줄 수 있으니까, 그놈을 총살시키고 나면 하느님의 뜻대로 다른 구혼자들이 나타날걸세. 어여쁜 과부들은 그냥 놓아두질 않으니까. 그러니까 무슨 얘기냐 하면 과부가 처녀보다 더 쉽게 신랑을 찾는다는 거지.’
당시 세태가 그랬을 거라고 짐작은 되는데. 순진한 주인공에게 던지는 농담이었겠지만, 주인공은 정말 화가 났을 거다. 뿌가초프의 인간적인 면모가 보이기도 하는 대목.
148 ‘내 어렸을 적에 깔미끄 할멈이 해준 얘기를 들려줌세. 어느 날 매가 까마귀에게 물었다네. ~~ <여보게 까마귀, 안 되겠어. 3백 년 동안 썩은 고기를 먹느니 한 번이라도 산 짐승의 피를 쭉 들이키는 게 낫겠어. 나중 일은 내가 알 바 아니지!> 이 깔미끄 얘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재미있군요. 그렇지만 살인과 도둑질로 살아가는 건 죽은 짐승을 쪼아먹는 거나 마찬가지란 생각이 듭니다.’
주인공과 뿌가초프의 생각이 다름을 매우 선명하게 드러내는 장면! 푸쉬킨이 하고 싶었던 가장 핵심적인 이야기가 바로 깔미끄 할멈이 이야기한 까마귀와 독수리 이야기가 아닐까? 위태롭지만 단 한 순간의 자유로운 삶을 살아보는 것이, 몇 백 년간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보다 더 인간적인 삶이라는 것을 푸쉬킨은 뿌가초프가 전해준 러시아 민담으로 대신 전해주고 있는 것이리라.
2018.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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