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침묵하는 아이(얀 데 장어르)

처음에는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음울한 색채와, 표지에 그려진 캐리커처는 읽기 전부터 약간의 거부감을 주었다. 이 책을 읽는 초반에도 등장인물들의 복잡한 이름 때문에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읽어갈수록 흥미진진한 이야기 구조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소설은 한 중년의 남자 ‘피터르 핑크’-나름대로 성공한 변호사-가 내키지 않는 동창회에 참여하게 되면서(아내의 권유로) 시작한다. 이사를 간 이후 동창들과 연락을 아예 끊고 살았던 피터르는 고등학교 시절에 대해 떠오르는 추억이 거의 없다. 다만 덩치가 큰 아이들에게 둘러 싸여 늘 괴롭힘을 받던 '시히'라는 아이에 대한 기억이 악몽처럼 떠오를 뿐이다.


이야기는 서술자인 피터르 핑크가 동창회에서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나면서 과거의 기억을 하나씩 되살려 가는 구조로 되어 있다. 하나씩 떠오르는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은 괴롭힘을 받던 시히와 그 옆에서 그를 돕지 못했던 스스로에 대한 자책으로 온통 얼룩져 있다. 친구들은 그 동안 만나지 못했던 피터르에 대해 열렬히 환영하지만 시히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하면 모두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다른 이야기를 하려 할 뿐이다.


이 소설은 단순히 아픈 과거를 떠올리며 괴로워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바로 이 때문에 후반부로 갈수록 박진감과 스릴이 넘친다. 피터르는 아프게 떠오르는 과거의 악몽을 벗어나고자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과 함께, 당시 시히를 괴롭혔던 주동자들, 그것을 방관하거나 때론 가해자가 되기도 한 선생님, 그리고 모든 상황에서 역시 방관했던 자신을 포함한 학급 친구들에게 재판의 형식을 빌려 그 시절의 진실과 맞닥뜨리게 한다.


시히는 나이가 어리지만 두뇌가 명석해 월반을 한 아이였다. 또래보다 작다는 이유로 놀림감이 되고, 또한 뛰어난 두뇌 때문에 친구들이나 선생님에게까지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는다. 아이들은 시히에게 숙제 대신하게 하기, 소지품 가지고 장난하기, 야유와 조롱, 특히 체육시간에 집단 구타하기, 심지어 성희롱까지 저지른다. 피터르는 시히의 모습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시히가 친구들과 전혀 어울리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도 친구들과 어울리려 했었음을 증명한다. 결국 동창회는 피터르와 그에 동조하는 친구들의 노력으로 죽은 시히에 대해 추모하는 자리로 바뀌게 된다.


이 소설은 소외에 대한 이야기이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들은 두 사람만 있어도(그것이 애인이나 부부 사이라 할지라도) 소외감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서로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공감, 배려와 존중이 많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마흔 명이 넘어가는 학급이라는 집단 속의 소외는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일 수 있다. 그러하기에 학급운영을 고민하는 교사에게 끼리끼리 문화와 소외는 넘어야할 가장 기본적이면서 힘겨운 과제일지 모른다. 이 소설처럼 학급 내에서 소외가 폭력성을 띄게 되는 순간 집단따돌림이 시작된다. 당사자에게도 문제점이 있겠지만 그 문제점을 배려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이 사라진 순간 그 집단은 동물적인 폭력과 무관심으로 얼룩지게 된다.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리고 급기야는 죽음에까지 이르게까지 한다. 집단따돌림 때문이 아니라도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보듬어 가야 하는 우리 교사는 언제나 괴롭다.


이 소설에서 교사의 역할은 무척이나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마지막에 스티프터르 선생님도 역시 유죄를 선고받게 되는데, 이는 교사가 교실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어찌 보면 우리 교사 입장에서는 불쾌한 이야기지만, 두고두고 새겨야 할 명장면이기도 하다. 소설 중 피터르가 선생님께 선고를 내리는 장면을 옮겨 보았다.


(203) 당신과 같이 그토록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 젊은이를 교육한다는 임무를 자랑스럽게 떠들어 대는 바로 당신 같은 사람은 절대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자신이 그릇되게 망쳐 놓은 사람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리고 시히 본스트라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망쳐 놓았는지 자못 궁금합니다. 비록 시히만큼 심하게 망쳐 놓은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204) 무척 사랑받는 교사가 되기 위해, 학생들을 웃기기 위해 당신은 감히 선생에게 맞설 수 없는 학생을 조소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넌 참 다리가 예쁘구나’라고 말을 할 때마다 얼굴이 새빨개지는 그런 여학생이었죠. 그 여학생은 ‘자식아, 네 다리나 쳐다봐’라고 되받아치지 못합니다. 소녀는 어쩔 줄 모르고 입을 다물고 맙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교사로서 공격할지 모르는 조처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시히 본스트라의 경우는 이미 교실에서 무시당하던 아이를 조롱의 대상으로 선택한 겁니다. 당신은 시히 스스로는 전혀 어떻게 할 수 없는 두 가지 사항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 첫째는 왜소한 체구였습니다. 그것은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며, 스스로도 키가 작다는 이유 때문에 충분히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가 집중하고 있을 때 입을 우물거리는 습관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불안하다고 느끼는 즉시 배를 쓰다듬는 것과 마찬가지의 반응입니다.


(205) 수업 시간에 선생님은 시히의 불안감을 고조시켰습니다. 당신은 성인으로서, 교육자로서 학생이 수업시간에 편안한 기분이 들도록 배려했어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206) 당신에게 지금 이 순간부터 꼼짝할 수 없는 학생을 재물로 삼아 사랑받는 선생으로 인식되는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시히 본스트라를 생각할 것을 선고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모든 폭력에 침묵과 방관으로 일관했던 사람들에게도 따끔한 충고를 한다.


(202) 우리는 엘리를 주범이라고 고발할 수 있지만, 우리 중에 그 누구도 벗어날 수는 없어. 그리고 시히를 조롱하는 일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해도 마찬가지야. 여러분, 누군가 시히를 괴롭힐 때 아무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 모두에게 예전의 동창을 만날 때마다 시히를 추모해야 한다고 판결합니다. 그리고 엘리에게는 동창회를 열 때마다 전원 참석이라는 의미로 시히를 위해 건배를 할 것을 판결합니다. 그 첫 실행은 지금 이 순간이 될 것입니다.

교사의 무책임함에 대한 불신, 집단 따돌림에 대한 자극적인 묘사(성희롱 등) 등 문제적 상황들이 있지만 우리 아이들과 교사들이 꼭 한 번 읽어봤으면 하는 책이다. 학생들은 중2 이상이면 좋을듯 하다.


모두가 침묵하는 아이 (틴틴북5)
국내도서
저자 : 얀 데 장어르 / 송소민역
출판 : 자음과모음(구.이룸) 2007.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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