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 행복한 책읽기/문학
- 2022. 6. 2.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은 ‘검은 고양이’나 ‘어셔가의 몰락’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확실히 기억에 남는 선명한 작품들을 알게 되었다. 영화 <캐러비언의 해적>이 연상되는 ‘병 속에서 발견된 원고’라든가, 흡혈귀 관련 영화나 소설과 연관 있어 보이는 ‘리지아’, 요즘 공포영화(<23 아이덴티티>와 같은)의 단골 소재로 쓰이는 조현병 증상을 보이는 ‘윌리엄 윌슨’, 밀폐된 공간에서 극한의 공포를 체험하게 하는 ‘구덩이의 추’,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을 연상하게 하는 ‘붉은 죽음의 가면극’, 또한 홈즈 이전 추리의 시조새같은 캐릭터 ‘오거스트 뒤팽’의 등장까지!
마치 버라어티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독서였다. 솔직히 지금 오락영화, 특히 공포나 괴기 영화의 영감의 원천은 에드가 앨런 포의 소설들이 아니었을까?
-인상 깊은 구절-
**인상 깊은 구절은 ‘브아플랫’ 앱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제 힘든 타이핑이여 안녕~
병 속에서 발견된 원고
(22) 배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과거의 혼에 씌어 있다. 선원들은 묻혀 버린 세기의 유령들처럼 앞뒤로 미끄러지듯 걷는다. 그들의 눈에서는 열정적이면서도 불안한 기색이 엿보인다. 그들의 몸이 전투용 각등의 눈부신 빛을 받아 번뜩이며 내 앞에 비스듬히 나타날 때 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느낌이 든다. 내가 평생 동안 고대 유물의 판매업자 노릇을 하며 바알베크와 타드모르, 페르세폴리스에 있던 쓰러진 기둥들의 그림자를 흡수해 내 영혼이 폐허가 될 정도였는데도.
✎ 이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정말 영화 ‘캐러비언의 해적’과 너무도 닮아 있다. 유령선의 묘사는 ‘플라잉 더치맨’이나 ‘블랙펄’과 같은 유려령선과 닮아 있고, 소용돌이 장면이라든가, 선원들의 기괴한 묘사는 읽는 내내 <캐러비언의 해적>을 떠올리게 했다.
리지아
(52) 하지만 그렇다면 그녀가 병에 걸린 뒤 키가 더 커졌단 말일까?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어떤 광기가 내게 그런 생각을 불어넣은 것일까? 한 걸음 더, 그리고 난 그녀의 발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이 닿자 그녀가 몸을 움츠렸고, 그녀의 머리를 감싼 그 소름 끼치는 수의가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술렁거리던 방의 공기 속으로 치렁치렁 헝클어진 긴 머릿단이 드리워졌는데, 그건 한밤중의 까마귀 날개보다도 더 까만색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앞에 서 있던 인물이 천천히 눈을 떴다. “적어도 이것만큼은." 나는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내가 잘못 본 것일 수가 결코, 결코 없어. 이건 광기 어린 동그랗고 검은 눈, 잃어버린 내 사랑 리지아의 눈이란 말이야!”
✎ 이 소설은 마지막까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만큼 긴장감이 넘쳤다. 모든 것이 완벽했던 전부인과 전부인을 잊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결혼해서 얻은 새신부, 그리고 점점 병약해져서 죽음에 이르게 되고, 마지막에 되살아나는 신부의 모습은.... 마치 ‘드라큘라’ 영화의 일부분을 보는 듯, 숨죽이고 지켜볼 수밖에 없았다. 정말 이게 19세기에 씌여진 거라고?
어셔가의 몰락
(64) 매들라인 아가씨의 병은 오랜 세월 수많은 의사들을 당혹시켰다. 만성 무감각증, 점진적인 쇠약화, 그리고 부분적인 강직 증상의 일시적이지만 잦은 엄습, 이런 것들이 그 특이한 병에 붙여진 진단명들이었다.
(65) 우울증 환자인 내 친구가 화폭 위에 공들여 그린 순수한 추상화를 보면 적어도 나는-당시 나를 둘러싸고 있던 환경 속에서-견딜 수 없는 정도의 강렬한 경외감을 느꼈다. 나는 푸젤리의 불타는 듯하면서도 너무나 구체적이고 환상적인 그림들을 감상할 때조차도 그렇게 강렬한 경외감을 느끼지는 못했다.
(82) 나는 그 방을, 그리고 그 저택을 피해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내가 그 저택의 낡은 포장도로를 가로질러 도망칠 때 폭풍우는 사방에서 여전히 무섭게 몰아쳤다. 그 길 위로 갑자기 횐한 빛이 사납게 비쳐서 나는 어디서 그렇게 비상한 빛이 나오는가 알아보려고 돌아섰다. 내 뒤에 있는 것은 그 거대한 집과 그 그림자뿐이었기 때문이다. 그 빛은 뉘엿뉘엿 지는 핏빛보름달에서 나오는 것이었으니, 그 보름달이 빛나는 모습은 이제 벽 사이, 한때는 거의 보일 듯 말 듯했던 갈라진 틈, 앞서 내가 언급했던 건물의 지붕에서부터 지그재그를 그리며 바닥까지 이어진 틈을 통해 생생하게 보였다. 그 틈은 맹렬한 숨을 토하며 닥쳐오는 회오리바람에 내가 바라보는 동안에도 급격히 벌어졌다. 순간 그 회오리바람의 궤도 전체가 내 눈앞에서 흐트러졌고, 거대한 벽이 사나운 기세로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으며, 내 머릿속도 별안간 어질어질해졌다. 바다의 파도가 포효하는 듯한 소리가 한동안 들려왔고, 내 발아래 있던 깊고 축축한 호수가 ‘어셔가’의 잔해를 삼키며 침울하고 조용하게 닫혔다.
✎ ‘어셔가의 몰락’은 영화로도 보고, 두세 번 소설로도 읽어서 처음 이 소설을 맞닥뜨렸을 때의 공포감은 덜 했으나, 새롭게 눈길이 가는 구절들이 있었다. 특히 어셔가의 유일한 상속자의 그림이 유명한 퓨젤리의 ‘악몽’ 연작보다 더 괴기스럽다는 표현이나, 병든 누이의 모습, 마치 공포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같은 무너지는 저택 사이로 떠오른 만월의 묘사는 그 자체로 영화였고 생생한 그림이었다.
윌리엄 윌슨
(85) 죽음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죽음에 앞서 나를 향해 닥쳐오는 어두운 그림자로 인해 내 마음은 차분하다. 내가 어스레한 골짜기를 통과하는 동안 동료 인간들의 공감 - 하마터면 동정심이라고 쓸 뻔했다-을 자아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가 어느 정도는 인간의 통제력을 넘어선 환경의 노예였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믿어 주었으면 한다. 내가 이제 나열할 여러 요소들 중에서, 무수한 실수의 사막 안에 있는 아주 조그만 숙명의 오아시스라 할지라도 나를 위해 찾아봐 주기를 바란다.
(95) 내 적수는 발성기관에 문제가 있어서 목소리를 아주 낮은 속삭임 이상으로 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116) 완전히 공포에 질린 내가 거울을 향해 한 발짝 두 발짝 다가가자, 창백하게 질리고 피로 얼룩진 내 모습이 나를 만나기 위해 힘없이 비틀거리며 한 걸음 두 걸음 다가왔다.
✎ 처음부터 얼마나 대단한 잘못을 저질렀길래 자신을 위해 실수의 사막 속에서 ‘숙명의 오아시스’를 찾아봐 달라고 당부했을까? 결국 자신 속의 또다른 자기를 품고 살았던 주인공의 처참한 결말은 요즘 유행하는 조현병이라는 정신병리학적인 병명을 떠올리게 했다. 작가도 그런 경험이 있었을까? 끔찍하면서도 슬프고, 안타까웠다. 우리 주변에 보이지 않지만 드러내지 못하는 그들을 이해해 달라는 메시지일까?
군중 속의 사람
(118) 혼자일 수 없는 이 엄청난 불행. -프랑스 문필가 라 브뤼에르 <인간에 대하여>
✎ 소설 자체는 어떤 한 사람을 좇아다니는 겨우 반나절의 이야기이지만, 소설 머리에 씌여진 이 글귀는 엄청나게 각인되었다. ‘혼자일 수 없는 불행’이라니! 정말 인간은 혼자일 수 없기에 불행한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인식되는 구절이었다.
타원형 초상황
‘이 그림은 정말로 생명 그 자체로구나!’ 그리고 곧바로 몸을 돌려 아내를 바라보았는데 — 그녀는 죽어 있었다.
✎ 요즘뿐만 아니라 꽤 오랫동안 괴담 중의 괴담, 그림이나 어떤 상징 속에 인간의 생명을 가두는 이야기의 모티브가 다 들어있는 것 같다.
붉은 죽음의 가면극
(172) 그처럼 철통같이 방비했기 때문에 그들은 당연히 자신들이 전염병에서 완벽하게 격리되었다고 생각했다. 바깥 세상 사람들은 스스로 알아서 자신을 돌보면 될 일이었더. 당분간은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슬퍼하거나 생각하는 것조차 어리석은 일이라고 보아 마땅했다.
✎ 진정 팬데믹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었다. 각자도생하는 살벌한 사회의 모습을 통렬하게 비판하며, 마지막 저주스러운 엔딩은 정말 전율 그 자체였다.
구덩이의 추
(199) 나는 고통을 참으며 결박이 허락하는 한에서 최대한 왼팔을 뻗쳐 쥐들이 먹고 남은 소량의 음식을 집어 들었다. 내가 그것의 일부를 입에 넣으려는 찰나 내 마음속으로 기쁨 혹은 희망이라 할 만한 느낌이 반쯤 밀려 들어왔다.
✎ 요즘 이런 류의 영화가 많지 않나? 어떤 특정한 공간에서 공포의 극한을 맛보는 이야기. 반달칼로 거의 몸이 절단될 뻔 하고, 구덩이에 빠져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하며, 쥐와 벌레들에 둘러싸인 끔찍한 공간의 공포, 결국 결말은 허무하게 살아나지만, 모두들 이런 악몽같은 장면으로 가위에 눌린 적은 없는지?
검은 고양이
(225) 나는 도착적인 심리란 인간 감정의 원초적 충동 중 하나.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인간으로부터 결코 분리해낼 수 없는 본질적 기능 내지 감정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내 혼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만큼이나 분명히 믿고 있다. 해서는 안 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사악하거나 어리석은 행위를 저질러 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법에 어긋나는 짓임을 알면서도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최상의 판단력을 무시하고 그 법을 위반하려는 충동에 끊임없이 사로잡히는 존재가 바로 인간 아니던가? 이 도착적인 마음이 마침내 나를 결정적인 파멸로 몰고 갈 것이다.
✎ 예전에는 살해당한 고양이의 또다른 등장과 아내의 죽음과 어이없게 밝혀진 살인자의 행동으로 충격스러웠는데, 다시 보니 ‘도착’에 대한 심오한 작가의 생각들이 눈에 들어온다. 결국은 선악을 뛰어넘는 인간의 병적인 심리가 이 세상을 점점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둑맞은 편지
(268) '--------- --------
그렇게 사악한 계획은,
아트레우스가 아니라면 티에스테스에 걸맞는 짓이로다.’
이건 크레비용의 작품 「아트레우스와 티에스테스」에 나오는 것이라네.
** 고대 그리스의 비극 작가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토대로 한 비극. 티에스테스는 왕위에 오르기 위해 형 아트레우스의 아내인 형수를 유혹한다. 그러자 아트레우스는 복수를 위해 티에스테스의 아들들을 죽여 토막을 내 요리한 다음 티에스테스에게 대접한다.
✎ 결국 뒤팽이라는 탐정이 자신의 멋짐을 남기기 위해 남긴 글인데... 잘난 척의 최고봉이 아닌가 하면서 또 세계 최초 탐정 캐릭터라는 멋진 인물을 만나 인상깊었기에 남긴 구절이다.
'행복한 책읽기 >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필경사 바틀비(한기욱 엮고 옮김) (0) | 2022.08.27 |
---|---|
허클베리 핀의 모험(마크 트웨인) (0) | 2022.07.09 |
걸리버 여행기(조너선 스위프트) (0) | 2022.04.13 |
불편한 편의점(김호연) (0) | 2022.03.31 |
프랑켄슈타인(메리 셸리) (0) | 2021.12.08 |