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메리 셸리)

책을 읽는 도중 영화를 봤다. 이미 책에는 여러 사람의 목소리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거기에 작가의 목소리가 끼어드는 느낌을 받았다. 괴물이 창조되고 창조된 괴물은 모습은 지극히 모순되고 비과학적이었지만, 인간 존재에 대한 고뇌, 소외와 고독, 과학의 발전이 가져올 비극과 디스토피아적인 상상 등 너무너무 다양한 생각들을 열어준 진정한 고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세한 이야기는 인상깊은 구절에 풀어놓았다.

 

-인상 깊은 구절-

 

(19) 마음을 차분하게 진정시키는 데는 역시 흔들리지 않는 목표만한 것이 없나봅니다. 영혼이 하나의 초점에 지성의 눈길을 고정시킬 수 있으니까요. 이 원정은 제 어린 시절에 품었던 가장 소중한 꿈의 실현입니다. 저는 극점을 에웠싼 바다를 지나 북태평양에 도달하고자 했던 여러 원정 기록들을 열정을 가지고 탐독했지요.

 

<프랑켄슈타인>을 읽으며 눈길이 머무는 구절들이 많았다. 이 소설의 주된 서술자인 북극탐험가 월턴대장의 목소리로 표현된 이 구절이 가장 먼저 눈길을 끌었다. 메리 셸리가 어릴 적 탐독한 책에 대한 이야기를 월턴 대장의 입을 빌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괴물을 쫓아 전세계 곳곳을 다녔던 흔적들이 모두 메리가 가고 싶고, 책에서 탐독한 그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69) 지금 매진하고 있는 공부가 사랑하는 마음을 약하게 하고 어떤 연금술로도 합성할 수 없는 소박한 즐거움을 아끼는 취향을 망가뜨리려 한다면, 그 공부는 분명 불법적이며 인간의 정신에 맞지 않는 것이다. 이 법칙이 항상 준수되었다면, 그리하여 어느 한 사람도 가족의 애정이 주는 평온을 깨뜨리는 목적을 추구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는 노예국가로 전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카이사르는 나라를 삼키겠다는 야욕을 갖지 않았을 것이요, 아메리카는 좀더 서서히 발견되어 멕시코와 페루 제국은 파멸을 맞지 않았을 것이다.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실험에 대한 파국을 예견하는 복선이기도 하면서, 윤리가 결여된 과학의 발전이 가져올 세계의 후퇴에 대한 통찰력이 돋보이는 부분이기도 했다.

 

(131-132) 내 창조자인 당신이 나를 혐오하고 내치다니, 나는 네 피조물이고, 우리는 둘 중 하나가 죽음을 맞지 않는 한 끊을 수 없는 유대로 얽혀 있다. 당신은 나를 죽이려 하겠지. 감히 당신이 이렇게 생명을 갖고 놀았단 말인가? 나에 대한 의무를 다하라. 그러면 나도 당신과 나머지 인간들에 대한 의무를 다하겠다.

 

자신을 만든 창조자가 피조물을 끔찍하게 여기고 혐오하고 내친다는 것! 얼마나 비극적이고 참담한 것일까?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냉대와 소외 속에서 가장 비참한 아픔을 느낀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낀 대목이다.

 

(151) 언어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생김새의 기형을 사람들이 눈감아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와 대조적인 외모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나 자신의 기형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172) 책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내 개인적 감정과 처지를 훨씬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읽고 대화를 경청하는 책 속의 인물들과 나 자신이 비슷하면서도 한편으로 이상하게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들에게 공감하고 어느 정도는 이해했지만, 내 마음은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았고 누구와도 유대가 없었다. ‘내 떠나는 길은 자유로우니’(퍼시 비시 셸리의 시 <무상에 관하여> 인용) 내 죽음을 슬퍼할 사람 하나 없었다. 육신은 흉측했고 덩치는 거인과 같았다. 이건 무슨 뜻일까? 나는 누구일까? 나는 무엇일까? 어디서 왔을까? 내 목적지는 어디일까? 이런 질문들이 끝없이 떠올랐지만 해답을 찾을 길이 없었다.

 

✎ 외형은 가장 끔찍한 저주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내면은 어떤 인간보다 더 선하고 배움에 대한 의지도 강하고, 지능도 높다. 프랑켄슈타인은 외형적인 디자인은 폭망했지만, 내면은 엄청난 창조물을 만든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심지어 언어를 독학하고, 책도 스스로 읽을 수 있는 괴물이라니! 또한 태어나면서 본능적으로 선함과 악함을 구분할 수 있는 인식체계를 가지고 있다니! 그리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이토록 깊게 사유하는 창조물이라니!

언젠가 전남대에서 들었던 인문학 교양에서 <레미제라블>에 대한 내용이 떠올랐다. 쟝발장이 법정에서 자신의 죄를 뒤집어쓴 애꿎은 죄수를 보고 깊은 상념에 빠진다. 그러면서 내뱉는 말 “Who am I?”였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시작이 쟝발장의 진정한 인간의 길로 걷게 해주었다. 그때 떠올린 사람이 미리암 주교였던가? 쟝발장에게 미리암 주교가 있었던 거처럼 창조자인 프랑켄슈타인의 애정이 조금이라도 괴물에게 영향을 끼쳤다면 누구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로 거듭나지 않았을까? 아니면 또다른 기회이자 마지막 기회였던 펠릭스 가족의 편견에서 벗어난 이해와 보살핌이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179) 친절한 분들이지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저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선한 품성을 지니고 있고, 지금까지 아무 해도 끼치지 않았으며, 어떤 면에서는 도움을 주기도 했지요. 그러나 치명적인 편견이 그들의 눈을 가리고 있어서 다정하고 친절한 친구를 보아야 하는데 혐오스러운 괴물만 볼 뿐이랍니다.

 

, 괴물에게 최후의 기회였는데. 눈 먼 노인에게 자신의 심정을 쏟아내는 괴물의 심정은 얼마나 절절했을까? 자식들이 조금만 더 늦게 왔더라면.

 

(224-225) 이제 나는 또다른 존재를 창조하려 하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그 성정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짝보다 천배 더한 악의에 불타 살해와 불행 자체를 즐길지도 몰랐다. 그는 인간의 거주지를 벗어나 사막에 몸을 숨기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약속을 하지 않았다. 어느 모로 보나 사고하고 추론하는 동물이 될 것이 분명한데, 자기가 창조되기 전에 맺어진 약조를 거부할 수도 있었다. 서로를 싫어할 수도 있었다. 이미 살아 있는 피조물을 일그러진 자기 형상을 증오하는데, 눈앞에 똑같은 형상이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면 더 큰 증오심을 품지 않을까? 그녀 또한 그를 혐오하며 등을 돌려 인간의 아름다움을 열망할지도 모른다. 그녀가 떠나면 그는 다시 혼자 남을 것이고, 자기와 같은 종족에게도 버림을 받는다면 이 새로운 도망에 분노가 폭발할지 모른다.

 

✎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이제야 올바른 판단을 하게 된 것 같다. 자기 의지를 가진 피조물의 탄생은 이미 창조된 피조물과 똑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여자 피조물을 만들었다면 정말 세기말적인 결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절친과 여친의 죽음만으로 끝낸 것이 다행인지도.

 

(284) “미쳤습니까, 친구?”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런 무분별한 호기심이 당신을 어떤 결과로 이끌겠습니까? 당신 자신과 세계를 위해 악마 같은 숙적을 창조하려는 겁니까? 그렇지 않다면 어떤 의도로 묻는 거죠? 진정해요, 진정해요! 내 불행에서 배우고, 당신의 불행을 자초하지 마십시오.”

 

69쪽에서 이야기한 복선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이다. 이 소설의 중심 주제 중 하나이기도 한 것 같다.

 

(300) 내 불행에 공감해 주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어떤 공감도 내게는 있을 수 없으니까.

 

✎ 처절하고 가장 슬픈 진리. 하지만 이 대목에서 많은 사람들이 위안을 받지 않았을까? 영화 <메리 셸리>에서도 소외받는 이들(이복 언니 등)이 괴물의 소외와 고독에 열광하고 위로를 받았다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306) (해설) 상당 부분 개작해 각색한 이 영화가 원작과 가장 다른 점은 괴물의 대사가 단 한 마디도 없다는 것이다. 19세기의 천재 여성 작가 메리 셸리와 그녀가 창조한 능변의 괴물에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는 곧 생명과도 같다. 그런데 너무나 유명해진 이 B급 영화배우의 얼굴은 오히려 원작을 그 강렬한 이미지로 뒤덮어 은폐하고, 풍부한 언어, 문학적 텍스트의 의미를 단순 환원하는 결과를 낳았으니, 아이러니하게도 그 또한 참 프랑켄슈타인의 괴물답다.

 

<프랑켄슈타인> 하면 영화에 표현됐던 귀에 나사못이 박히고 짱구머리인 괴물이 떠오르는데, 이토록 명쾌한 해설이라니! 그리고 새롭게 창조한 괴물이라는 표현도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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