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끝의 온실(김초엽)

다양한 식물과 실험 도구들, 그 사이 자그마한 온실이 뚜렷하게 강조되는 표지다. 책을 읽고 나서 다시 표지를 보니, 더스트 시대 ‘프림 빌리지’의 레이첼의 온실이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뿌연 미세먼지와 같은 더스트 속에서 울창한 숲을 가꾸고 지켰던 ‘프림 빌리지’의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표지에 잘 담았다.
책 제목 “지구 끝의 온실”도 인상적이다. 보통 시작과 끝은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지구 끝’이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퍼뜨리는 사람들의 감추어진 이야기를 제목에도 잘 담았다.

기후 위기를 과학의 힘으로 해결하기 위해 자가 증식 나노봇을 개발했으나 오히려 그것이 지구 생명체를 멸절시키는 쪽으로 폭발한다. 더스트를 피해 사람들은 크고 작은 ‘돔 시티’를 만들지만 한정된 자원 안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갈등으로 점점 무너진다. 더스트에 내성이 있어 돔 밖에 살아가는 사람들도 다양한 대안 공동체를 형성하여 이겨내려 하지만 자체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진다. 결국 인류의 멸망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문제의 ‘더스트’를 만든 회사에서 소스를 공개하고 공동대응체를 만들어 더스트를 없앤다. 인류는 빠르게 안정을 찾으며 더스트 이전의 생태계를 복구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테러로 여겨질 정도로 성장과 번식이 폭발적인 식물(모스바나)이 나타나고 이 식물의 번성 과정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지구를 구한 것은 돔시티의 과학자들이 아닌, 돔시티 밖 ‘프림 빌리지’의 작은 공동체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어린 시절 이웃집 할머니의 정원에 매료돼 식물학자가 된 서술자에게 갑자기 나타난 모스바나, 그리고 연구 과정에서 형성된 네트워크를 통해 더스트의 소멸 원인과 함께 운명적이거나 모순적으로 보이는 존재들의 다양한 관계가 흥미 있게 연결된다.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메모해 본다.

실천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힘
이야기는 가진자·권력자·배운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주체적으로 자기의 삶을 지키고 내일을 꿈꾸는 사람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폭발한 더스트를 결국 해결한 건 지배층이지만 그 이전에 프림 빌리지에서 작물을 가꾸며 내일을 꿈꾸며 살아온 평범한 사람들의 상당한 노력이 있었기에 진정되었다.

(242) “지금부터는 실험을 해야 해. 내가 가르쳐준 것, 그리고 우리가 마을에서 해온 것들을 기억해. 이번에는 우리가 가는 곳 전부가 이 숲이고 온실인 거야. 돔 안이 아니라 바깥을 바꾸는 거야. 최대한 멀리 가. 가서 또다른 프림 빌리지를 만들어. 알겠지?”

프림 빌리지에 살며 경험한 것들을 사람들은 나누며 이루고 싶은 희망이 생긴 것이다.

(226) “나는 이곳에 오기 전에 많은 대안 공동체들을 봤어. 모두 같은 패턴이었지. 처음에는 거창한 기치를 걸고 모여. 유토피아 공동체를 표방하거나, 종교를 중심에 두기도 하고, 사냥꾼들이 모인 집단일 때도 있고, 그도 아니면 평화로운 생존을 바라는 사람들이 모이기도 해. 모두 돔 시티 안에서는 답을 찾지 못해서, 돔 시티 밖에서 대안을 꿈꾸는 거야. 하지만 그게 뭐가 됐든 결국 무너져. 돔 밖에는 대안이 없지. 그렇다고 돔 안에는 대안이 있을가? 그것도 아니야. 나오미 네 말대로 돔 안은 더 끔찍해. 다들 살겠다고 돔을 봉쇄하고, 한줌 자원을 놓고 다른 사람들을 학살하지. 그럼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과학의 양면성 
흔히 과학은 판단하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의 상황도 딱 그 결과다. 기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자가증식나노봇이 결국 통제되지 않아 더스트라는 괴물을 만들어 그것을 해결한다. 물론 해결책도 문제를 일으킨 회사에서 소스를 공개해 만들었다고 하지만, 그렇기에 과학에 대한 인문학적인 제어가 필요하다. 물론 더스트를 응집하여 없애는 ‘모스바나’ 역시 과학을 통해 탄생한 식물이지만 이는 인간을 위한 마음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인문학적인 제어가 이루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과학의 양면성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후쿠시마 원전 폭발은 자연 재해도 일부 원인이 있지만 결국 다양한 가능성을 대비하지 못한 인재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모든 사람의 문제가 되었다. 과학과 기술이 발달할수록 더 어려운 판단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292) “그들은 자가 증식 나노봇의 입자 크기를 줄이는 실험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면 분자 단위에서 모든 것을 통제하고, 또 재조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분명히 경고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듣지 않았고.”
“극도로 소형화된 입자는 통제를 벗어났고, 그러다 증식 오류가 발생한 것이죠. 도망쳤던 직원들이 폐쇄 프로토콜을 따르지 않았어요. 입자들은 그대로 풀려났고요.”


식물의 힘
‘인류세’라는 시기 구분이 나올 정도로 인류가 우점종이 되면서 그 외의 생명체들은 명종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야기 속에서 비교적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동물에 비해 식물이야말로 집단적인 힘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 중심적인 사고가 아닌 식물 중심 사고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79) 식물들은 고유의 신비로운 이야기를 품고 있다고, 기계만큼이나 정밀하고 그러면서도 정밀함을 넘어서는 유연함이 있다고.
(365) 우리는 동물을 과대평가하고 식물을 과소평가합니다. 동물들의 개별성에 비해 식물들의 집단적 고유성을 폄하합니다. 식물들의 삶에 가득한 경쟁과 분투를 보지 않습니다. 문질러 지운 듯 흐릿한 식물 풍경을 바라볼 뿐입니다. 우리는 피라미드형 생물관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식물과 미생물, 곤충들은 피마미디를 떠받치는 바닥일 뿐이고, 비인간 동물들이 그 위에 있고, 인간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다고 생각하니다. 완전히 반대로 알고 있는 셈이지요.


구별 없는 사람의 힘
이 책에서 이름을 남긴 캐릭터는 모두 여자다.  목소리만으로는 남녀 구별이 잘 되지 않아 서술자의 이야기를 듣가 여자였다는 게 드러나 살짝 놀라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 책이 페미니즘 소설로까지 해석되지는 않는다. 패미니즘적 정의를 내 기준에서 한다면.

2150년 정도 되면 여러 가지 이유로 남녀의 구별은 무의미할 것 같다. 심지어 레이첼을 보면 사이보그이면서 점점 유기체의 비율이 낮아지고 있으니까. 남녀의 구분이 신체적인 특성에서 기인해 굳어질 역할로서의 존재론적 차이라면 기계로 대체되면서 그 구분은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 레이첼을 보면 인간에 대한 경계도 모호한데 남녀를 구별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싶다.

마음은 어떻게 형성될까
사람의 마음을 특정한 곳을 향하도록 유도될 수 있을까? 기술자 지수는 식물학자 레이첼의 관심을 받고 싶어 레어첼의 뇌를 고칠 때 안정화 버튼을 누른다. 자신에게 호감이 가도록. 그리고 레이첼은 지수에게 점점 호감을 갖는다. 호감? 사랑의 힘이 프림 빌리지를 유지하고 심지어 더스트 저항종 및 더스트를 제거하는 식물을 만들게 한다. 레이첼에게 고백은 받은 지수는 자신의 바람이었으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의도된 행동이라 생각하며 후회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도 레이첼은 지수에 대한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

인간의 마음은 외부 환경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변하고 형성된다. 마음을 인간의 수준에서 바라보지 않고 개체와 외부와의 상호 작용으로 바라보면 모든 생물을 쉽게 볼 수 없겠다. 본능을 뛰어 넘으면서 생물은 진화해 오지 않았을까? 아, 라마르크의 진화론적 해석은 아니고 전 지구적 연대를 생각하며 썼다.


종합하면 210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전 지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시민들의 노력과 네트워크가 큰 힘을 발휘해 가는 과정을 칡덩굴이나 담쟁이덩굴 같은(오히려 그 번식력과 외부 생김새로는 환삼덩굴에 더 가까운) 식물의 힘을 기반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특별하고 새로운 관점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사건 위주의 전개가 아쉽다. 이야기 중간 중간의 복선들이 결말 부분에서 한꺼번에 짜맞춰지며 이야기가 완성되지만 인물들의 심리를 좀더 찬찬히 그렸으면 좋았겠다.

 

사족. 작가의 이름에 눈에 띈다. 김‘초엽’. 이분은 언제든 꼭 식물을 소재로 이야기를 썼을 것 같다. 
2000년 초반에 읽었던 “신갈나무 투쟁기”가 갑자기 생각난다. 다시 읽어봐야겠다.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