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의 거리(김소연)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는 듣기가 불편하다. 식민지 상황에 좋은 일이 어찌 있을수 있겠나. 사는 것 자체만으로도 고달픈 기층민, 독립운동가들에게 고통의 무게가 더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데 무등도서관 문학실에서 책을 고르다, 명혜를 쓴 작가의 이름에 이끌려 이 책을 든 뒤로 손을 놓기가 어려웠다. 이야기속 인물들의 삶 속에서 지금도 공감되는 당대성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제강점기의 모순들이 현재까지도 이어져 있다는 것, 아직도 친일부역을 미화하거나 감추려는 시도들이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는 것, 무엇보다 사회적으로 반상의 차별이 돈으로 대체되어 신분제가 유지되고 있으며, 오히려 양극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질적으로, 정치적으로 더 나아지기는 했지만, 시민의식의 성장이라는 눈에서 볼 때, 자본으로 인한 비인간화, 즉 야만의 시대라는 점에서는 진보를 이야기하기 참 어렵다.

작가는 당시 조선보다 더 근대화된 일본의 여러 가지 사회의 모습(대지진 때 조선인을 학살하고도 사과하지 않는. 양의학을 공부한 친구 아버지가 의붓딸을 팔아넘기고 성폭행하는 부분에서)에서 근대성이 '야만'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좁은 지식으로 근대성은 주체와 객체의 대립 속에서 나 중심의, 타인을 대상화하는 시각이다. 그런 면에서 주인공 동천은 근대성을 뛰어넘는 나, 더 큰 나, 수단이 되지 않는 우리를 찾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가 다음 이야기로 쓰고 있다는 '승냥이'가 만주를 배경으로 어떻게 진보한 역사를 이야기할지 사뭇 궁금하다.

이 작품에서 눈에 띠는 사람이 있다.
바로 '다케다 선생님'이다. 다케다 선생님은 주인공 동천이가 공부할 수 있는 꿈을 키워준 분이기도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가 도를 더해갈 때에는 군국주의에 경도된 인물도 등장한다.
교사라는 직업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 속에는 인상깊은 구절이 많다. 

87 "지구가 둥근 것은 어느 나라든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뜻 아닐까? 책 맨 뒷장에 인쇄된 세계 전도를 보렴. 유럽과 미주 대륙이 가운데를 차지하고 우리 일본이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지? 마치 방 한구석에 처박혀 있는 손수건처럼 보이잖아. 하지만 우리 일본을 중심에 놓고 세계 지도를 다시 배치한다면 유럽과 미주 대륙이 일본을 호위하는 양 날개처럼 보일 거야. 지구는 이렇게 둥글다. 그러니 어떤 나라가 세상의 중심을 차지하느냐는 그 나라의 힘에 달린 것이지, 위치나 크기에 달린 것이 아니란 얘기다. 알겠지?

103 "지구는 둥글다고 했어. 누구든 기회를 잡고 노력하면 세상의 중심이 될 수있다고 했어. 그래서 세상이 둥근 것이라고."
동천은 주문을 외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똑같은 말을 몇 번씩 되뇌자 그 말은 말에서 그치지 않고 현실이 되는 힘을 싣는 것 같았다.
"둥근 세상인데 내가 나의 중심이 된들 누가 뭐랄 테야?"
동천 얼굴에 가볍지 않은 웃음이 지어졌다. 아무도 자신의 앞날을 도모해 주는 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자 오기가 생겼다.
'아무도 날 끌어 주지 않는다면 내가 나를 이끌면 되지. 세상의 중심에 스스로 서면 그만 아니야?'

185 "공부해서 무엇하려고?"
동천의 가슴을 때렸던 질문은 그 후에도 이따금 머릿속에서 메아리처럼 울리곤 했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여기에 와 있나? 무엇 때문에 홀로 계신 어머니를 버리고 일본 사람 밑에서 일하며 일본 학교가 가르치는 공부에 매달리고 있는가? 나는 무엇 때문에 이 힘든 고학 생활을 버티는가?
그런데 방금 박열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가 동천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동천의 눈이 어둠의 미로를 빠져나올 실마리를 찾은 것처럼 빛났다.
'나'를 넘어서는 '나'란 무엇인가? (중략)
그러나 오늘, 동천은 드디오 좁은 의미의 '나'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나로 시작하여 나라로, 민족으로 확장되는 의미는 안개 속 미로를 헤치고 나가게 해 줄 나침반과 다르지 않았다.

242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건너온 일본에서 가축처럼 도륙된 동포들을 생각해 보게. 살해를 당한 시신은 냇바닥 거름으로 썩고 있는데 살인범들은 연기처럼 사라졌어. 죽은 사람은 있는데 죽인 사람이 없는 이 기묘한 사건을 어디 가서 하소연한다 말인가."
"동경 어디서도 조선인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꼭 저 혼자 무서운 악몽에 시달린 것 같아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거리를 활보하는 일본 사람들 얼굴이 무섭고 징그럽습니다." (중략)
"남을 겁니다. 죽은 이들을 위해서라도 도망치지 않겠어요."

277 박열은 끌려 나가면서 방청석 쪽을 잠깐 쳐다보았지만 동천을 발견한 것 같지는 않았다. 동천은 사형을 선고한다,라는 말이 던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박열의 두루마기 자락을 바라보았다. 사람에 의해서 사람의 목숨이 공식적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은 모순 그 자체였다. 복잡다단한 절차와 법 조항을 앞세워 죽이고 싶은 사람을 떳떳하게 죽일 수 있는 권리가 어디에서 오는지 의아할 뿐이었다. 그러나 당당함을 잃지 않는 두 사람의 행동을 보며 동천은, 이미 죽음은 두 사람을 속박하지도 위협하지도 못하게 되어 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아나키스트는 오직 행동으로 선언한다."

300 일본에서 공부하는 고학생 중 사회주의 이론에 솔깃하지 않은 이는 드물었다. 러시아 혁명이 불과 십 년 전 일이었다. 러시아에서 공산당이 집권을 하고 인류사 최초의 공산국 선언을 하자 국국의 사회주의자들은 한껏 고무되었다. 사회주의는 이론과 이념을 넘어서는 현실적인 힘이자 전 세계를 휩쓰는 제국 자본주의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대항마로 주목받았다.
일본에서도 사회주의를 현 천황제 내각에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힘으로 여겼다. 사회주의 운동은 여타 운동 세력과는 다르게 매우 조직적이고 체계적이었다. 논리적인 설득력과 빈틈없는 이론 덕분에 지식을 갖춘 식자층일수록 사회주의 강령에 혹하고 했다. 특히 조선 유학생들을 매혹한 건 '조선의 독립은 우리의 슬로건 중 하나다.'라는 그들의 주장이었다.(중략)
'누구를 위한 독립인가? 조선의 독립이 겨우 사회주의자들이 최종 목적으로 삼는 정권 쟁취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단 말인가? 도대체 저들은 무슨 생각으로 나와 같은 조선 유학생을 반기는 거지? 그들에게 조선의 독립이야말로 필요에 의해서 잠깐 빌려 입는 옷이 아닐까....'

349 "내가 범 가죽을 뒤집어쓴 개라고?무슨 당찮은 말씀. 범 가죽을 쓴 개는 내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야. 태생을 숨기려고 남의 나라에까지 기어들어 와 설치는 꼬락서니라니. 그렇다고 본성이 어디 갈까? 맘에 안 들면 앞뒤 재지 않고 물어뜯는 그 성질머리, 시끄럽게 짖어 대는 꼴이 바로 당신이라고." (중략)
"그런 식으로 가문과 재산을 지킨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나."
"의미? 가문과 재산을 지키는 데 의미는 왜 따져? 독립운동이라니 이 철없는 작자야, 시대가 뒤집혀 일인들의 세상이야. 물길을 거슬러도 유분수지, 이미 뒤바뀐 세상에서 치기 어린 공명심만 앞세운다고 영웅이라도 된 줄 알아? 하긴 서출 따위가 가문을 책임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 턱이 없지."

371 거복은 자신도 따지고 보면 조선 내에서 벌어지는 식량 부족 사태에 한몫하는 친일파나 다름없다고 했다.
"쌀장수가 무슨 친일파씩이나 되냐?"
동천이 당찮다며 웃자 거복이 정색을 했다.
"난 배운 것도 없고 신식 교육이라야 겨우 동천이 너와 함께 다녔던 소학교가 다지만 쌀 팔러 다니다 보면 그런 결론이 나오더라고. 지금 같은 왜정 시대에 밥술이나 뜬단 말은 세류에 순응하는 친일이란 뜻이나 다름없지 뭔가."
"자네 말대로라면 생계를 위한 친일과 세도를 위한 친일은 구별되어야 마땅해."

397 '내가 일본에서 보낸 칠 년은 야만의 세월이었다. 야만이 지배하는 거리에서 야만에 물들지 않으려 얼마나 애를 썼던가. 그런데도 야만에 젖어들어 또 얼마나 괴로워했던가.'
동천은 별이 가득한 하늘을 보며 독립지사들이 모여든다는 만주를 그렸다. 끝없이 펼쳐진 그 벌판 어딘가에 동천이 생을 바칠 독립단이 웅거하고 있을 터였다. 그곳에서 동천은 종첩의 자식이라는 출생과 동경 고학생이라는 신분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될 것이다. 비록 그것이 죽음과 고난의 다른 예명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야만의 거리
국내도서
저자 : 김소연
출판 : 창비(창작과비평사) 2014.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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