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스푼의 시간(구병모)

사람과 로봇, 사람보다 더 인간적인 로봇의 문제를 다룬 단편집 "안녕, 베타"와 연관된 책을 찾다 추천받은 책이 "한 스푼의 시간"이다.

제목만으로는 그 의미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책을 다 읽고 나니, 희색 바탕에 점점의 흔적들과 파란 물방울 속 세상의 표지가 이야기를 담고 있음을 알았다.
직장에서 명퇴를 당하고, 새로 시작한 세탁소가 자리잡힐 즈음 갑작스럽게 아내와 사별한 명정은 아들을 의지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아들도 이국에서 이국으로 출장가던 중 항공사고로 갑작스럽게 잃고 아들의 흔적도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렇게 홀로 살아내던 중, 아들이 남긴 인공지능로봇을 택배로 받으면서, 둘째를 낳으며 불려주려고 했던 '은결'이라는 이름까지 부여하며 함께 생활하게 된다.

(227) 사람이 무너지면 무너진 그 사람이 죽나요. 아니면 옆에 있던 사람이 숨을 거둡니까.
그건 사람마다 다르겠지. 둘 다일 수도 있고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사람이 건물과 다른 건 부서져도 대강 이어 붙일 수 있다는 점일까. 다시 일어난다는 점일까. 나는 아내가 떠난 뒤 무너졌지만 죽지 않았고, 아들을 그렇게 보내고 나서도 무너지는 줄 알았지만 역시 이렇게 살아 있는데 두 번째는 아무래도 네가 여기 왔기 때문이겠구나. 내가 특별히 의지나 신념이 강한 사람도 아니고, 삶에 미련이 있어서도 아니지만, 보통 사람은 스스로 죽지 못할 때 별 수 없이 살아가곤 하지. 네가 없었다면 나도 어쩌면..

그러면서 이야기는 인공지능로봇 '은결'의 관찰자 시선으로 진행한다.
은결은 인물들의 행동과 생각을 세밀하게 관찰하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즉 사람의 감정이나 상황의 변화를 섬세하게 관찰하고 분석하며 이해하려고 하지만, 어떻게 규정할 수 없기에 한 명 한 명이 소중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인간성을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한다.그 과정에서 사람의 다양한 감정과 행동에 대해 낯설게 생각해 보게 한다.
 
(66) 은결은 인공피부가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열기와 냉기를 감지할 수 있도록 촉각 신경이 분포되어 있고 내열도는 섭씨 300도까지인데 은결에게 감지한다는 건 정보 입력과 반응 출력, 곧 지식과 학습이므로 느낌을 전해줄 방법은 딱히 없다고 명정은 말했었다. 느낌은 역시 느낄 수 있는 존재에게 들려주었을 때 성립되는 추상적인 개념이며, 은결에게 있어서는 감각기관을 통한 외부 정보의 입수까지가 한계일 거라고 했다. 습득한 정보를 마음속에서 어떻게 굴리는지가 사람이 말하는 느낌의 시작이라고. 

(109) "저한테 기대시겠습니까."
이것도 좀 아닌 것 같지만 은결은 더 이상 연산체계를 바로 잡느라 도리질할 필요가 없다. 애쓰지 않아도 돼, 라고 말하며 고개 든 시호가 눈물범벅인 얼굴로 웃고 있어서다. 울음과 웃음이 한 얼굴에 존재하는 게 사람에게는 범상한 일일지 모르나 은결은 이런 아이러니를 분석 및 정렬하지 못한다. 시호는 어깨를 들먹이며 웃느라 호흡이 불규칙하다. 그녀의 온모에 고여 있던 판별 불능의 감정들이 가쁘게 오르내리는 어깨를 따라 출렁거린다. 기쁨, 즐거움, 허탈함, 황당함, 아니면 광기-인간의 웃음도 울음만큼이나 그 알고리즘을 해독하기 어려우며, 울다가 웃거나 웃다가 울기라도 하면 그 정도는 더욱 심하다. 시호는 자기도 웃음을 그치고 싶은데 감정의 분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듯 은결의 어깨를 주먹으로 치며 웃는다. 
 
그런 '은결'이 명정의 죽음 이후에, 홀로 남겨진 상황에서 '끝'을 표현하는 '무너진다'에 공감하며,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장면은, 죽음이 우리 인간에게 얼마나 큰 아픔인지 환기시켜 준다.
은결이 '죽음'의 의미를 이해했다는 점에서, 또 계산의 결과가 아닌 갑작스러운 행동이라는 점에서 '충동' 역시 우리 인간만의 특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227) 사람이 스스로 죽음을 택할 때란 어떤 때입니까.
지구상에 사람이 70억 명이나 되는데 그들 각자의 이유라면 70억 가지도 넘겠지만 너한테 말해줄 수가 없구나. 말해본들 네가 알지 못할 좌절이기도 하고.
그때 은결의 머릿속에서 표적을 알지 못하는 방아쇠가 당겨진다. 다리의 신경을 지탱하던 인공세포들이 일순간 휘발되기라도 한 듯 은결은 욕조 깊이 주저앉는다. 옷이 빠르게 젖어든다. 욕조 등받이를 따라 엉덩이가 미끄러지고 거품이 입속으로 밀려들어온다. 인공장기가 외부의 이상 신호를 감지하고 팽창하는 감각. 주요 메모리 안으로 응축 및 집약되는 세계들.. 

그러나 준교와 시호의 도움으로 은결은 구조되고, 준교의 손녀에게 자신의 삶을 들려줄 정도가 된다. 반복적인 학습과 시간의 흐름 속에 은결은 사람을 '거의' 이해하게 된다.

(249) 그는 인간의 시간이 흰 도화지에 찍은 검은 점 한 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그 점이 퇴락하여 지워지기 전에 사람은 사랑 있는 나날들 동안 힘껏 분노하거나 사랑하는 한편 절망 속에서도 열망을 잊지 않으며 끝없이 무언가를 간구하고 기원해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안다. 그것이 바로, 어느 날 물속에 떨어져 녹아내리던 푸른 세제 한 스푼이 그에게 가르쳐 준 모든 것이다. 
 
우주와 지구의 역사에 빗댈 것도 없이, 평균적으로도 우리 인간은 유한한 시간을 살며, 게다가 질병이나 예상치 못한 사고로 더 빨리 마감하기도 하는 존재다.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예상치 못한 다양한 문제들을 만나 들뜨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며 산다. 그런 사람들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삶이지 않을까.

읽다보니, 손원평의 "아몬드"가 떠오른다.  
감정표현 불능증에 걸린 '윤재'가 부모에게 버림받아 깊은 상처를 받아 뒤틀린 '곤이'를 오히려 편견 없는 이해와 사랑을 펼쳐 나가는 과정이 은결이와 비슷한 것 같은..
 
한 스푼의 시간
국내도서
저자 : 구병모
출판 : 예담 201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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