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이순신 지음, 서해문집)



난중일기(임진년 아침이 밝아오다)(오래된 책방07)

저자
이순신 지음
출판사
서해문집 | 2004-09-06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이순신이 임진왜란의 한복판에서 써내려간 고뇌와 결단의 기록 난중...
가격비교


장장 7년에 달하는 전쟁 일대기를 두 권이나 독파했다.

<징비록>을 읽고, <난중일기>를 놓칠 수 없었다. 유성룡과 이순신을 오고가며 힘들고 비참했던 전란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전쟁의 한 가운데, 조선을 구하기 위해 고뇌하는 두 인간의 모습을 아주 조금 엿볼 수 있었다고 할까?

일기라는 개인적인 기록의 형식이었기에 더욱 감성적으로 와 닿았던 것 같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 미화된 성웅 이순신이 아닌, 인간 이순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에 뜻 깊은 독서였다. 

이순신 장군과 같은 이유는 아니지만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 날이 새는 것을 지켜보며, <난중일기>에 나오는 인상 깊은 구절을 옮겨 보았다. 상당히 많은 분량이지만, 솔직히 시간이 된다면 필사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면서 존경의 마음을 표하고 싶기도 하고.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자식의 마음, 정신적 지지자이자 운명의 소울메이트 유성룡, 라이벌(?) 원균에 대한 감정, 군사들을 다루는 방식, 사소한 꿈에 대해서도 기록하는 자세, 종들의 이름까지도 기억하는 디테일 등 읽으면서 함께 분노하고, 기뻐하며, 잠 못 이루며, 많은 공부를 하였다.

2주에 걸친 의미 있는 독서였다. 뿌듯하다.


-인상 깊은 구절-

<1592년 왜적의 침략이 시작되다>
25 [1월 16일] 성 밑에 사는 병졸 박몽세는 석수장이인데 선생원에 쓸 돌 뜨는 데로 가서는 동네 개를 잡아먹는 등 민폐를 끼쳤으므로 곤장 80대를 때렸다.
⇒ 이런 사소한 일을 기록하는 자세와, 부하들의 군기를 엄격히 다스리는 이순신의 풍모를 느낄 수 있었다.

33 [3월 5일] 좌의정(유성룡)이 편지와 함께 『증손전수방략』이라는 책을 보내왔다. 수륙전과 불로 공격하는 전술 등에 관한 것이 낱낱이 설명되어 있었다. 참으로 만고에 보기 드문 뛰어난 저술이다.
⇒ 유성룡과의 친분이 일기에 나타나 무척 반가웠다. 먼 곳에 있고, 전란 중에도 두 사람의 교류는 끊어지지 않았고, 수차례 편지 등을 통해 전쟁에 대한 준비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둔전이나 시장의 설치도 유성룡과 이순신의 합작품이었다는 주장을 인터넷에서 읽기도 했다.

67 [견내량파왜병장 7월 10일] 하루 내내 다 쳐부수었으며, 그 가운데 살아남은 왜적들은 모두 육지로 달아나 버렸다. 그곳 백성 가운데 산골에 숨어 있는 자가 꽤 많았다. 만일 왜선을 모두 불태워 왜적을 도망할 곳 없는 막다른 골목의 도적이 되게 한다면 숨어 있는 우리 백성들이 살육을 당할지도 모르므로 잠시 1리쯤 물러 나와 밤을 지냈다.
⇒ 오직 승리와 전공만 따진다면 왜적을 몰아붙일 수도 있겠으나, 숨어있는 백성들까지 생각하는 세심함에 무척이나 탄복했다.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87 [2월 23일] 원 수사는 너무도 음흉하여 무어라 표현할 수가 없다.
⇒ 내가 읽은 바로는 여기서부터 원균에 대한 질책이 시작되는 것 같다. 원균에 대한 표현 중 가장 많은 것이 ‘가소(可笑)롭다’인데, 구체적인 원균의 악행을 기록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 상상이 되긴 하지만, 원균에 대한 지금의 논란이나 원균의 1등공신 책봉은 수정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이순신의 도덕성을 보는 듯도 하다. 구체적으로 적어서 속이 좁은 사람이라는 후세 사람들의 지적이 두려웠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원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나도 속으로 비웃었다.

104 [5월 27일] 경상 우병사(최경회)의 답장이 왔는데 송 경략이 보낸 불화살을 원균이 혼자 쓴다고 한다. 그 계략이 우습기 짝이 없다.
⇒ 1592년 경상도 수군을 다 잃고, 이순신에게 붙어 다니며 어떻게 하면 자신의 이름을 내세울 전공을 세울까 머리를 굴리는 원균의 모습이 떠오른다. 정말 가소롭다.

108 [6월 10일] 새벽 2시쯤에 경상 수사 원균의 공문이 왔는데, 내일 새벽에 진군하여 싸움을 벌이자는 것이었다. 그 음흉한 꾀와 시기심은 이루 말할 길이 없다. 그래서 이날 밤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네 고을 군량에 대한 공문을 만들어 보냈다.
⇒ 또 원균에 대한 대목이다. 이런 대목을 읽을 때마다 여러 가지 업무에 시달리면서, 잔꾀와 계략만 펼치고 있는 원균까지 데리고 있어야 하는 이순신의 고뇌가 보인다. 솔직히 나도 일이 많은 것보다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데, 100배 공감이 되는 대목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새벽 2시까지 공문을 만들어 보내고, 또 일기를 쓰고 있는 이순신에 감탄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새벽 3시 38분에 깨어 있지만, 전쟁 중에 쉬지도 못하는 사람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108 [6월 12일] 비가 오락가락하였다. 아침에 흰 머리털 여남은 오라기를 뽑았다. 흰 머리카락이 있다고 하여 어찌 싫어할 일이겠냐만 위로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뽑은 것이다. 하루 내내 혼자 앉아 있었다.
⇒ 이후로도 어머니의 안부를 생각하고, 어머니 생신에 술 한 잔 올리지 못한 일들 등 수없이 많은 이순신의 ‘사모곡’이 나온다. 모두 감동스럽지만, 이 부분이 제일 인상 깊다. 이순신이 아플 때 하염없이 머리를 빗던 장면도 떠오른다. 이순신도 혼자 있을 때, 우리처럼 유독 감상적이 되는 것 같다.

129 [7월 26일] 흥양 현감이 와서 명절 음식을 대접하는데, 원균이 술을 마시자고 하여 조금 주었더니, 잔뜩 취하여 흉측한 말을 마구 지껄였다.
⇒ 또 원균이다.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는데, 왜 이리 이런 부분에 마음이 쓰이는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누구에 대한 투사일까? ^^ 근데 원균도 참 불쌍하다. 평소에는 대놓고 이야기하지 못하다가 술의 힘을 빌려 속마음을 이야기하니. 원균의 술주정 받아주는 이순신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후에도 이런 비슷한 장면 많이 나온다. 

129 [7월 28일] 원 수사가 와서 흉악하고 속이는 말을 마구 하였다. 지극히 해괴하였다.
[7월30일] 원수사가 또 와서 영등포에 빨리 가자고 독촉하였다. 흉악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가 거느린 배 25척은 모두 내보내고 다만 일고여덟 척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하니 그 마음 씀씀이와 일하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앗다.
⇒ 거의 이틀 걸려 원균에 대한 이야기 일색이다. 당시 원균에 대한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었을 것 같다. 그리고 원균이 이순신 앞에서도 이러는데, 당시 조정에 이순신을 헐뜯는 상소를 올리지 않았는지 의심스럽다.


<1594년 명・일간에 강화가 진행되다>
141 [1월 18일] 전윤이 말하기를 “수군을 거창에서 모집해 왔는데, 이 편에 들으니 원수(권율)가 방해하려 했다고 합니다.” 하였다. 우습구나, 예로부터 남의 공을 시기함이 이러하니 한탄한들 어쩔 것인가! 
⇒ 일기에는 권율 원수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행주대첩으로 큰 승리를 거두고 몇 번의 위기가 있었으나 도원수가 된 권율은 <징비록>에도 등장한다. 하지만 그의 인간됨은 <징비록>이나 <난중일기>나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전쟁 중에 같은 편 안 장수들의 심리적인 전공다툼이 있었음이 느껴진다. 어쨌든 1599년에 돌아가셨다니, 전쟁터에 거의 마지막 일생을 바쳤던 것임에 틀림없다.

146 [2월 5일] 맑다.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좋은 말을 타고 바위가 겹겹이 쌓여 있는 큰 고개를 바로 내려갔다. 봉우리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구불구불 동서로 뻗어 있었다. 봉우리 위의 평평한 곳에 자리를 잡으려고 하는 순간에 잠에서 깨었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또 꿈에 미인 하나가 홀로 앉아 손짓을 했는데,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응하지 않았다. 우스웠다.
⇒ 일기에 많이 나오는 것이 ‘원균, 어머니, 날씨, 노비가 오고가는 이야기, 활쏘기’인데, 또 ‘꿈 이야기’도 있다. 꿈을 꾸고 점을 치기도 하고, 꿈내용을 굉장히 자세히 적어 놓은 기록이 많다. 이 꿈은 부끄러울 법도 한데, 솔직히 털어놓아 매우 인간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미인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면 여기에 적지도 않았을까? ^^

151 [2월 16일] 맑다. 아침에 흥양 현감과 순천 부사가 왔다. 흥양 현감이 암행어사 밀계 초본을 가지고 왔다. 임실, 무장, 영암, 낙안의 수령을 파면하고, 순천 부사는 탐관오리의 으뜸으로 거론하고, 기타 담양, 진원, 나주목, 장성, 창평 등의 수령은 나쁜 짓을 덮어 주고 상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임금을 속이는 것이 이렇게 갈 데까지 갔다. 나랏일이 이 모양이니 나라가 평정될 리가 없다. 천장만 올려다볼 뿐이다. 또 그 가운데 ‘수군을 친척 가운데서 뽑는 일과 장정 넷 가운데서 장정 둘을 전장에 보내는 일’을 논하고 있는데 이를 심하게 비난하고 있었다. 암행어사 유몽인은 국가의 위급한 난리를 생각하지 않고 눈앞의 일을 꾸며 갈 것에만 힘써서, 남쪽의 헛된 소리에만 귀 기울인 것이다. 나라를 그르치는 교활하고 간사한 말이 진회가 무목(악비)을 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나라 때문에 겪는 아픔이 더욱 심하다.
⇒ 이 대목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어우야담>의 그 유몽인이 바로 이순신이 비난한 암행어사라고? 유몽인데 대한 자료를 찾아보니, 암행어사로서의 행적은 찾기 힘들었다. 하지만 글을 잘 써서 선조의 눈에 들었다는 것이 있고, 성혼의 문하에 있었으나 경망하다는 이유로 쫓겨났다는 기록이 있었다. 이순신에 의해 간신 진회에 까지 비유된 유몽인, 진실을 알 길이 없으나 이순신이 근거없이 비난하지는 않았으리라. 원균은 그런 사람이라 쳐도, <징비록>에 나오는 정철이나 <난중일기>의 유몽인은 국문학에서는 나름 알아주는 인물인데, 개인적으로 볼 때 참 실망스러울 뿐이다.

158 [3월 13일] 오후에 원 수사가 와서 자기의 잘못을 털어 놓았다. 그래서 장계를 다시 가져오게 하여 원사진, 이응원 등이 가짜 왜적을 목 베어 바친 대목을 고쳐 보냈다.
⇒ 이 때 이순신이 많이 아팠다는 기록이 며칠 째 계속된다. 그 와중에도 전공을 세워보겠다고, 조선의 어부들을 왜군으로 분장하게 하여 목 베어 바친 일에 대해 알고 분개한다. 그래도 잘못을 뉘우치니 장계까지 고쳐주는 이순신의 큰 씀씀이가 돋보인다.

172 [6월 4일] 충청 수사, 미조항 첨사 그리고 웅천 현감이 보러 왔다. 종정도놀이를 하게 하였다. 저녁에 겸사복이 왕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 그 글 가운데 “수군 여러 장수와 경상도의 장수가 서로 화목하지 못하니, 이제부터 예전의 나쁜 습관을 모두 바꾸라.”는 말씀이 있었다. 통탄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는 원균이 취하여 망발을 부렸기 때문이다.
⇒ 이순신의 군사들을 잘 다룰 줄 아는 명장이었다. 훈련과 전쟁준비는 엄격하게, 놀 때는 놀고, 먹일 때는 아낌없이 군사들을 배불리 먹였다. 그리고 선조의 교지! 원균이 분명 조정을 분란시킨 것임에 틀림없지만, 선조의 군주로서의 아주 작은 그릇도 여기에 조금씩 비치는 것 같다. 이순신도 조금씩 실망하고 있었으리라. 

174 [6월 15일] 신경황이 들어왔는데 영의정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으로 영의정보다 더한 분이 없을 것이다.
⇒ 선조의 교지가 있은 후, 아마 유성룡이 이순신을 많이 걱정했을 것 같다. 그래서 혹시 위로의 편지를 보낸 것은 아닌지?

180 [7월 12일] 순변사에게 유 정승이 세상을 떠낫다는 부음이 왔다고 한다. 이는 필시 유 정승을 질투하는 자가 말을 만들어 그를 훼손하려는 것이리라. 분한 마음을 이길 길이 없다. 저녁에 마음이 매우 어지러웠다. 혼자 빈 동헌에 앉아 있으니 마음을 걷잡을 길이 없고 걱정이 더욱 심해져서 밤 깊도록 잠들지 못하였다. 유 정승이 만약 돌아가셨다면 나랏일을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
⇒ 실제로 유성룡은 이순신보다 후에 죽지만, 이순신과 유성룡의 정신적 유대가 얼마나 끈끈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때 얼마나 걱정이 많았을까? 유성룡이 실각하는 날, 이순신이 전사했다는 점도 특별한 그들의 운명적 연결고리를 생각하게 한다. 왕의 마음이 떠나도, 주변 사람들이 시기해도 백성을 위하는 마음과 유성룡의 지지와 우정이 있었기에 성웅 이순신도 있었으리라.

191 [8월 17일] 교서에 절한 뒤 원수와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 다음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더니 오해가 많이 풀어지는 기색이었다. 원수가 원 수사를 심하게 꾸중하니 그가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가소로웠다.
⇒ 권율과 이순신의 첫 만남이다.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한 동안 오해가 많았나 보다. 원균을 혼내는 장면이 통쾌하였다. 후에 이순신이 백의종군하고, 원균이 통제사로 있을 때 싸움에 나가지 않는 원균에게 권율이 곤장을 치기도 했다. 물론 그 때문에 무능한 원균의 수하에 있는(이순신이 다 키워놓은) 수군이 대패하기는 하지만. 쩝!

195 [9월 3일] 비가 조금 내렸다. 새벽에 비밀 교지가 들어왔는데 “수륙 여러 장수가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볼 뿐, 계책이라도 하나 세워서 토벌하려고 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3년 동안 바다에 있으면서 그런 적이 없다. 여러 장수와 맹세하여 목숨을 걸고 복수할 뜻으로 날을 보내고 있지만, 험한 소굴에 웅크리고 있는 적을 가볍게 나아가 공격할 수가 없을 뿐이다. 하물며 자기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크게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루 내내 바람이 불었다. 초저녁에 촛불을 밝히고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나랏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데도 안으로는 구제할 방책이 없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 안전한 후방에서 탁상공론만 하고 있는 조정의 신하들과, 전방에서 조급하지 않게 작전을 세우고 훈련하고 있는 조선의 장병들이 교차되는 모습이다. 이순신이 무패의 장수가 된 것은 특히 그의 조심스럽고 디테일한 계획과 때를 아는 안목이 있었던 것인데, 조정은 닦달만 하고 있다. 바람이 부는 날 혼자 촛불을 켜고 고뇌하는 이순신이 떠올라 무척 안타까웠다. 


<1595년 휴전 상태가 계속되는 속에서>
215 [2월 19일] 조금 있다가 여도의 배에서 불이 났는데 광양, 순천, 녹도의 배까지 옮겨 붙어 네 척이 불탔다.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
⇒ 나중에 칠천량에서 자신이 키운 수군이 대패해서 겨우 13척 남았을 때 이순신의 마음은 어땠을까?


<1596년 왜적이 드디어 철수하다>
268 [1월 12일] 새벽 2시 쯤 꿈을 꾸었는데, 잘 알지 못하는 곳에 가서 영의정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동안 둘이 다 의관을 벗어 놓고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서로 나라 걱정을 털어놓다가 끝내는 억울한 사정가지 쏟아 놓았다. 그러는 동안 바람이 불고 비가 퍼부어서 계속 함께 있었다. 조용히 이야기를 계속하는 사이, 만일 서쪽의 적이 재빠르게 들어오고 남쪽의 적까지 덤빈다면 임금이 어디로 갈 것인가를 되풀이하여 걱정하다가 할 말을 잊었다. 이전에 영의정이 천식으로 몹시 편찮다고 들었는데 나았는지 모르겠다. 글자로 점을 쳐보았더니, 바람이 물결을 일으키는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또 오늘 어떤 길흉의 조짐이 있는지 들으려고 점을 쳐 보니, 가난한 사람이 보배를 얻는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이 괘는 매우 좋구나! 매우 좋구나!
⇒ 이 일기를 유성룡은 보았는지 모르겠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유성룡을 꿈속에 불러내어 나라 걱정을 함께 했을까? 의관을 벗어놓은 채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대목도 인상적이다. 역시 죽마고우다. 그리고 이순신이 잘 하는 점치는 것도. 그런데 대체로 꿈이나 점괘들이 들어맞는다는 것이 신기했다.

281 [2월 28일] 장흥 부사는 체찰사의 종사관이 군령을 가지고 자기를 체포해 가려고 왔다고 했다. 도 전라도 수군 가운데 우도의 수군은 좌도와 우도를 왔다갔다 하면서 제주와 진도를 도와주라는 명령도 있다고 한다. 참 어이가 없다. 조정의 계책이 어찌 이럴 수 있는가. 나라의 일이 이렇고 보니 어떻게 할 것인가.
⇒ 탁상행정으로 말도 안 되는 지시를 받는 이순신의 모습이 그려진다. 얼마나 답답했을까? 노량에서 전사하지 않았다면, 화병으로 돌아가셨을지도 모르겠다. 이때의 체찰사는 이원익이다. 참.

296 [5월 5일] 술이 몇 차례 돌고 나서 경상 수사가 씨름을 붙인 결과 낙안 군수 임계형이 일등이었다. 밤이 깊도록 즐거이 뛰놀게 하였는데 그것은 내 스스로 즐기자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고생하는 장수들의 수고를 풀어 주자는 생각에서였다.
⇒ 단옷날 이야기다. 일기 속에는 전쟁 중에도 명절을 챙기는 모습이 나오는데, 완급을 조절하며 병사들을 조련하는 이순신의 마음 씀씀이가 느껴진다.

308 [7월 13일] 해가 진 뒤에 항복한 왜인들이 광대놀이를 벌였다. 장수 된 사람으로서는 그냥 두고 볼 일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마당놀음 한 번 하기를 간절히 바라므로 금하지 않았다.
⇒ 항복한 왜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간혹 나오는데, 광대놀음을 하였다고 하니 신기해서 적어 보았다. 어땠을까? 그리고 항복한 왜인들의 마음까지 헤아리는 이순신의 모습이 역시 감탄스러웠다.


<1597년 백의종군에 나서다>
335 [4월 9일] 동네 사람들이 각기 술병을 들고 와서 멀리 떠나는 길을 위로하였다. 인정상 거절하지 못하고 몹시 취하도록 마시고 헤어졌다. 홍군우가 노래를 부르고 이 별좌도 노래를 불렀다. 나는 노래를 들어도 즐겁지가 않았다. 금부도사는 술을 잘 마시는데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 백의종군을 떠나는 이순신의 모습과 그 주변 사람들이 모습이 드라마처럼 펼쳐지는 것 같았다. 이순신에게 들려준 노래는 어떤 노래였을까?

337 [4월 13일] 일찍 아침을 먹고 어머니를 마중하려고 바닷가로 가는 길에 홍 찰방 집에 들렀다. ~ 조금 있자니 배에서 달려온 종 순화가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며 뒹굴었더니 하늘에 솟아 있는 해조차 캄캄하였다. 곧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가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니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듯하여 모두 다 적을 수가 없다. 뒷날 대강 적으리라.
⇒ 그렇게 항상 마음 졸이며 어머님의 만수무강을 빌었는데, 백의종군길에 어머님의 부음을 들은 이순신의 심정은 어땠을까? 

344 [5월 8일] 음흉한 원균이 편지를 보내어 조문하였는데 이것은 원수가 명령하였기 때문이다. 이경신이 한산도에서 와서 음흉한 원균이 저지른 일에 대하여 많이 말하였는데, “그가 데리고 온 서리를 곡식을 팔아 오라는 구실로 육지로 보내 놓고, 그 처를 겁탈하려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여자는 악을 쓰면서 말을 듣지 않았는데 밖으로 나와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하는 이야기도 전했다.
⇒ 이순신을 백의종군 시켜놓고 통제사가 되어 하는 짓이 이렇다.

347 [5월 20일] 어둘 무렵에 가서 뵈었더니 체찰사는 흰옷을 입고 기다리고 있었다. 조용히 일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체찰사는 연방 탄식해 마지않았다. 밤이 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일찌기 임금의 분부가 있었는데, 그 속에 거북한 말이 많아서 마음속으로 의심스럽고 그 뜻을 알지 못하였습니다.”하였다. 또 말하되 “음흉한 사람 원균은 무고하는 짓이 매우 많지만 하늘이 살피지 못하니 나랏일을 어찌하겠습니까?”하는 것이었다. 
⇒ 체찰사와 만나 밤늦도록 선조 뒷담을 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서울에 잡혀가 고문 받고, 백의종군하면서 이순신의 마음은 이미 선조를 떠났을 거라 생각한다. 특히 원균을 두둔하는 무리와 선조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이원익도 이에 동조하는..

353 [6월 10일] 아침에 가라말(검정), 워라말(얼룩), 간자말(이마와 뺨이 흰), 유마(갈기는 검고, 배가 흰) 드으이 편자가 덜어져서 갈아 박았다.
⇒ 백의종군 때 말을 돌보는 일을 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의외로 말을 가리키는 말이 많았음을 알았다.

374 [8월 4일] 오후에 곡성에 이르렀다. 그런데 관청과 민가가 온통 비어 있었다. 
⇒ 다시 수군통제사가 되어 전라도 지역을 돌면서 군량미와 군사를 모으는 장면이다. 백의종군 하기 전과 후에 이순신은 거의 모든 전라도를 돌았다. 이순신이 밟지 않은 전라도 땅이 없을 정도? 어쨌든 영광이다. ^^ 

377 [8월 12일] 늦게 거제 현령, 발포 만호가 들어와서 나의 명령을 들었다. 그들에게서 배설이 당황하고 두려워하는 모양을 전해 들었다. 괘씸하고 한탄스럽기 그지없다. 이런 자들이 권세있는 사람들에게 아첨이나 해서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지위에 올라가 국가의 일을 크게 그르치고 있건만, 조정에서 살피지를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 배설 뿐만 아니라, 원균, 선조에게 던지는 분노이리라.

385 [9월 15일]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서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는 모두 오늘의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이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하고 엄하게 약속하였다.
⇒ 명량해전을 앞두고 군사들 앞에서 한 이야기다. 드라마에서 굉장히 엄숙하고 비장하게 다가오는데, 일기에서 이렇게 접하니 또 다시 새롭다.

405 [12월 5일] 도원수의 군관이 왕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이번 선전관 편에, 통제사 이순신이 아직도 권도를 좇지 않아서(상제라고 하여 고기만 먹고 나물 반찬만 먹는 것) 여러 장수들이 걱정스럽게 여긴다고 들었다. 사사로운 정이야 비록 간절하지만 나랏일이 한창 바쁘고, 옛사람의 말에도 ‘전쟁에 나가서 용맹이 없으면 효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전쟁에 나가 용감하려면 소찬이나 먹어서 기력이 떨어진 자로서는 능히 하지 못하는 일이다. 예에도 원칙을 지키는 경이 있고 방편을 취하는 권이 있는 것처럼 고 원칙만 지킬 수는 없는 것이다. 경은 내 뜻을 잘 깨달아서 소찬 먹는 것을 그만두고 권도를 좇도록 하라.”
아울러 고기 반찬을 내려주셨다. 비통하고 비통하였다.
⇒ 선조는 진정 이순신을 생각한 것인가? 약 올리는 것인가? 비통한 이순신의 진정한 마음을 자세히 알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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