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 가족 레시피(손현주)
- 상황별 청소년 소설 추천/가족과 갈등할 때
- 2011. 4. 28.
무능하고 폭력적인 아버지와, 한이 많은 할머니, 욕쟁이 언니, 기저귀 차는 오빠, 뇌경색 삼촌. 그리고 이들과 행인처럼 엮여 사는 주인공 권여울. 이들은 가족이라기보다는 남보다 못한 악연인 듯 서로의 상처를 헤집고 생채기 내기에 바쁘다.
류은이와 참새처럼 ‘관리 받는 년들’ 틈에 끼어, 금새 깨어날 마법이 두렵지만, 피오나 공주 코스프레로 자신의 삶을 위안하며 세상을 헤쳐 나간다. ‘저주 받은 가족’을 벗어나고 싶지만, 결국 파탄에 이른 가정을 지키며 재결합을 꿈꾸게 되는 권여울. 작가는 매우 건강하고 씩씩한 캐릭터를 창조한 것 같다. 여러 가지 상황 도서를 읽으면서 다양한 캐릭터를 만나지만, 여울이 캐릭터만큼 신선하고 건강한 여주인공은 드물 것 같다.
여울이의 눈을 통해 희화적으로 묘사되는 가족의 모습은 해체되어 가는 오늘날 우리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어찌 보면 너무도 현실적인 모습이기에 아이들에게 선뜻 권유하기는 쉽지 않을 듯도 하다.
<인상 깊은 구절>
(18) 할매가 집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할매의 독립선언은 이십 년 전부터 계속되어 온 숙원 사업이었다. 며느리가 없는 이 집에서 원치 않는 안주인 역할을 해야 했던 그 세월이 할매에게는 인고의 시간이었고 팔자 사나운 여자의 운명이었다. 할머니는 며느리의 따뜻한 밥상 대신 육아와 고된 살림살이로 인생 후반을 보내고 있다. 할매의 꿈은 아주 소박하다. 양로원에서 단체 배식을 받고 친구들과 교제하며 살아 보는 건데, 말하자면 남이 차려 준 밥상을 받고 싶다는 이야기다.
✎ 우리 반 복학생의 할머니를 보는듯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복학생의 할머니는 운명이라 생각한다.
(47) 사실 코스튬플레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별로 좋지 않은 건 사실이다. 어떤 사람은 일본 문화를 생각 없이 따라 한다며 한심해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것도 하나의 놀이고, 예술이고, 자기 표현의 한 방법이다. 다른 캐릭터로 분장하고 사람들 앞에 나서면 또 다른 내가 된 것 같아 없던 자신감이 생긴다. 존재감 없던 내가 이곳에서는 관심을 받기도 하고 인기를 얻기도 한다.
✎ 코스튬플레이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심어주었다. 그들의 행동을 존중하지만, 개인적으로 이해하기는 아직 힘들다. 왜 비싼 돈을 들여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분하는지.
(84) 언니가 순순히 나와 준다고 하니 울컥 고마움이 일었다. 이런 사소함에 너덜너덜한 감정이 생긴다는 것도 좀 웃긴다. 역시 가족이라는 건, 한 밥상에서 밥을 먹을 때와 위기 상황일 때 서로를 돌아볼 수밖에 없나 보다.
✎ 공감..공감.. 특히 밥상에서.
(90) 엎드려뻗쳐 대신, “쌤, 사랑해요.”를 외치며 개동구를 향해 입이 찢어져라 웃어 주었다. 그리고 애교스럽게 머리 위로 팔을 모으고 하트를 만들었다. 옆에 있던 참새도 이때다 싶었는지 눈치껏 그 흐느적거리는 긴 팔을 높이 들고 하트를 만들어 “따랑해요!”하고 따라 외쳤다.
순식간에 책상 두드리는 소리와 웃음소리로 교실이 들썩였다. 개동구 역시 검은 동굴 속을 환하게 내보이며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휴우, 살았다.
✎ 불량가족 중에서 왜 여울이가 주인공일 수밖에 없는지 보여주는 장면. 우리 아이들도 여울이같은 긍정성과 발랄함을 지녔으면.
(100) 쉬지 않고 쫑알대는 참새를 바라보며 이 세상에는 딱 두 가지 부류가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관리 받는 년과 방해 받는 년. 참새나 류은이 같은 아이들을 보면 가끔 화날 때가 있다. 아무리 똑같이 놀았다 해도 본질적으로 그 아이들과 나는 삶의 질부터가 다르다. 그 아이들은 마음 놓고 놀아도 최소한 안전망이라도 있지만, 나 같은 아이는 그물망조차 없어 바닥을 지나 지하 3층까지 떨어질 수 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다는 개뼈다귀 같은 소리는 누가 지껄였는지 모르겠다. 만약 그 인간이 내 눈앞에 있다면 머리를 죄다 쥐어뜯어 놓고 싶다. 절대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 이건 내가 십칠 년간 세상을 겪으면서 깨달은 진리다.
✎ 그물망조차 없어 지하3층까지 떨어질 수 있는 아이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114) 선생들은 참 이상하다. 학생이 억울하다고 호소를 하는데도 전혀 귀담아들을 생각을 안 한다. 진실도 계속 거짓이라고 우기는 묘한 인간들이다.
✎ 매점 식권 복사 사건과 선생님의 여울이에 대한 처분은 상식 밖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이 소설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학교교육이 문제는 문제인가 보다.
(144) 요즘 가족에 대한 낯선 감정들 때문에 오락가락할 때가 있다. 아빠는 일이 잘 풀리지 않는지 틈만 나면 줄담배를 피우기 예사다. 그럴 때면 아빠의 팔자 주름이 더 깊게 패어 노인처럼 보이곤 한다. 시도 때도 없이 불퉁거리던 아빠지만 늙긴 늙은 모양이다. 목소리에 힘도 없고 즐겨 하던 고스톱 게임도 하지 않는다. 한 번도 아빠가 늙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큰소리 탕탕 치면서 성질만 부릴 것 같은 아빠가 맥이 풀려 거실에 앉아 있으니 마음이 편치가 않다. 집안 분위기 때문인지 오빠의 빈방도 언니의 빈 옷장도 더욱 허전하게만 보인다. 이런 걸 철드는 거라고 하는 건가, 도통 감이 잡히지를 않는다.
✎ 처음 문장이 와 닿는다. 우리가 통념상 가지고 있는 가족이라는 관념은 흔들리고 있다. 가족은 짐이면서 위안이고, 폭력이면서 안식일 수 있다는 아이러니한 존재다. 특히 요즘 아이들에게.
(196) 재미있는 일들만 생각하고 싶은데 이놈의 집구석은 사람을 깃털처럼 가볍게 놔두질 않는다. 알고 보면 다들 자기 앞에 놓인 일들이 감당이 안 되어 본의 아니게 서로를 괴롭혔는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나는 다른 가족의 삶 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지금 혼자 남은 이 상황이 마음에 썩 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마음 깊은 곳에서 느리게 꿈틀대는 알 수 없는 움직임들 때문에 혼란스럽다.
이제 나는 원치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위태로운 가장이 되어 버렸다. 어쩌면 수염이 하얗게 뒤덮여서야 나올 아빠를, 나만 보면 욕쟁이로 변하는 저주받은 입을 가진 언니를, 기저귀를 차고 하얀 일을 드러내며 싱거운 웃음을 날리는 오빠를, 내게 가장 오의적인 뇌경색 삼촌을, 그리고 내 가슴속에서 붉은색 드레슬 입고 우아하게 춤을 추는 엄마를 오랫동안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그것이 고통이라 해도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을 가져 보려고 한다.
“야가 지금 뭐라 카노! 택도 없는 소리 집어치아라, 고마!”
할매가 갑자기 잠꼬대를 했다. 나는 할매의 잠꼬대에 반항하기로 했다. 이유는 없다. 반항해야 나답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가족은 최대의 위기를 겪고 있다. 다시 뭉쳐야 할 때가 온 거다. 대책 없는 가족이지만 이제는 내가 그들을 기다릴 차례다. 권여울, 행인1이 아니라 드디어 우리 가족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꼴통은 도덕 시간에 늘 이렇게 말했다.
“위기에 처했을 때 비로소 인간은 진화하는 거야.”
그렇다. 이제 우리 가족의 진화가 필요하다. 더없이 위태로운 불량가족이지만.
✎ 사실 이런 결말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여울이의 방황은 끝이 나고, 불량한 가족의 감동적인 결합으로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기대가 틀린 것은 아닌 것 같다. 여울의 긍정성과 발랄함으로 위기 속에 분명 희망을 꽃피울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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