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떨어뜨린 것(이경혜)

 

2018년, 국어교사모임에서 중학생들에게 추천할 5.18 관련 문학 작품 이야기를 나누다 이 책을 소개받았다. 그간 여러 사정으로 읽지 못하다 이번에 중학교 1학년들과 함께 읽을 5·18 관련 작품을 살펴보다 이 책을 떠올렸다.
이 책에는 5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그중 첫 번째 단편 ‘명령’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명령’은 중3 친구가 함께 중고서점에서도 놀다 먼저 서점을 나섰다 계엄군에게 시민군의 연락책이라는 오해를 받고 구타를 당해 죽어가는 장면을 목격한 '나'의 이야기이다. '나'는 너무나 갑작스럽고 무서운 상황이었음에도 친구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한참을 시달리다 결국 일상으로 복귀하지 못하게 된다. 친구가 생각날 때마다 친구가 떨어뜨린 ‘필승중학수학’을 들여다보다 명령대로 풀기만 하는 되는 수학에 재미를 붙이고 수학을 가르치는 교사가 된다. 그러다 5.18민주묘지가 조성되면서 구묘역을 시신들을 옮기게 되는데 그때 친구의 머리뼈가 심하게 깨진 것을 알게 되고 다시 한번 큰 충격에 빠진다. 어린 학생을 이렇게까지 때린 공수부대원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나'는 더 이상 아이들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친구를 죽인 범을 찾아 나서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면서 학생들에게 5.18 때 죽은 친구를 기억해 달라며 작별한다.


5·18 당시 무수한 민간인이 계엄군에게 학살당했다. 5.18민주묘역의 1~2묘역은 5.18 기간 동안 희생된 열사들이 묻힌 곳인데 하나같이 그 사연이 안타깝다. 민간인에 대한 집단발포도, 헬기 사격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특히 대면한 상황에서 민간인에게 대검을 휘두르고, 진압봉으로 구타하고, 조준 사격까지 했던 군인들이 어떤 마음에서 그렇게 행동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명령'을 뛰어넘어선 인간적인 갈등이 수반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에.
작년 우리 반 아이들이 어떤 과목에서 홀로코스트의 주범인 아히이만이 죄가 있는지 없는지 토론을 하는데 잘 준비가 안돼 아이들끼리 단톡방에서 갈등이 있었다. 5.18 계엄군들이 죄가 있는지 없는지 토론했다면 좀 더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기에 좀 더 실감 나게 준비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직도 5.18광주민주화운동을 폄훼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이 세력을 이루어 '표현의 자유'란 이름 속에 2차 가해를 계속하고 있다. 학살을 명령한 자도, 명령을 실행한 자도 '더 늦기 전'에 그 이유와 과정을 밝혀야 한다. 그래야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이 명확해지며 국민 통합 및 폭력에 대한 저항 및 공동체 정신이 우리나라에서 되살려야 할 공화국 존립의 원리가 될 것이다,

(22) 수백만의 유대인을 가스실로 몰아 넣어 죽인 것도 명령에 의해 이루어졌고, 단지 명령에 의해 스위치만을 누른 자들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았다. 수천 명의 대한민국 국민을 때리고, 찌르고, 죽인 것도 명령에 의해 이루어졌고, 단지 명령에 의해 방망이를 내리치고, 대검을 찌르고, 총을 쏜 병사들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았다. 명령이 방패가 되어줄 때 인간은 어디까지 사악해질 수 있는 걸까?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라는 말은 세상에 대한 면죄부는 된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엄연한 핑계이다. 기억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 명령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과 결과적으로 다를 게 없다.

 

이 이야기는 실제 5.18 당시 동신중 3학년 학생이었던 박기현 열사(1묘역 8번)의 이야기를 재구성했다고 한다. 마침 3학년들과 '오월인권길 걷기'란 체험학습을 함께하며, 민주묘역에서 박기현 열사의 묘에 따로 참배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책과 함께 열사를 소개하며 현재적인 삶과 연결해 보려고 했다. 역사는 기억과 의미부여를 통해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활동인 듯싶다.

다른 단편들도 청소년들의 아픔과 슬픔을 다루고 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느라 정작 자신을 돌보지 못한 소녀의 이야기 ‘울고 있니, 너’, 
가지고 싶은 물건이 있지만 엄마에게 이해받지 못한 소녀의 이야기 ‘그건 사랑이라고, 사랑’, 
뇌전증에 심한 액취증까지 가지고 있는 고등학교 소녀의 절망을 담은 ‘저주의 책’, 
지나친 기대 및 성적에 대한 부담으로 자살을 시도한 소년의 절망적인 상황을 담은 ‘그가 떨어뜨린 것’ 

사연 하나하나가 감당하기 쉽지 않은 문제들이지만 슬픔의 밑바닥을 찍은 상황이라 희망적이다.
제목의 "그들이 떨어뜨린 것"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상황을 벗어나는 실마리로 조금더 긍정적인 상황으로의 전환점이 된다.

 

(44)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그 애는 바로 나였다. 내 속의 또 하나의 나, 내가 계속 무시해 온 아이, 남들만 보느라고 한 번도 안아주지 못했던 아이, 그것은 바로 내 자신이었다.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나는 외로웠다. 나는 배려심 깊고 착한 아이가 아니었다. 아니다, 그 모든 아이, 행복하고, 외롭지 않고, 배려심 깊고, 착한 아이도 역시 '나'였다. 그러나 그 아이만을 챙기느라 어둠 속의 저 애는 내팽개쳐 두었다. 얼마나 무시했으면 저렇게 저 애가 어둠을 뚫고 스스로 내 앞에 나올 생각을 다 했을까. 미안해, 정말 미안해.
-'울고 있니, 너?' 중에서.

✎ 이 이야기는 2012년 우리학교에서 출간한 "울고 있니 너?"에 실렸다. 대체로 청소년들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단편이었다. 비단 청소년 시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며 무난하게 삶을 풀어 나가는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필연적인 문제이지 않을까?

(63) 엄마는 문화와 교양에 대한 물품이라면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는 거다. 하긴 옷이나 가방, 신발도 내게 적당한(물론 엄마 생각에) 것이라면 선물로 사 주곤 했다. 이번에는 좀 달랐다. 청바지치고는 엄청 비싼 청바지라는 사실이 나도 걸리긴 했다. 그러나 목숨을 걸어서라도 사랑하는 연인을 차지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지 않나? 나는 이를테면 그 청바지에게 반한 거고, 사랑에 빠진 건데!
-'그건 사랑이라고, 사랑' 중에서.

✎ 사실 엄마 입장에 공감이 가는 이야기였다. 부모가 된다 안된다 말하기보다 아이 스스로 경제적인 판단을 하고 책임지도록 교육하는 게 좋겠다. 애써 힘쓰지 않아도 용돈이 풍족한 시대다. 돈의 가치를 본인이 판단하고 있다면 믿어주는 게 맞을 것 같다.

 

(99) 나는 누운 채 생각에 잠겼다. 오랫동안 피해왔던 질문들이었다. 내가 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악취를 풍기면서, 발작을 하면서 굳이 바득바득 살아야 할까. 나 같은 사람을 누가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러니 결혼인들 할 수 있을까? 일반적인 직장에 취직도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뾰쪽한 다른 재주도 없다. 얼굴이 예쁜 것도 아니고, 예술적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사는 거, 숨 쉬고, 의미 없이 사는 거, 그걸 견뎌낼 수 있을까? 과연 내가?
-'저주의 책' 중에서. 

✎ 이 글은 2014년 문학동네의 "콤플렉스의 밀도"에서 읽었다. 뇌전증에 심한 악취증을 가지고 있는 '나'는 '저주의 책'을 만들어 일말의 희망의 끈이라도 잘라버린다. 하지만 축농증을 친구의 관심 덕분에 자신에 대한 저주를 조금 내려놓을 수 있다. 상황이 너무 안타깝다. 우리 모두 자기만의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는 걸 인정하면 조금 콤플렉스의 밀도가 조금 더 낮아지지 않을까.

 

(109) 산다는 게 도대체 뭘까? 그렇게 엄청나게 여겨졌던 시험이 죽음 앞에서는 이토록 사소하고 하찮다는 게 우습기도 하고 실감이 안 나기도 한다. 그토록 눈부셨던 나, 전설적인 수재였던 윤석호가 이 시험을 통해 되살아나기를 식구들은 모두 숨죽인 채 빌고 있었다. 그것은 영광의 챔피언이 한때 방황에 빠졌다 혹독한 훈련을 치른 뒤 재기전을 앞두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가 떨어뜨린 것' 중에서

✎ 석호는 시험 스트레스로 옥상에서 뛰어내렸지만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순간 후회했다. 그리고 다행히 살아남았다. 죽음 앞에서 시험 같은 것은 하찮은 것이다. 죽고 싶은 마음만 떨어뜨리고 사람은 조금 더 힘을 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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