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의 프랑스 학교 이야기(목수정)
- 행복한 책읽기/교육
- 2019. 5. 8.
대학 때 홍세화 선생님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읽으며 프랑스 사회의 다양성에 대한 용인(똘레랑스)과 사람이 먼저인 문화를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 물론 프랑스 역시 제국주의의 수혜자였고 여전히 다른 나라보다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태도를 보일 때가 많지만, 그들이 유지하는 문화와 교육 중에는 우리 사회에서 참고할 내용도 적지 않아 여전히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칼리의 프랑스 학교 이야기”에는 작가의 딸인 ‘칼리’를 중심으로 어린 아이들도 성숙한 존재로 동등하게 인정하며 생활하는 모습, 서열이 없어 오히려 학교가 제 구실을 하는 모습, 그리고 민주주의를 체화하는 곳으로서의 학교가 인상 깊게 그려진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유용하지도 않는 지식을 청소년기 내내 치열하게 암기하고 서열 경쟁으로 내몰리는 우리 아이들의 슬픈 모습도 겹쳐진다. 그런 제도를 유지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는 내 모습에 대해서도 성찰하며.
(15) “앞으로 두 분이 부부의 연을 맺고 살아가는 동안, 부부간의 끈끈한 애정이 가정을 지탱하는 중심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자녀들을 다소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두 사람의 애정을 지키는 데 항상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 명심하셔야 합니다.”
(17) 그런데 문득 서서 생각해보니 내 부모는 날 위해 살았고, 나는 내 자식을 위해 살면, 그럼 내 인생은 대체 누가 살아주는 건가? 내 인생을 완성시키는 대신, 널 위해 나를 다 바쳤다라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회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각자 자신의 삶을 최선을 다해서 살아내는 것이 각 개인에게 주어진 최대의 과제일 터인데, 왜 우린 쉽게 너를 위해 내 인생을 바쳤다고 말하며 뿌듯해하는가?
(168) 초등학교 2학년 무렵, 학교에서 아이와 함께 돌아오던 길이었다. 아이를 처음 보는 근사한 카페에 데려가 서로 마주 앉았다. "우리 앞으로 한 달에 한 번씩 따로 둘이 만나서 대화를 나누자. 엄마한테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다 해보는 거야." 칼리는 뜨거운 코코아를, 나는 카페라테를 시켰다. 아이는 엄마와 둘이 마주 앉아 서로의 마음을 터놓는 심리 테라피를 시작한다는 사실에 흥분한 듯했다. 한 모금씩 따끈한 음료를 마신 후, 나는 이렇게 물었다. "언제부터 엄마한테 화나기 시작했어?"
✎ 자식을 위한 부모들이 온갖 노력들이 오히려 가정을 해체하고 부모와 자식 모두에게 영혼과 마음의 허전함을 키워 가고 있는 현실에서, 아이의 진정한 성장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지 생각해 볼 구절이다.
(162) 등수가 없는 세계에선, 내가 점수로 판단되지 않으므로 남에게도 점수를 매기지 않는다. 그리하여 점수 너머에 있던 더 많은 각자의 특징을 보게 된다. 점수로 인간을 평가하는 획일적인 기준이 사라지면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주제들이 아이들의 삶 속에 들어가 펼쳐진다.
우정은 저마다의 다양한 관심사를 친구를 통해 만나게 해주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 그래서 아이들은 친구의 관심사를 따라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을 돕고, 환경을 생각하며 채식주의를 실천하거나 전파하고, 아이들끼리 전시회를 보러 가고, 좋아하는 작가의 사인을 받기 위해 서점을 찾아간다. 혹은 자신들이 배우는 악기의 마스터 클래스를 찾아 실력을 향상시키기도 하고, 함께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면서 책을 만들어보기도 한다.
(228) 반의 우등생과 열등생을 공식화하는 과정은 없다. 성적은 철저히 개인적인 일로 간주된다. 최우수 성적이어서 박수를 받거나, 못한다고 벌을 받지 않는다. 어떤 성적을 받는 자신이 지난 학기 동아 노력한 결과일 뿐이다. 중학 시절부터 대학교까지 모든 평가는 절대평가로 이루어진다. 이 사실은 성적을 개인저인 일로 만들어버리는 중요한 메커니즘이다. 그것은 학업이 나 자신의 일이며, 자신의 선택이란 사실을 명료하게 인지시킨다.
✎ 프랑스 학교를 보며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절대평가 제도였다. 일 년에 단 한 번 치르는 수능 시험을 위해 대한민국 모두가 일시 정지하는 상대평가의 시스템 속에서 서열이 없는 절대평가가 어떤 교육적인 의미를 갖는지 상상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
상대평가와 서열이 사라지면 남을 이겨야하는 경쟁도 덜 치열해 지고 선수학습 및 성적 지상주의, 승자독식의 사회도 완화될 수 있을까. 적어도 절대평가 학교에서는 성적이 아닌 다른 사람의 특성을 더 많이 발견하며 서로의 관심을 따라가며 더 다양하고 깊이 있는 공부와 친구와 세상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프랑스 외에도 절대평가 시스템을 운영하는 다른 나라들의 교육 속에서도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인지 궁금하다.
(254) 프랑스의 공교육 속에서는 크로스오버가 일상적으로 이뤄진다. 아카데믹한 틀 안에서의 교육 내용과 현실이라는 시공간 속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 사이의 경계가 또렷하지 않다. 이른바 ‘진도’를 나가는 와중에도 우리가 현실에서 중요하게 포착하고 이해해야 할 것이 있다면 서슴지 않고 문을 열어 거기에 다가선다.
교육과정 안에 갇히지 않고, 입시에서 좋은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이 없기 때문에 허용되는 일상적 일탈이다. 세상과 쉽게 통하는 가르침이기에 학교는 아이들에게 ‘유용한 곳’이라는 신뢰를 얻게 된다. 학원이 끼어들 틈이 없다.
✎ 상대평가가 없어진다면 수업의 내용도 앎과 삶이 통합된 형태로 제안되며 사회 문제에 대해 협력하고 참여하며 민주시민을 기르는 공간으로서의 학교의 역할에 대해서도 성찰할 수 있을 것 같다.
(204) 프랑스에서는 어느 학교나 똑같은 지향점을 가진다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이다. 혁명 세력이 세운 공화국의 지향점이 바로 학교의 지향점이다. 공화국은 시민이 주인 된 사회이며, 그들이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교육을 받고 비판적 사고를 하는 성숙한 시민들이 필요하다. 근대적 의미의 학교는 혁명과 함께 시민 양성의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고 이 사명은 21세기에도 유효하다.
문제는 권위적 체계가 저항을 모르고 잠시만 지속되어도 이 근본적인 가치는 바로 배반당한다는 점이다. 권력은 저항 없이는 자제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교장의 권력을 교사들과 나누고 교사의 권력을 학생들과 나누려는 끊임없는 자의적 노력이 없다면 학교는 순식간에 감옥과 비슷한 곳이 된다. 아주 어린아이도 학교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아닌지를 금방 판단할 수 있다.
✎ 식민지 부역자들에 대한 역사적 청산 없이, 세계적인 이념의 대립이 직접적으로 또 대리전의 형식으로 치러지고 오랜 시간 분단과 정전의 상황 속에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줄곧 위협받고 있다. 그런데 민주주의는 지식이 아닌 삶으로서 체화되었을 때 유지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학교가 경쟁, 상대평가, 지식의 일방적 전달과 같은 권위주의를 내면화하는 곳이 아닌, 민주주의의 원리를 고민하고 체화하는 공간으로서 자리매김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369) 우리에게도 승리의 기억이 필요하다. 프랑스의 10대가 계속 거리에서 싸울 수 있는 까닭은 승리의 기억이 멀지 않기 때문이다. 고등학생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소리 높여 함께 말하면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항의에 답하는 ‘상식적’ 정부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 앞만 보며 경쟁의 계단을 오르라고 협박하는 채찍이 그들에게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10대들과는 달리 프랑스의 10대들이 누리는 한 가지 엄청난 특권이 있다면, 그것은 경쟁하지 않을 자유다. ‘경쟁하지 않을 자유’, 이것은 한 사람의 인생에서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경쟁 대신 협력하고 연대하는 법을 배우고, 경쟁으로 마모되지 않은 에너지는 세상을 개혁해낼 조직된 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리나라와 프랑스 중 어느 나라가 더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 갈까, 마무리로 너무 뻔한 질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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