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조남주)

청소년 독서모임에서 여 선생님들이 읽어보자는 제안을 했다.

책을 구입하려고 온라인 서점을 들춰보니 '무라카미 하루키'를 제친,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었다. 굳이 사서 볼 필요가 있을까 싶어 무등도서관에 들렀으나 10여 권 모두 대출중이었다. 마침 회의차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터미널에 들렀다 영풍문구에서 구입했다. 빛바랜 듯한 두꺼운 표지에는, 인물보다 더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눈에 띠고, 삽화 하나 없는 비교적 큰 글씨의 본문을 흔들리는 차 안에서도 뚜렷하고 깊게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었다.


'육아 우울증'이라는 단어로 뭉뚱그리기에 김지영의 좌절감이 크다. 게다가 다른 김지영들의 목소리까지도 대신 전하는 대표 김지영의 스토리에, 김지영들의 상황을 생생하게 뒷받침하는 통계자료까지 인용해 36살 김지영은 개성적인 캐릭터이기 보다는 시대의 아픔을 잘 드러낸 보편적인 캐릭터로 완성된다. 게다가 영화 "박하사탕"의 가장 강렬한 장면 "나 다시 돌아갈래~"를 떠올리게 하는 역순행적 구성 방식과 김지영 씨를 치료하는 의사의 마지막 발언은, 그러저러한 상황을 다 이해하더라도 대한민국의 '아이 엄마'가 '맘충'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시 한 번 쐐기 박는 듯하다.


나에게도 71년생 '김지영' 누나가 있다. 누나의 삶까지 겹쳐 읽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공부를 잘 했던 누나는 교사가 꿈이었으나,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지역 상업고에 진학해 졸업하자마자 취직하고 집안에 힘을 보탰다. 그 덕이 크기에 누나의 아픔이 겹쳐졌다.
올해 내 연구실에는 나 외에 여교사 7명이 같이 생활하고 있다. 아이들 챙기느라 제대로 식사도 하지 못하고 오고, 퇴근하기 바쁘게 아이들 데리러 가는 동료들이 적지 않다. 독서모임이든 교과모임이든 조직활동이든 열정적이며 똑똑하게 잘 처리해 내는 동료들이 육아로 5년 이상씩 같이 모임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안타깝다. 웬만한 규모의 직장에는 직장어린이집이 있는데..
1982년생 김지영들은 이렇다고 하고, 그러면 한창 취직할 1992년생 26세 김지영과 2002년생 고딩 김지영들의 삶은 조금 다를까. 그 어느 때보다 세대 간 경쟁과 함께 남녀간 경쟁도 심각해 지고 있다.

 

(93) "아, 됐어. 씹다 버린 껌을 누가 씹냐?"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만 남에게 억지로 권하지는 않고, 후배들에게 밥을 잘 사 주지만 되도록 함께 먹지는 않는 선배였다. 태도가 단정하고 깔끔해서 김지영 씨도 항상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중략)
일상에서 대체로 합리적이고 멀쩡한 태도를 유지하는 남지도, 심지어 자신이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여성에 대해서도, 저렇게 막말을 하는구나. 나는, 씹다 버린 껌이구나.

 

✎ 친구, 동료를 두고 뒷담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특히 이런 경우엔 더.

 

(143) "애 좀 크면 잠깐식 도우미도 부르고, 어린이집도 보내자. 너는 그동안 공부도 하고, 다른 일도 알아보고 그래. 이번 기회에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도 있는 거잖아. 내가 많이 도울게."
정대현 씨는 진심이었고, 그런 남편의 뜻을 잘 알면서도 김지영 씨는 불쑥 화가 났다.
"그놈의 돕는다 소리 좀 그만할 수 없어? 살림도 돕겠다, 애 키우는 것도 돕겠다, 내가 일하는 것도 돕겠다, 이 집 오빠 집 아니야? 오빠 살림 아니야? 애는 오빠 애 아니야? 그리고 내가 일하면, 그 돈은 나만 써? 왜 남의 일에 선심 쓰는 것처럼 그렇게 말해?

 

✎ 나도 직장이건, 모임이건 어떤 일을 할 때 '도와준다는 말이 싫다'. 그 말을 한 순간 오롯이 그 일은 내일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와준다는 말'은 선의가 아니다. 책임 회피일 때가 많다. 김지영 씨의 말에 공감한다.

 

(148) "예전에는 방망이 두드려서 빨고, 불 때서 삶고, 쭈그려서 쓸고 닦고 다 했어. 이제 빨래는 세탁기가 다 하고, 청소는 청소기가 다 하지 않나? 요즘 여자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더러운 옷들이 스스로 세탁기에 걸어 들어가 물과 세제를 뒤집어쓰고, 세탁이 끝나면 다시 걸어나와 건조대에 올라가지는 않아요. 청소기가 물걸레 들고 다니면서 닦고 빨고 널지도 않고요. 저 의사는 세탁기, 청소기를 써 보기는 한 걸까.(중략)
전업주부가 된 후, 김지영 씨는 '살림'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때로는 '집에서 논다'고 난이도를 후려 깎고, 때로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떠받들면서 좀처럼 비용으로 환산하려 하지 않는다. 값이 매겨지는 순간, 누군가는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겠지.

 

✎ 좋은 기억으로만 남은 '추억'이 문제다. 나쁜 기억은 방어 차원에서 제거되니까. 그런데 그런 기억들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실은 마지막 구절처럼 인정하는 순간 '대가'를 지불해야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돕는다'는 말과 맥락적으로 연결된다.

 

(164) "사람들이 나보고 맘충이래."
김지영 씨의 대답에 정대현 씨는 길게 한숨을 내쉬웠다.
"댓글 다 초딩들이 쓴 거야. 그런 말 인터넷에나 나오지 실제로 쓰는 사람 없어. 아무도 그런 생각 안 해."
"아니야. 아까 내가 들었어. 저기 길 건너 공원에서 서른쯤 된 양복 입고 회사 다니는 멀쩡한 남자들이 그랬어." (중략)
"그 커피 1500원이었어. 그 사람들도 같은 커피 마셨으니까 얼만지 알았을 거야. 오빠, 나 1500원짜리 커피 한잔 마실 자격도 없어? 아니, 1500원 아니라 1500만 원이라도 그래. 내 남편이 번 돈으로 내가 뭘 사든 그건 우리 가족 일이잖아. 내가 오빠 돈을 훔친 것도 아니잖아. 죽을 만큼 아프면서 아이를 낳았고,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돼?"
 
(175) 물론 이 선생은 훌륭한 직원이다. 얼굴은 고상하게 예쁘면서, 옷차림은 단정하게 귀엽고, 성격도 싹싹하고, 센스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커피 브랜드와 메뉴, 샷 수까지 기억했다가 사오곤 했다. 직원들에게도, 환자드에게도 늘 웃는 얼굴로 인사하고 다정하게 말을 걸어 병원 분위기를 한결 밝게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급하게 일을 그만두는 바람에 리퍼를 결정한 환자보다 상담을 종결한 환자가 더 많다. 병원 입장에서는 고객을 잃은 것이다.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도 육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여직원은 여러 가지로 곤란한 법이다. 후임은 미혼으로 알아봐야겠다.

 

✎ 이 책의 서술자는 김지영 씨를 치료하는 의사다. 현재에서 과거, 다시 현재로 돌아오며 82년생 김지영의 상처를 이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마지막 발언을 보며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문제가 사회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닌 개인적인 차원으로 문제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82년생 김지영
국내도서
저자 : 조남주
출판 : 민음사 201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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