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혼 사마천(천퉁성)
- 행복한 책읽기/인문사회
- 2009. 2. 4.
‘삼국지연의’를 한창 재미있게 읽었던 시절이 있었다. 중3. 당시 명목뿐이던 연합고사가 있었던 시절. 시험에 대한 모든 것을 잊고 공부가 아닌 책읽기로 밤을 새우던 시절이었다. 아, 얼마나 감칠맛 나던 책인가? 야금야금 읽어가며 간웅 조조의 시대적인 안목에, 시간을 뛰어넘은 제갈공명의 지략에, 유비의 어진 마음에, 관우의 비장한 최후에 눈물 흘리고 가슴 뛰는 감동을 느꼈었다. 한때 사마천이 그 삼국지를 지었다고 착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그런 실수를 두 번 다시 하지 않겠지만 매력적인 이야기들의 무대가 되었던 중국을 좀더 알고 싶은 마음은 지금도 멈출 수 없다.
중국의 모든 것의 시작, 한(漢)
고등학교 세계사 선생님이 중국에 대해 들려주셨던 몇 가지 말씀이 기억난다. 중국이 지금의 차이나가 된 것은(한국이 지금 코리아로 불리고 있는 것처럼) 진나라의 Chin에서 비롯된 것이고, 중국인들이 그네들을 한족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바로 ‘漢’나라에서 온 것이라고. 왜 하필이면 찬란한 문화의 황금기였던 ‘당’도 아니고, 최초로 중국을 통일했던 ‘진’도 아닐까?
그 문제에 대해 세계사 선생님은 명쾌하게 결론을 내려 주셨다. 바로 중국 정신의 모든 것이 바로 ‘한나라’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나라는 위 주석에서 보다시피 여러 사상을 아우르고 있지만 한무제 때 유교를 국교화함으로써 명실상부 공자의 나라가 된 것이다. 그들의 정신적 아버지인 유교를 자신들의 근본이라 본 것이다.
그 사상의 모태가 되는 지점에 사마천이 있었고 한나라 이전부터 한무제에 이르기까지 사마천은 중국의 사상이 다듬어지는 굴곡을 그대로 ‘사기’에 옮기고 있다. 이렇게 진정한 중국의 시작과 더불어 태어난 ‘사기’는 ‘한’나라를 자신들의 정신적 모태라고 생각하는 중국인들에게 ‘춘추’와 더불어 대표적인 역사서가 된 것이다.
역사와 허구의 흥미로운 줄타기
“역사의 혼 사마천”은 단순히 역사책 ‘사기(원제목은 태사공서-태사공이 지은 책)2)’를 설명한 책도 아니요, 또는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만을 이야기한 것도 아니다. 이 책은 사마천이 사랑한 나라 중국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러한 중국에서 떠오르고 처연하게 스러져간 수없이 많은 불행한 영웅 중 한 사람의 슬프고도 솔직한 고백담이기도 하다.
지은이 진동성(천퉁성)은 ‘사기’와 ‘한서’를 토대로 각종 자료를 첨부하여 무제 지배 하의 한나라와 사마천의 일생을 흥미진진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중간 부부에 등장하는 사마천이 천하를 돌며 여러 사람을 만나고 자료를 수집하는 내용은 분명 어떤 역사책에도 나오지 않지만 저자의 붓끝에서 생생하게 살아나고 있다. 그 속에서 만나는 굴원, 한신, 공자, 협객 섭정, 번타광 등은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사기’에서 생명력을 얻게 되는지 짐작할 수 있게 했다. 한무제의 명을 받들어 오랑캐를 정벌하는 대목 또한 그러했고 특히 한무제와의 관계를 설정함에 있어 사마천의 심리를 매우 섬세하게 잘 그려내고 있다.
애증의 관계, 한무제와 사마천
사마천을 이야기함에 있어 한무제를 빼놓는다면 그의 일생 5할이 사라지는 셈이 될 것이다. 감히 짐작해 보자면 나머지 3할은 그의 아버지 사마담일 것이요, 그 나머지가 사마천 자신이 아닐까 한다. 흔히 한무제 하면 우리나라의 한4군이 떠오를 것이다. 밖으로는 조선 뿐 아니라 여러 주변 국가를 정복하거나 속국으로 두고 그들에게 막대한 조공을 받고, 또한 안으로는 개제3)를 완성하여 중국 사상의 근본을 다지고 중화민족의 새시대를 열었던 그는 시대의 영웅이었다.
주공이나 공자(‘춘추’를 지었음)처럼 문화거인 되고자 했던 야심찬 사마천에게 한무제의 개제 완성은 마치 예술가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것처럼 ‘사기’의 집필을 시작하도록 하였다. 집필을 시작하기 전에 고려해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았고, 역사서를 쓰는 동안에도 많은 고난을 겪지만 사마천의 의지를 꺾지는 못한다. 즉 개제완성이 새로운 시대의 분수령이 될 것임을 사마천은 날카롭고 정확하게 간파해냈던 것이다.
하지만 영웅의 모든 생각이나 활동이 정의롭거나 영광되지 못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한무제 또한 수많은 치적을 남기고도 말년으로 접어들면서 간신배와 권력에 눈이 먼 소인배의 무리에 둘러싸이게 된다. 또 흉노족 등 외침이 잦아지기도 하는데 이 흉노를 토벌하기 위해 보낸 이릉이 참패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과는 무관하지만 이릉을 변호한 사마천은 그만 역적을 두둔한 혐의를 받고 끔찍한 형벌을 받게 된다. 후에 다시 복직되지만 그때 겪은 고통은 ‘사기’가 단순한 역사서가 아닌 장인의 혼이 배인 예술서로 태어나게 하였다.
‘역사의 혼 사마천’에서는 이러한 과정을 사마천이 임안에게 보낸 편지를 기초로 하여 매우 자세히 기술하는데, 궁형이라는 처벌을 받고 역사서를 저술하였다는 단순한 사실을 뛰어넘어 사마천의 인간적인 고뇌와 고통을 매우 감동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사마천의 고뇌와 고통, 또는 기쁨과 환희의 이면에는 언제나 한무제가 있었고 그가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의 영혼을 지배한 거대한 그림자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단순히 군신관계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어우러진 한 편의 격정적인 애증의 드라마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 그 이름 아버지!
작가에 의해 재구성된 사마천의 삶에는 또하나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바로 사마천의 아버지인 사마담이다. 숙명적인 역사가의 길을 걷게 만든 장본인이자, 죽음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그의 정신세계를 부여잡고 있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문중의 가업을 잇게 하기 위해 아들을 어렸을 때부터 여러 분야의 책을 읽게 하고, 문화적인 감수성과 지식을 연마하게 하기 위해 고향을 버리고 당시 신도시에 해당하는 무릉으로 이사하기도 했으며, 사마천에게 전국여행을 권유하기도 하였다. 이른바 철저하게 조기교육을 받았으며 그렇게 성장한 사마천은 '태사령'이라는 직분을 천직처럼 여기게 된다. 태사령은 사실 역사가라기 보다는 천문을 관장하는 일에 더 가깝다. 하지만 과거를 거울로 삼아 현재와 미래를 밝게 비출 수 있다는 역사의식을 아버지로부터 배워온 사마천은 아버지가 다하지 못한 역사가로서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일생을 바치게 된다.
결국 사마천을 키운 건 삼 할이 아버지인 것이다.
사마천을 통해 중국을 본다.
사마천이 황하를 보며 마지막 숨을 거두는 대목까지 참 많은 시간을 사마천과 보낸 것 같았다. 단순한 호기심이나 동경만으로 이 책을 읽어가기는 매우 힘들었다. 하지만 생경한 단어들 사이로 사마천이라는 인물이 가진 인간적인 매력과 중국의 광활한 역사, 그리고 사마천의 손에 의해 옮겨진(다시 작가에 의해 재구성되어진) 여러 인물들의 생생한 모습들은 감동 그 자체였다. 그러기에 마지막 장까지 숨을 고르며 천천히 하지만 끝까지 읽어나갔던 것 같다.
이후 이천 년 동안 중국은 많은 변화를 겪으며 오늘에 이른다.
유유히 흐르는 황하처럼 장쾌한 포효를 내뿜는 오늘의 중국이 있는 것은 수천 년 전 자신에게 인간적으로 가장 치욕스러운 고통을 안겨준 조국과 그 역사를 사랑한 한 인간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감히 결론지어 본다. 사마천은 살아 생전 인간이 아닌 인간으로 살아갔지만, 그의 손끝에서 중국은 가장 매력적인 나라가 되었다. 또한 사마천이라는 인물의 면면을 매우 섬세하게 기술한 저자의 노력에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 책을 읽고 가장 큰 변화가 있다면 이번 겨울방학에 중국여행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아, 정말 기대된다.
<2002.12.13 김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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