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그요정(김호준)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 순천까지 온 전국국어교사모임 연수는 역설적으로 올해가 가장 추웠음을 증명하는 공간이 되었다. 강의실도 추운데, 온기가 오래 버티지 못하는 복도에는 출판사 양철북휴머니스트에서 가판대를 설치하고 교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이타니 겐지로선생님의 책이 인연이 돼 가끔 책을 보내주는 양철북에 인사하러 들렀다, 이 책 디그요정을 추천받았다.

 

디그요정

배구를 하며 자존감을 발견하는 거울을 바탕으로, 농구나 배구에서 작전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동그라미와 가위표가 눈에 띤다. ‘디그라는 말의 뜻을 모르더라도 배구와 연관된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고등학교 때까지, 그리고 초임 시절까지 친목활동으로 배구를 자주 했다. 자주는 아니지만 배구 겨울리그도 재미있게 보았다. 시원스럽게 내지르는 남자 배구도 재미있었지만, 아기자기하게, 공격과 수비, 재공격이 이어지는 여자 배구를 더 재미있게 보았다. 특히 상대방 공격수가 후위 공격으로 강스파이크를 내리 꽂을 때, 그것을 받아내는 리베로의 모습을 경기의 흐름을 바꾸는 중요한 반전의 기회의기도 했다. , 그런데 디그라는 용어는 모르고 있었다. 이 책 디그요정을 읽고, 고려증권 선수들을 유튜브로 찾아보며, 새삼 배구의 매력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 책은 배구의 리베로가 공을 잘 다스려 공격을 만들어 내는 중요한 역할을 우리 삶에 빗대 표현하고 있다. 배구가 기본적으로 스파이크(외부 자극)에 대한 적절한 대응과 반격인 것처럼, 우리 역시 홀로 던져졌기에(데미안) 무수한 외부 자극에 대해 넉넉한 디그가 필요하지 않을까, 배구를 중심 소재로 다양한 인물들의 디그를 그려내고 있다.

 

고등학교 국어교사의 글이라 교사 입장에서 학교의 문제 상황이 잘 드러난다. 배움에 대한 도주를 넘어 저항이 큰 중학생들 보다는 수능이라는 명확한 목표가 있는 고등학교를 선호하는 교사들이 많아 인사발령 상황에서도 인문게 고등학교 근무는 치열한 편이다.

그런데 실상 의식 있는 교사들은 고등학교 근무의 어려움을 느끼며 나름의 방법으로 풀어가고 있는 것 같다. 아이들의 머리가 그만큼 컸으니까.

 

350쪽이나 되는 두꺼운 분량임에도 작가의 재미있는 입담으로 쉽게 몰입하여 읽을 수 있다.

작가는 공부도 하나의 능력이고, 동업자 입장에서 선생하기 가장 어려운 영어교사 봉수를 통해, 학교교육의 문제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소수를 제외하고 끊임없이 무기력을 학습하는 학교이기보다, 어떤 계기를 만들어 자존감과 효능감을 기를 수 있다면, 학교 교육의 중요한 기능인 교양교육도 가능하지 않을까.

실상 디그요정은 이름마저도 고민스러운 김수능이 아니라 봉수와 같은 우리 교사가 돼야 한다는, 그래서 이 책은 학생보다는 교사용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봉수와 같은 상황에 있는 교사들은 거의 그럴 것 같지 않다는 역설적인 학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촌스럽고 익살스럽게 느껴지는 표지는 절망적이고 암담한 현실을 학교에서라도 유쾌하게 풀어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상징으로 읽히기도 한다.

 

(152) “그날 내가 쉰여덟 대를 맞았다. 그것도 뺨을! 내 고등학교 시절은 사실상 그걸로 끝이 났어. 아직 낯도 채 익지 않은 급우들 앞에서 그렇게 만신창이가 되고 나니까... 자존감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지. 그때 고작해야 내 나이가 열일곱, 그리고 아무 잘못도 없는데 그러고 나니까 매사 자신감도 없어지고, 뭐가 부끄러운지도 모르겠는데 하여튼 부끄러워서 숨고 싶고, 두렵고... 엉망이 돼 버렸지.”

 

✎ 체벌이 한 사람의 인생을 얼마나 망치는지 새삼 돌이켜 보게 된다.

 

(153) “교육은 성적으로 줄 세우는 게 아니야. 줄 세우면 모두가 피해자가 될 뿐. 일등과 이등 차이가 얼마나 되겠어? 내가 담임하는 교실만큼은 일등이라고 으스대는 녀석도, 꼴찌라고 기죽는 아이도 없게 만들고 싶었어. 영갑이 자네도 알다시피 공부도 특기잖아. 축구화 신는다고 누구나 박지성이, 손흥민이가 되는 게 아니듯이 누구나 영갑이 자네처럼 서울대를 척척 들어가는 게 아니란 거지. 또 그 문이 얼마나 좁아. 모두가 그리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기죽지 말고, 각자 자기 삶에서 보람을 찾는 길을 말해 주고 싶었어. 인간은 말이야. 돈은 없어도 가오만은 살아 있어야 하는 거라고!”

 

✎ 이글 주인공 봉수는 학교폭력을 당하고 나서 교사가 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학교 교육에서 공부도 하나의 특기일 뿐. 기죽지 말고, 각자 자기 삶에서 보람을 찾는 길을 찾자. 교육이 아닌 사육을 교육현장에서 없애려고. 나는 하나만 잘해도 잘 살 수 있는 학교교육에 대해서는 생각이 다름. 그렇지만 공부를 못한다고 사람취급하지는 않는 것도 문제. 우리 교육의 목표가 무엇인가?

 

(180) “너는 컴퓨터 게임이 뭐가 그렇게 재미난데?”
“…….”
“넌 네가 좋아하는 것도 남한테 설명 못하지? 난 아까 배구가 왜 좋은지 너한테 분명히 다 말했다? 이게 너하고 나하고 차이야. 공부 좀 하란 말이야. 자기 생각을 말로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공부하는 거야.”

 

✎ 공부하는 이유가 설명이 됨. 공부하는 이유는 결국 자기 생각을 잘 표현하기 위한 것.

 

(182) “수능아,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현실은 배구와 다를 거야. 배구는 경기 중에만 강스파이크가 날아오지만 삶은 시도 때도 없이 스파이크가 날아와. 너와 나는 어린 나이에 스파이크가 뭔지도 모르고 맞고 말았잖아? 난 이제 어디서 스파이크가 날아와도 상관없어. 강하면 달래고 죽어 가면 살릴 거야.”

(223) 십 년 동안 나를 발목 잡고, 우울하게 만들고, 죽고 싶게 했던 사연이 그렇게 끝이 났다.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이야기에 갇혀서 그동안 그렇게 허우적거리며 살았다니. 아버지와 엄마가 갈라선 이야기는 대단히 거창할 줄 알았는데. 시원섭섭하다는 게 이런 것일까.

 

✎ 서로 친구가 된, 영어 샘과 알바집 사장, 아버지와의 대화에서 수능이는 아빠가 이혼하기까지의 과정을 듣는다. 1시간 남짓이면 속사정을 알 수 있는 이야기를 수능이는 알지 못해, 2때까지 죽을 생각까지 하며 무기력하게 살았다. 수능이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결국 표현해야 한다. 바로 위의 연주말처럼 결국 표현하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 내가 말하지 않고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만큼 배려 없고 이기적인 것도 없겠다.

 

(232) “등은 혼자만 있으면 외로워. 네가 지닌 마음의 등에 불을 밝히고 둘러보면 너를 기다리는 작은 등이 의외로 많다는 걸 알게 될 거야. 내가 가진 등에 작은 불을 밝히고 다른 등을 만나 함께 세상을 밝히는 게 좋아. 알아들었어?”
“야, 잔소리 좀 고만해라. 등 등 등 등, 따라오면서까지 등 등 거리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 마음에도 등 하나 밝혀야겠다는 생각이 자리를 잡는 느낌이었다. 그게 어떻게 하는 것인지 잘 알지는 못했으나 이 시간에 나를 기다리는 등불이 고 사장이라고 친다면 무슨 의미인지 알 것도 같았다.

 

한없이 약해보이는 연등의 연대에서 연대의 힘이 느껴진다. 배구가 그렇고 인간이란 말이 그러하듯, 학교의 역할도 끊임없는 연결 속에서 가늘지만 복잡하게 이어져 울림이 있는 연대의 긍정적인 경험을 만들어 가는 곳이다

 

디그요정
국내도서
저자 : 김호준
출판 : 양철북 2017.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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